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날 조주 선사가 방 안에서 좌선을 하고 있을 때였다. 소임자가 들어와 대왕이 뵈러왔음을 알렸다. 왕이 절을 다 마치자 주변사람들이 물었다.
“한나라의왕이오셨는데무엇때문에일어나지않으십니까?”
“그대는 여기 나를 모르는가? 하급 사람이 오면 절 문까지 나가서 맞이하고, 중급 사람이 오면 선상을 내려가서 맞이하고, 상급 사람이 오면 선상에 앉은 채로 맞소. 대왕을 중급이나 하급 사람이라 부를 수 없으니, 대왕을 욕되게 할까 두렵소.”
봄바람은앙상한가지에머물러아직채오지못한봄을재촉한다.
제비 한 마리가 왔다고 해서 봄이 아니고, 때 이른 개나리꽃이 피었다고 해서 봄은 아니며, 바람이 한번쯤 불다가 갔다 해서 봄은 아니다. 그러나 천지가 만들어낸 조화 속에서는 그‘시절’이 있어 우리는 봄을 기다리는 것이어서 분명 때가 이르면 봄은 어느새 주변을 지나가고 있다. 오늘도 오후 창가에 질펀하게 끼얹은 봄 햇살과 봄을 기다리는 내 마음이 통하여, 아직 앙상한 그 나뭇가지에 나도 한번 마음을 슬쩍 의지하여 봄을 기다리는 것이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야 언제나 하릴없어서 이미 봄이 와 있는지조차가 불분명한데, 이는 사람의 오감五感이 믿을 만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올 봄 탐매探梅는 고사하고 망춘望春에도 발걸음을 못해 보았으나 어느 오후 봄볕을 외로 쬐고 앉아 있으려니 잠시 창에 부서지던 새들의 제 짝 찾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봄이구나 하였다. 이처럼 미물들은 온 몸으로 봄을 알고 있었는데, 나는 어느새 봄의 뜰 한중간에서서 그저 부족한 겨를만 탓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한 스님이 조주(趙州從778~897) 선사께 물었다.
“하루 스물네 시간을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합니까?”
“그대는 스물네 시간의 부림을 받지만 나는 스물네 시간을 부릴 수 있다. 그대는 어느 시간을 묻느냐?”
부릴 시간이 하루면 스물네 시간인데, 그 긴 시간 중에 잠시 잠깐 봄을 생각하는 것조차 잊고 살아가는 범부의 일상에 스스로 딱할 노릇이다. 부리는 시간이 어찌 스물네 시간만 될 것인가마는 옛 조사들의 시간을 생각함이 이와 같다.
규괘 卦에서는 천지(天與地)는 서로 어긋나 있기 때문에 낮과 밤을 만들고, 남녀는 서로 어긋나 있어 그 뜻이 통한다 하였다. 자리가 같아야 지선至善은 아닌 것이며 같이 간다고 해서 꼭 이루는 바가 같지도 않다. 만물은 각자 제자리가 있어 행동은 서로 다를지나 그 뜻이 같아 조화를 이뤄 결과를 만들어낸다. 하늘이 없는 땅이 어디 있으며 부모가 없는 자식이 어디 있으랴. 하늘과 땅이 자리는 다를지나, 이 둘이만나야 시간이 생겨나고 또 공간이 생겨나며 여기에 만물이 나고 자라게 되는 것이다. 또한 부모가 있으면 자식이 있으니 이 둘이 만나야 하나의 가문이 생기고 발전하게 된다. 부모만 있을 수도 없거니와 자식만 있을 수도 없는 일 아니겠는가. 이것이 어긋남의 큰 뜻이니 때와 쓰임이 어찌 작다고 할 수 있을까. 천지의 관점으로 보건대 만
물은 각자 그때가 있고, 쓰임은 각기 다를 뿐이다.
윤두서(恭齋尹斗緖1668~1715)는 조선 후기에 활동하던 화가이다. 그는 해남에 있던 자기집 뜰 밖을 잘 나가지 않았던 은둔 거사이기도 하였다. 학자로서도 유명하였으나 화가로서 더 유명하여 그가 그린 자화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보240호)은 형사形似는 물론이고 그 정신까지도 잘 드러낸 득의작得意作으로 꼽히는 그림이다.
윤두서의 평소 관심거리가 현실과 실제에 있었음은 그의 그림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자신의 얼굴을 그린 자화상이 그의 세심한 붓질을 보여주는 그림이었다면 노승을 그린 이 그림은 담백하고 단순한 붓질만으로 조사의 정신을 전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공재의그림에는특히불가와도가의은둔한수행자들을그린그림이많이있는데, 아마도이는그의생활이그러했음을보여주는것이아닐까싶다.
이 그림에서 화면 중앙에 구부정하게 서 있는 노승의 모습은 매우 세심해 보이는 표정이며 팔뚝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앙상하기만 한데, 그 표정과 육신은 담담하고 청빈한 산중생활을 그대로 드러낸다. 반면 그가 들고 있는 석장錫杖의 활달한 먹의 흐름과 입고 있는 가사의 진하면서도 뚝뚝 끊어지는 듯한 붓질은 표정의 고요함과 묘한 대조를 이루며 자칫 섬약한 데로 빠지기 쉬운 그 조용한 표정을 덮어버리고도 남음이 있다.
마치 노승이 서 있는 공간은 지팡이의 굵은 대각선으로 비로소 넓혀진 느낌으로 그림에 있어 붓질 하나가 얼마나 다른 정서를 보여줄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아주 육중해 보이는 석장 하나만으로도 주인공인 조사祖師 평생을 의지했던 불법이 석장의 필력만큼든든한 것이었음을 고집스럽게보여주고있다
세파에 지친 세월에는 내가 짚고 있는 지팡이만큼 든든하게 느껴지는 것도 없다. 어느 친구나 가족이 내 몸 하나 의지한 지팡이만큼 살가울 수 있을까. 거친 바다를 막막하게 헤쳐나갈 때의 의지 같은 것은석장하나처럼아무것도아닌데서찾게되기도하는것이다.
어느 날 조주 선사가 방 안에서 좌선을 하고 있을 때였다. 소임자가 들어와 대왕이 뵈러왔음을 알렸다. 왕이 절을 다 마치자 주변 사람들이 물었다.
“한나라의왕이오셨는데무엇때문에일어나지않으십니까?”
“그대는 여기 나를 모르는가? 하급 사람이 오면 절 문까지 나가서 맞이하고, 중급 사람이 오면 선상을 내려가서 맞이하고, 상급 사람이 오면 선상에 앉은 채로 맞소. 대왕을 중급이나 하급 사람이라 부를 수 없으니, 대왕을 욕되게 할까두렵소.”
대왕은 이 말에 매우 기뻐하며 스님께 진부鎭府에오셔서공양받으실것을두번세번청하였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시절이다. 이제는 슬슬 휴식보다는 정진이 더 어울리는 시기가 아닌가. 선상에 앉아 있지는 못했을망정 오늘도 세상을 상대로 하급이나 중급의 사람 노릇만 하고 산 것 같아 길어진 햇살 꼬리만큼 후회도 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