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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부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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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상 목사님의 하화중생(下化衆生) - 유수상 목사님 2016년 12월 418호
‘소통’의 사전적 의미는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소통을 말하는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의 어원은 ‘나눔’과 ‘공유’를 뜻하는 라틴어 ‘Communis’에서 유래합니다. 인간은 소통(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타인과 의미(가치)를 나누고 함께 공유하는 공동체적 상호작용의 삶을 살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다른 사람과 삶을 함께 나누는 커뮤니케이션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갖고 태어난 사회적 존재입니다. 그런데 소통은 ‘누구나’ 하고 있지만, ‘아무나’ 잘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국가적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에도 그 위기 진단은 잘 못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드리워진 위기현상들의 이면에는 소통의 위기가 도사리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끝을 모르고 극을 향해 치닫고 있는 사회적 혼란의 원인을 단지 도덕성의 타락 등 결과적인 사회 병리 현상으로만 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요즘 세상은 한마디로 ‘불통’, 아니 ‘먹통’의 시대입니다.
왕따, 자살, 살인, 폭력 등 각종 사회 병리 현상들은 모두 ‘소통의 왜곡’, ‘소통의 부재’에서 생겨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소통은 인간생활에서 멈출 수 없는 호흡과도 같습니다. 어느 한 부분 막힘 없이 잘 흐르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로 ‘통(通)’하고 사는 것일까요? 대화한다고 해서 소통이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교류하고 정보와 지식을 원활히 주고받으며, 감정이입이 이루어져야만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공감이란 영어로 ‘Empathy’인데, 이것은 동정이나 연민을 뜻하는 ‘Sympathy’와는 다릅니다. 그 차이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Sympathy’는 내 입장에서 상대방을 딱하게 여기는 데 반해 ‘Empathy’는 내 입장이 아닌,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때에 따라 겉으로 드러난 결과가 같을 수도 있지만,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숨겨져 있습니다. 내 입장에서 상대방을 딱하게 여기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나의 ‘판단’과 ‘평가’가 들어가기 때문에 상대방의 자존심을 다치게 하거나 상처를 덧나게 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이에 비해 공감은 상처를 치유하고 새 힘을 솟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공감의 치유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방문을 통해 여실히 보고 느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쁜 일정 중에서 세월호 유족들을 비롯하여 한국 사회의 약자들과 고통받는 이들을 만나 보듬었습니다. 교황을 만난 이들은 “인간으로 존중받는 것 같아 위로와 희망을 얻었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교황은 “세월호 추모 행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세월호 유족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제가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남의 고통을 내 고통처럼 느낄 수 있는 공감 능력, 한국의 이름난 지도자들에게선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기에 사람들은 교황에게 그토록 열광했던 것입니다.

공감의 언어는 단순한 립서비스가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타자화하지 않는 태도에서 출발하며, 이 같은 태도는 너와 내가 함께 사는 ‘공생’의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지금 진정한 의미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모두가 열을 올리며 소통을 말하고는 있지만, 세상 어느 곳, 어느 분야를 둘러보아도 시원하게 뻥 뚫려 소통되는 원활한 관계가 형성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통이 만사형통의 첫 단추임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듣고, 듣기 싫은 말에는 아예 귀를 막아버리는 습관이 몸에 배어 소통을 막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정보만 골라서 받아들이는 ‘그릇된 선택적 지각’을 벗어나지 않으면, 불통의 장벽은 영원히 허물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회가 바라고 꿈꾸는 소통하는 사회, 막혀 있는 소통의 문을 열기 위해 기술과 기법 등 자신의 이익이나 투쟁을 위한 소통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특정 입장이 강조되는 획일화된 사회와 다르게 다양한 견해가 존

중되는 사회가 비록 서로의 입장차로 인해 시끄럽게 느껴질지는 몰라도 건강하고 바람직한 사회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때의 시끄러움은 다양한 구성원들이 서로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양한 견해만 있고 다양성과 차이에 대한 존중이나 소통의 의지가 없는 사회라면 그때의 시끄러움은 배를 산으로 가게 하는 것이고, 결국 사회를 분열시키고 피폐하게 하여 사회 구성원 모두의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타자와의 열려있는 상생의 관계가 아니라 소통 부재로 인한 관계의 왜곡과 단절로 인해 서로의 차이가 차별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타자와의 열려있는 상생의 관계는 단순히 개체의 생존만이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모든 세상을 이루고 있는 기본 속성입니다. 불가의 가르침은 존재 자체, 존재의 삶, 이 세상의 구성 등, 그 모든 것이 오직 관계 맺음의 표현일 뿐이라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열린 관계성에 대한 무지는 불필요한 고통을 일으키고, 그 관계 속에 있는 모든 이를 힘들게 하기에 상호 연관성에 대한 바르고도 철저한 인식을 스스로 갖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불가에서는 수행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러한 삶의 자세가 있을 때 다양한 세상의 존재나 입장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로 차이일 뿐 더 이상 차별이 되지 않습니다.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만을 위한 자세는 관계의 왜곡이나 단절 속에서 서로의 불필요한 고통만을 낳는 것이고, 그러한 관계의 단절 자체가 곧 폭력입니다. 비폭력의 삶을 살아가라는 부처님 가르침에 의거할 때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사회 속에서 상생의 관계를 왜곡하거나 단절시키는 폭력적 상황에서도 우리는 이웃과 나를 위해 누구보다도 적극적인 참여의 자세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너와 내가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면 본질적으로 너와 내가 둘이 아니며, 이웃의 고통이 나의 고통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양성의 존중과 더불어 자신과 이웃을 위한 관계성 회복은 모든 종교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덕목입니다. 불가의 이웃과 함께하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참여가 필연이라면 요즘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소통의 단절과 부재에 대하여 제시하는 바는 명백합니다. 서로 다른 견해의 너와 내가 서로의 차이를 존중할 수 있는 열린 상호관계성의 모습이 아니라 왜곡과 단절된 관계에 바탕을 둔 폭력적 상황이었으며, 이것은 소통 부재로 인해 더욱 증폭될 것입니다.

열린 관계성의 회복이라는 공통된 가르침을 지닌 사람이라면 이러한 사회 현상에 대하여 침묵할 것인가, 적극적 참여가 필요한 것인가는 자명합니다. 어렵고 힘든 처지라도 바람직한 관계를 위해 항상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적극적 참여라는 것은 상대를 부정하고 없애려는 자세가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명확히 하고 그 차이의 어우러짐을 통하여 상생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 자체가 폭력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므로 그 과정이나 수단 역시 비폭력적이어야 합니다. 관계성 회복이라는 면에서 보면 체념 역시 약자가 행하는 폭력입니다. 결국 모든 종교인이 그렇겠지만 적극적 사회 참여란 소통을 향한 몸짓이자 비폭력의 실천입니다. 상대가 듣지 않는다고, 상대가 힘이 세다고 침묵해서는 안 되며, 그럴 수도 없으며 너와 나의 상생을 위해 참여해야 합니다. 그것이 존재 이유이자, 종교적 인간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한편, 개별 존재나 사회는 언제나 변화의 과정에 있음을 아는 종교인이 취하는 적극적 참여의 모습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역사상 인간을 소외시키고 차별하며 고통을 주는 폭력적 상황은 사회제도, 정치, 도덕, 문화, 종교 등의 다양한 모습으로 항상 함께 해왔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폭력적 상황은 우리의 범사(凡事)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폭력적 상황에 대한 적극적 참여의 자세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라는 선사의 표현처럼 범사에 감사하며 기뻐하는 마음속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감사의 마음으로 참여가 이루어질 때 그러한 비폭력의 자세는 절대 마르지 않는 샘처럼 이웃과 함께 소통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불통으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마무리하고 소통으로 만사형통하는 새해가 되길 두 손 모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