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이 지난 듯 아닌 듯 흘러 어느덧 강원의2년차 과정에 접어들었다.
해인사의 일 년, 길 것만 같던 시간은 어느새 흘러 박제된 기억으로 남겨져 있다.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느낌들… 그 중에서도 이즈음에 있는 정대불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다른 일들에 비해 유달리 기억에 남는 일일 것이다. 아마도 한 해의 서막처럼 여겨져서이기 때문이겠지. 다른 곳보다는 지형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때문인지 봄이 조금은 늦게 시작되는 이곳, 강원에 갓 입방한 작년 이맘때쯤에는 낯선 분위기 때문인지 좀처럼 긴장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 감정을 180도로 바꾸어놓은 것이 바로 팔만대장경 정대불사이다. 조선 태조 7년에 팔만대장경을 강화도 선원사에서 이곳 해인사로 이전할 때 많은 신도들 이 경판을 머리에 이고 옮긴 데서 비롯된 의식으로서 다수의 사부중 四部衆이 참여하는 사중의 행사이기도 하고, 어른 스님들의 법문에 곁 들여 영가천도의식이라든지 그 이 외의 다양한 일정을 포함하고 있는 행사이기도 하다. 이런 큰 행사를 강원생 전체가 참여해 모든 일정을 이끌어 가게 되기 때문에 쉴 틈 없는 이틀간의 여정을 갖는다. 첫날 아침부터 강원에서는 신도들의 숙소로 관음전 대방을 비워주 기 위해 너 나 할 것 없이 분주하기 만 하다. 발우에는 누구의 것인지 이름을 붙여 안으로 들여놓고 다른 나머지 비품들 또한 마저 들여놓은 후 지대방으로 통하는 문을 밀봉한 다. 그런 사이 중요 소임자들은 오후에 있을 시련侍輦에서 누가 무엇을 맡는지 일일이 재확인한다. 어찌 보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짜임새 있게 하는 일이라서 여간 신경이 쓰이는 일도 아니련만 윗반 아랫반이 머리를 맞대고 모여 진행하다 보면 모자란 점도 서로 챙겨주게 되고 쉬는 틈틈이 작은 임시 숙소에 모여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이전의 긴장감도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자연히 사그라지는 것이다. 힘든 일일수록 같이 나누고 나면 그만큼 살갑게 되는 것일까. 많은 사부중의 공양을 위해 후원에서의 전반에 일들을 도맡아 하기도 하고, 인원을 통제한다거나 직접 의식에 참여하게 되는 일들이 모두 그다지 쉽지마는 않은 것인데 전반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어렵다는 느낌도 가질 사이 없이 흘러간다. 첫날, 늦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법문에서 초롱초롱한 시선으로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 기울이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그네들과 함께 한 말씀 한 말씀을 귀에 담노라면 늦은 시각임에도 피로를 느낄 수가 없다. 점차로 행사는 절정에 다다라 대령, 관욕에서 아침예불로 이어지고, 곧 이어 모두들 정성껏 사경해 온 것을 모아 소전하는 의식으로 연결된다. 저마다 각각 두 손으로 향을 받아 들고, 그 안에 소원을 담아 올리는 모습이 구성지다. 아이들의 손을 부여잡고 나선 사람들, 지팡이에 기대 어 있는 사람들, 가족 전체를 동반 하거나 혹은 부모님을 모시고 온 사람들, 등등의 이런저런 사람들이 한 데 뒤섞여 불길을 바라보고 저마다 의 마음들을 모은다. 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이들이 태반인데 누구 하나 피로에 지친 기색이 없다. 갖가지 바람들이 하늘을 날아오르는 듯 불길이 하늘을 바라고 불타오른다. 이틀 동안의 행사 일정 중에 있어 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의식은 팔만대장경을 머리에 이고 만다라를 통해 이운하는 일정이겠지 싶다.
집전하시는 스님들을 비롯해 사중 의 어른스님들의 뒤로 신도들이 경판을 이고 따른다. 그네들에게 경판 을 건네는 손길은 쉴 새 없이 이어 지지만 누구 하나 정성스럽지 않은 이가 없고 보면 반복되는 손놀림도 여간 가볍지가 않다. 서로 자리를 다투지도 않고 나란히 줄지어 기다리던 그네들이 저마다 합장을 하고 경판을 이면 만다라는 여지없이 하 나의 길이 된다. 그들의 길이 불도佛道에 이르고자 하는 마음을 그리는게 아닐까. 그런 맘들이 한데 모여 어느새 이틀간의 일정도 막을 내린다. 행사의 여운을 남기고, 가을 불사를 기약하며 저마다 가슴으로 합장을 하는 사람들… 아마도 하나 된 마음들이 이 러하지않을까싶다. 행사를 거꾸로 올라가듯 관음전 대방을 치우면서 그네들이 남긴 흔 적을 더듬다 보면 어느새 가슴이 뿌듯해지기도 하고, 강원생들 간에도 서로의 수고를 격려하는 중에 더불어 한층 더 가까워진 마음이 오간다.
어느새 일 년이 지나 기억이란 이름의 창고에 들어차게 되면 내년 이맘때쯤이면 다시 새로 들어온 신입 방부자들이 이 자리에 서겠고, 올해 새로 방부를 들인 몇몇 스님들이 봄 철 정대불사를 즈음하여 이런 맘들 을 떠올리겠지 싶다. 해인사에의 한 해를 시작하는 기억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