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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수희찬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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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무명 2006년 04월 290호
“하늘을 덮을 만한 복이 있어야 출가수행자의 길을 가는 것이란다.”
열두 살 어린 나이에 입산했으니 출가수행의 길이 얼마나 수승한 길인지 알았겠는가. 어머니가 그리워 울고, 일이 힘겨워 우는 나에게, 노스님들은 이 얘기를 자주 하셨다. 강원을 마치고 여법하게 수행자의 길을 가면서도 나는 한참 동안 그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어린 후학들을 위로하시느라고 하시는 말씀이겠지 했는데, 불혹의 나이를 지나 진발심을 하면서 노스님들이 왜 그리 그 말씀을 자주 하셨는지 알게 되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이 길로 온 것이, 또한 수행자 되어 바른 부처님 법을 만난것이얼마나스스로를찬탄할일인가하고말이다.
지난해 동안거를 부처님께서 머무셨던 성지 붓다가야에서 정진했다. 부처님께서 호흡하셨던 성스러운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3개월 동안 붓다가야 마하보디 사원 뜰에 방석을 펴놓고 앉아 있으면서, 나는 비로소 온전하게 나 자신을 다시 수희 찬탄할 수 있었다.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셨던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서서도, 뜰을 거닐면서도 수 없이 출가수행자가 된 나를 수없이 수희 찬탄했던 것 이다.
행자시절.
‘나’를 찾을 때까지는 언제나 행자라는 생각으로 한평생을 살아왔다. 그러므로 예순이 훌쩍 넘은 나는 아직도 여전히 ‘나’를 찾지 못한 행자에 지나지 않는다. 사미니계를 받기 전의 시간들을 행자시절로 구분하는 보통의 예에 기준 한다면, 내 행자시절은 열두 살에 들어와 열여섯 살에 사미니계를 받았으니 그 기간에 해당할 것이다.
그 시절, 몇 가지 일들이 동화처럼 떠오른다. 어머니는 딸 많은 집안의 중간쯤인 나를 이웃집에 다니러 온 스님이,‘ 딸이 많은 데 절에 하나 주소’라는 말씀에 덜컥 내어 주었다. 예나 지금이나 내 주장을 내세우지 못하는 나는, 어머니가 어느 날, ‘너 절에 가서 살아라.’하는 한 마디에 그래야 하는 줄 알고 집을 나섰다. 스님을 따라 버스정류장까지 십릿길을 걸어 나오면서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 것이 내 행자시절의 첫 기억이며, 그 울음이 아마도 산에 가서 나물을 뜯으며 어머니가 그리워 울고, 나뭇 다발을 머리에 이다가 그 무게에 못 이겨 넘어지면서 울곤 하던 눈물의 시초였으리라.
초등학교 5학년을 다니다가 절에서 학교 다니는 것이 괜히 눈치도 보이거니와 꽁보리밥 도시락을 싸는 것을 두고 또래 아이들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이 싫어서, 음 력 9월 보름날, 스님들 삭발하는 자리에 가서 머리를 들이대고, ‘저도 깎아 주세요,’했다. 초등학교 5학년 봄에 와서 가을에 삭발했으니 6개월 만이었다. 조치원 대평리 중광사에서였다.
전쟁이 막 끝난 시절이었으니, 무슨 내복이 있었으랴.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동방 하나 입고 일을 해서, 겨울에 는 손등은 물론 팔뚝까지 터지고 갈라져 피가 철철 흐르곤 했다. 가끔 생각한다. 그런 고생을 잘 인내해서 지금 이렇게 수행자로 잘 지낼 수 있는가 보다하고.
종이가 귀해서 염불도 종이에 적어두고 외우지를 못했다. 은사스님이 불러주시면 머릿속에 기억해두었다가 외우고 다음 구절을 또 물어보면서 외웠으니, 물자가 흔한 세상에 사는 지금 사람들이 들으면 이해나 할는지 모르겠다. 나의 은사스님은 염불을 배우면서 잘 하지 못하면 내 머리를 목탁 삼아‘똑똑똑’두드리셨다. 맞은 머리가 아파서 눈물을 듬뿍 머금고 있으면, 은사스님은 냉정하게 그러시곤 했다.‘ 그러고 섰지 말고 후원에 가서 마지 가지고 오너라.’은사스님은 몸집도 크시고 성격도 강하신 분이어서 상좌를 반듯하게 잘 가르치려는 욕심도 많으셨던 것 같다.
열세 살의 겨울을 났던 동학사 미타암에서의 순수하기만 했던 시절도 떠오른다. 은사스님을 비롯한 몇 분의 은사스님 도반스님들이 만성 노스님을 모시고 미타암에서 한 철을 나기로 하면서 나를 데리고 갔다. 정진하는 스님들을 시봉하는 게 나의 임무였다. 그 시절엔 물자가 너무 귀해서 그릇을 깨면 깬 사람이 물어내야 했다. 전임 도감스님이 절을 내주면서 밥그릇 몇 개, 수저 몇 벌 등등 모든 살림살이를 적어두었는데, 그것에 차질이 생기면 채워넣어야 했던 것이다. 정말 알뜰하게 살던 시절이었다.
하루는, 부엌에서 일을 하다가 그만 밥그릇 하나를 깨뜨리고 말았다. 은사스님께 꾸중 들을 걸 생각하니 얼마나 겁이 나던지, 깨진 조각을 맞추어 부엌에 모셔둔 조왕님 앞에 올려놓고는 법당에 가서 절을 했다. 그렇게 절을 하면 부처님께서 깨진 그릇을 다시 맞춰주실 줄 알았는데, 절을 하고 후원에 가보면 깨진 그릇이 그대로 있는 게 아닌가. 그러면 다시 법당에 가서 절을 하고 와 다시 깨진 그릇을 바라보면서 가슴을 졸였던 그 순진무구했던 시절이 있었기에 자신을 수희 찬탄할 수 있게 된 지금이 있으리라.
절집 안팎이 다 어렵던 그 시절, 정월 초에 신도분들이 쌀을 가지고 불공을 드리러 오면 그 쌀을 다 가마솥에 쪄서 각단에 불공을 올리곤 했다. 몽땅 부처님께 공양을 올려야지 남겨두고 우리가 먹으면 안 되는 줄 알았다. 해서 그 많은 밥을 불 땐 방에 말려서 큰 독에 저장했다가 여름에 식량으로 쓰곤 했다.
돌아보면 나는 선지식 복이 많았던 것 같다. 수행자의 길을 걸으면서 많은 훌륭한 선지식을 만나 공부하는 청복을 누렸다. 네 해 남짓한 행자시절을 끝내고 석불사에서 사미니계를 받던 날, 고봉 노스님을 뵈었던 것도 잊을 수 없다. 몸이 불편하셔서 상좌인 숭산 스님의 등에 업혀 오셔서는 법상에 앉으셔서 우리 어린 사미니들에게 계를 내리시던 엄숙한 모습이 지금도 선연하다.
지난 동안거를 인도의 마하보디사원에서 보내면서 티베트스님들을 보고는 수행자로서의 나를 많이 돌아보았다. 저 행자시절처럼 그렇게 검박하고 순수하게, 그리고 ‘나’라는 상이 없이 보내고 있는가 하고 말이다. 티베트 스님이 운영하는 절에 머물면서 마하보디사원으로 가서 하루 종일 정진을 했는데, 티베트스님이 사시는 걸 보면서 많은 반성을 했다. 법랍이 오래 된 꽤 높은 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스님은 팔을 걷어붙이고 절 살림을 다했고, 만나는 이 누구에게나 자비롭게 대했다. 나라를 잃어버리고 타국에서 어렵게 살아도 구걸하는 인도인들에게 보시를 하는 사람들은 티베트인들이었다. 하도 절을 많이 해서 양발이 다 떨어져 발등만 덮였어도 남을 돕고, 오체투지로 간절히 절수행을 하는 그분들을 보면서 수행자로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달라이라마 스님께서 인도 남부의 한 티베트사원 낙성식에서‘시설을 화려하게 하고 절을 크게 짓는 것이 불법을 흥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수행을 잘하고 진실하게 중생교화를 하는 것이 불법을 잘 전하는 것이다’라고 했다는 말씀을 인도에 있으면서 들었다. 내게는 무엇보다 가슴에 깊이와 닿는 가르침이었다.
3개월의 안거를 회향하고 두 달 동안 인도 북부와 남부를 순례했다. 가는 곳 모두 인상 깊었지만, 특히 가섭 존자가 부처님의 바리때와 가사를 지니고 미륵부처님이 오시면 전하려고 머물고 계신 곳으로 알려진 계족산을 참배했을 때가 가장 인상에 남는다. 계족산 아래로 빈민촌이 많고 위험한 곳이어서 운전기사들마저 꺼리는 곳이었으나, 올라가 보니 사방이 탁트여 눈길이 시원한 곳인데다가, 인도의 무착 스님이 12년을 머물면서 공부를 하신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더 신심이 났던 곳이다.
무착 스님이 미륵부처님을 친견하려는 원을 세우고 12년 동안 공부를 해도 원을 이루지 못하자 절을 떠나려고 나오다가 병든 개를 보았다고 한다. 상처 주위에 구더기가 우글거리는 것을 보고 무착 스님이 혀로 핥아 구더기를 빼내려고 하자 개가 보살로 화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남은 내 수행의 길을 어떻게 가야 할지를 뼛속에 새겼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수희 찬탄하시오.’라고 하시던, 붓다가야에서 만나 뵌 여든이 넘으신 티베트 노스님의 말씀과 함께.□
취재·글 /박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