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무제無題

소림원少林院 - 수월 권상호 2016년 12월 418호
靑山塵外相(청산진외상) 청산은 티끌을 벗어난 모습이요
明月定中心(명월정중심) 명월은 선정 중의 마음이어라.
山河天眼裏(산하천안리) 산하는 하늘의 눈 속에 들어있고
世界法身中(세계법신중) 세계는 법신 가운데 있도다.
終日無忙事(종일무망사) 온종일 바쁜 일 없이 한가로우니
焚香過一生(분향과일생) 향(香)이나 사르며 일생을 보낸다.
聽鳥明聞性(청조명문성) 새소리 들으며 식견(聞)과 본성(性)을 밝히고
看花悟色空(간화오색공) 꽃을 보며 색(色)과 공(空)을 깨우쳤다네.

내용은 조금씩 달리하지만, 양산 영취산(靈鷲山) 통도사(通度寺) 대광륜전(大光輪殿), 강화 정족산(鼎足山) 전등사(傳燈寺) 대조루(對潮樓), 김천 황악산(黃岳山) 직지사(直指寺) 무명전(無名殿)을 비롯한 여러 사찰 주련(柱聯)에 나오는 많이 사용되는 내용이다.

전체적으로 1~4구의 ‘청산(靑山)’, ‘명월(明月)’, ‘산하(山河)’, ‘세계(世界)’ 등의 익숙한 시어들이 자연의 다양한 모습이라면, 5~8구의 ‘한가로움’, ‘분향(焚香)’, ‘새소리 듣기’, ‘꽃 보기’ 등은 수행자의 다양한 행적이라 할 수 있다.
1구의 티끌은 사바세계를, 2구의 정(定)은 선정(禪定)을 뜻한다. 청산은 그 자체가 가람(伽藍)이고, 밝은 달은 참선으로 삼매경에 이름을 비유한 것이다. 세상 번뇌를 모두 끊고 마음을 가다듬어 정신을 집중하면 무아정적(無我靜寂)의 경지에 이를 것이고, 마침내 명월(明月)과 같은 진리(眞理)를 깨달을 수 있으리라. 3구의 天眼(천안)은 오안의 하나로 원근·전후·상하·주야와 관계없이 자유자재로 볼 수 있는 눈을 뜻한다. 현미경과 망원경으로도 따를 수 없으며, 시공간을 함께 아우르는 눈이 천안이다. 따지고 보면 ‘육안(肉眼), 천안(天眼), 법안(法眼), 혜안(慧眼), 불안(佛眼)’의 5단계 중 2단계에 지나지 않는 천안이다. 4구의 法身(법신)은 불법을 완전히 깨달은 부처님의 몸을 뜻한다. 여기서는 천안의 밝음과 법신의 경계 없음을 노래하고 있다.

5, 6구는 깨달은 이의 모습이다. 우주와 인생의 진리를 깨달아서 모든 의혹과 번뇌를 버리고 마음의 안정을 찾은 오묘한 경지를 분향(焚香)으로 표출하고 있다. 제례에서의 향(香)은 조상신과의 교신을 위한 안테나와 같은 개념이나, 불교에서의 향은 자신을 태워 주위를 맑게 하므로 희생을 뜻하기도 하고, 해탈이나 공덕을 상징하기도 한다. 7, 8구는 청각과 시각이 절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전체적인 게송 구조 속에서 볼 때는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수도의 과정에 대한 비유이다. 어려운 시구는 7구의 문성(聞性)인데, 8구의 색(色)과 공(空)으로 볼 때, 문(聞)
은 견문이나 식견을, 성(性)은 본성(本性)이나 성품(性品)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위의 게송은 세월을 두고 쌓여온 적층 문학(積層文學)의 형태로 보인다. 1, 2구는 숨어 살며 벼슬을 하지 않았던 명(明)나라 사감(史鑒)의, <서촌집(西村集)> 3권에 처음 보이고, 3, 4구는 당(唐)나라 시인이자 화가인 왕유(王維)의 ‘하일과청룡사 알조선사(夏日過靑龍寺 謁操禪師)’라는 시에 보인다. 불교를 독실하게 믿으며 평생 선적 자연관을 노래하고 그림으로 나타낸 왕유는 ‘시불(詩佛)’이라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