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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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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자타 - 박재은 2006년 01월 287호
‘킹콩’이라는 영화를 봤다. 몇 십 년 전부터 수차례에 걸쳐 다양한 시각과 영화적 접근에 의해 만들어져 왔지만, 2005년의 ‘킹콩’은 ‘감정’이 살아 있다는 것을 부각시킨 감성영화다. 제작 의도가 잘 드러나서인지 포악한 성질과 육중한(기괴하다고 해야 할) 외모, 문명과는 상관없는 ‘일자무식’ 킹콩을 보노라니 ‘괴물’이라는 느낌보다는 ‘노틀담의 꼽추’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없고, 외모가 일반인들과 다르지만 눈빛만은 맑은, 사회적으로 적합한 표현을 못할 뿐이지 선한 마음씨와 감정은 살아 있다는 점에서 ‘킹콩’과 ‘노틀담의 꼽추’가 닮아 보였다. 그 둘이 닮은 점이 또 있는데, 바로 ‘사랑’을 할 줄 아는 로맨티스트라는 사실. 전 파리 시민에게 흉측하고 무식하다는 이유로 손가락질을 받고 살던 꼽추는 아리따운 여인 ‘에스메랄다’를 보자마자 한눈에 사랑에 빠지고, 죽음을 불사하는 순정을 맹세하지 않나. 킹콩도 마찬가지다. 긴 세월 문명과 담을 쌓은 무인도에서 야생 동물들을 거느리며 살아가다가 우연히 섬에 들어온, 그리고 원주민들에 의해 제물로 바쳐진 여인, ‘앤’을 보고는 그만 사랑에 빠져버린다.
바로 이 대목에서 관객은 둘로 나뉜다. ‘말도 못 알아먹는’ 동물이 어떻게 인간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교감할 수 있는지 아니, 애초부터 어떻게 사랑을 느낄 수조차 있는지 의문하는 이들과 ‘킹콩’의 사랑에 점점 동화되어가며 킹콩을 더 이상 괴물로 보지 않게 되는 이들로 나뉜다는 말이다. 나는 물론 후자였다. 킹콩의 맑은 눈이 클로즈업 될 때마다, 킹콩이 ‘앤’을 보며 행복하고도 안타까운 눈짓을 보낼 때마다 나는 마치 내가 ‘킹콩의 그녀’라도 된 듯 가슴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동물을 싫어한다. 지나가는 개 한 마리가 곁에 스치는 것조차 달가워하지 않을 정도로 잔정이 없다.
몇 주 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친정 엄마와 둘이서 차를 타고 아파트촌을 지나고 있었는데, 매서운 바람에 체감온도 15도라는 보도를 못 들어서인지 한 떼의 비둘기들이 과자 부스러기조차 없는 아스팔트 위에 모여 있었다. 내가 말하기를 “엄마, 쟤네들 좀 봐. 정말, 민폐 아니야? 아유, 난 징그러워서 못 봐주겠다” 했는데, 엄마는 혀를 끌끌 차시며 “쟤네들 추워서 어떻게 하니 ……” 하시는 것이었다. 도시인들에게는 생활의 장애만 주는 한낱 비둘기 떼인데, 울 엄마는 그네들도 생명이 붙어 있는 이상 불쌍하기가 헐벗은 인간 못지 않다고 나를 다그치셨다. 우리 엄마 참, 착하기도 하지 생각하고 말 일이었는데 그로부터 며칠 후 또 이런 일이 있었다.
저녁녘에 친정에 들러 아빠와 뉴스를 보게 되었다. 기상 이변으로 폭설이 내린 남도의 농가들에 대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사람 키만큼 눈이 쌓인 울타리 안에 소들이 갈 곳 몰라 하고 있었는데, 그걸 보시던 아빠는 “얘, 소들 춥겠다” 하시는 거였다. “어쩜 그리도 내외가 똑같소?” 하면서 비둘기를 가엽다 하던 엄마와 소를 안쓰럽게 쳐다보던 아빠를 생각하는 나. 나는 어떤가? 이렇게 자비가 많은 부부가 낳은 딸인데, 나는 참으로 마음의 자비가 부족하다. 당장 제 몸이 편하고 불편하고에 따라 남에 대한 배려의 가부가 결정된다. 내 배가 불러야, 그제야 남 배고픈 것이 보이고, 내 몸이 따뜻해야 남 떨고 있는 것이 보인다. 명색이 절 다니고, 요리하는 사람이라면서 기실 베푸는 마음이 이리도 부족한 나. “나를 좀 도와주시오” 하고 누군가 요청하기 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헤아림이 생겨야 할 텐데.
킹콩도 비둘기도 폭설 맞은 소도 불쌍해 하는 마음이 들진대 하물며 인간은 말해 무엇 하겠나. 다만 타인이 도움을 외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먼저 찾아가서 쌀죽이라도 한 그릇 대접할 수 있는 마음이 절실한 것 같다. 만사에 말(語)이 다가 아니니까.

쌀죽
쌀이 모자라서 ‘잡곡 섞어 먹기’ 운동을 펼치던 시대가 엊그제였는데, 이제는 쌀이 남아돌다 못해 남의 나라 쌀까지 사먹어 줘야 하는 실정이 되었다. 쌀이 흔해진 거다. 이렇게 흔해진 쌀조차 마음껏 먹지 못하는 이들이 아직 많다는 것도 우리의 현실. 훌훌하게 쌀을 끓여 물에 퍼지도록 하고 여기에 잘게 다진 일본식 매실 절임과 김 가루 그리고 참기름 한 두 방울로 맛을 내어 보자. 간장에 물엿을 섞고 풋고추를 넣어 조려두면 이럴 때 쓰기 좋은데, 매실의 신맛이 지배적인 쌀죽에 달콤 짭짤하게 조려두었던 고추를 어슷하고도 잘게 썰어 죽에 섞어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쌀 한 컵이면 죽의 농도에 따라 세 명에서 다섯 명까지도 나눠 먹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새해에는 ‘쌀 죽’ 보시를 하려 한다. 동시에 다음 생에 내가 헐벗은 비둘기나 소로 태어나더라도 마음 착한 누군가의 덕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영악하게도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