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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던 길 앞에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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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설세설 - 해인 2006년 04월 290호
탱화 古人도 날 못 뵈고 나도 古人못뵈
古人을 못 뵈어도 가던 길 앞에 있네
가던 길 앞에 있으니 아니 가고 어이리

청매 피던 날 겨우내 잘 익은 돌 배차를 첫물 떴다. 핑그르르 꽃잎도 한 송이 띄워 마주 앉아 잔을 기울인다. 일기일회一期一會! 이생에 단 한번 이렇게 만남이 아쉬워서 청매 꽃잎 더 푸르고 돌 배차 깊은 맛이 혀끝에 감치는데 둘러앉은 함축된 시선 속에 누가 먼저 입을 열까. 침묵이 흐른다. 사람이 천지간에 살다 가는 것이 벽 틈새 지나가는 말 그림자 같다지만 마주 앉은 시간이 무량겁으로 이어진다. 천하 없는 웅변도 금이 되지 못하는, 그냥 이대로 좋은 한 순간이다. 정말 소중한 것은 말 속에 있지 않다네. 눈이 입보다 많은 말을 하나니 어설픈 세상에 서로의 재능과 그릇을 알아볼 줄 아는 백락일고伯樂一顧의 만남을 가질 수 있다면 더 할 것이 없겠지만 서로에 대한 동질성을 자각하며 한 시대 더불어 사는 것만으로도 소중하여 얼마나 큰 신뢰와 상호작용이 오가는지. 용서 서恕자는 같을 여如자에 마음 심心자이다. 내 마음과 같이 여기면 용서 못할 일이 없으니 내 마음을 미루어서 남의 마음을 헤아리라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관계론이어서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바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말라는 것이 혈구지도絜矩之道의 가르침이다. 밤새 안녕이라는 인사말 없이도 한 번의 따사로운 눈빛에서 인仁의 절대 작용을 본다는 논어 할아버지의 지론이 생각난다. 온溫! 따사로움의 철학은 일헌一軒이완재 교수님을 제외하고선 말할 수 없는데, 고전을 가르치며 인간 되는 길을 몸소 실천하며 인간되는 도리를 설파하시는 분, 만물에 대해 온화한 따사로움을 바탕으로 인의仁義의 가치세계를 추구하는 군자시다. 영남학파 유학의 거두로서 풍기는 서권기書卷氣보다 내게 더 소중한 것은 17성상星霜을 한결같이 매주 토요일 첫새벽 길을 달려와 운문사 학인들을 위해 유학강의를 해주시는 노교수님의 성실함이다. 그동안 선생님과 함께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네 번씩 만났나보다. 위편삼절韋編三絶이라!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지도록 주역을 읽고도 하늘이 내게 몇 년 만 더 시간을 주신다면 못다 한 의미를 마저 회통하리라던 공자님께 견주랴만 가르침으로 자기공부의 원숙에 드신 선생님의 모습은 내 앞에 서 계신 공자님과 다름 아니다. 우러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견고 하며, 바라보면 홀연 앞에 계신 듯 하여 참으로 고마움을 필설로 다할 수 없다.
미래는 오래 된 과거로부터 오는 것, 과거는 과거가 아니다. 지금 현재라고 말하는 순간 현재도 현재가 아니듯. 그리고 미래는 외부가 아닌 내부로부터 오는 것. 이 말을 공감하기 이전부터 고전은 나의 벗이었다. 특히 동양고전 읽기는 내 삶의 소중한 반려이다. 흔히 말하는과거로의회귀와고전을통한당면과제분석, 재조명 혹은 고전사상서들의 거대담론을 통해 이 시대를 새롭게 열어가려거나 세상 살아가는 힘과 지혜를 얻으려한다는 다분히 의도적인 독서 목적은 차라리 진부하다. 고전이 거기 그 자리에 있으므로 그리고 평생의 벗으로 그만한 문자 향을 만나지 못하였으므로.□
영덕
도산십이곡중 아홉 번째 시. 성현의 옛 도리 본받아 인륜의 도를 실천할 것을 권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