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을 가다보니 이미 천리가 저 멀리에 있고, 산을 오르다보면 만학천봉이 발 아래라. 그 천리길을 돌아보니 참으로 절경이 아닌 것이 없었고 산을 내려다보니 오르던 대목마다 순간이 정상頂上의 즐거움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길을 가는 그 순간 중생은 고단함과 망상에 그 몸과 마음을 다 빼앗겨 삼라만상이 펼친 정연한 설법은 염두에도 둘 수가 없다. 그러나 그 길이 참으로 스스로의 성품에 어긋나지 않은 것이라면 지나온 천리의 위대함과 그 길목마다의 즐거움이 있으니 훗날 또 어느 때가 되어 이것을 즐겨 느낄 것인가.
저 춘추 시대 유백아兪伯牙는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주던 친구 종자기種子期가 죽자 거문고줄을 끊었다(伯牙絶絃)고 하니 그 우의友誼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겠으나 그의 거문고는 그저 물 흐르듯 스스로를 즐겁게 하고 자족自足하는 연주는 아니었던 것이지 싶다.
주역周易 서른네 번째 괘 천산둔괘天山遯卦에 이르기를 군자君子는 세상을 피해서 살되 혹 누가 알아보지 못한다 해도 후회하지 않으니 이는 오직 성현만이 가능한 일이라(君子依乎 遯世 不見之而不悔 有聖者能之) 하였으니 유백아를 두고 성현을 거론할 것은 아니로되 그의 거문고 연주는 그저 오감五感에 머물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며 그 탓을 해보기도 한다.
이미 앞선 수많은 성문聲聞과 선사禪師들이 세상을 피해 있으면서도 누가 알아주기 원하지도 않았거니와 누가 보지 않아도 그저 한결같이 그 마음과 성품을 바르게 밝히는 것도 세속에 목적을 두지 않았기에 가능하며 또 아름다운 것이다. 그 깊은 삶과 마음을 같이 할 수는 없으나 세상에 몸 담고 살아가는 중생에게는 그 일부라도 물줄기를 댄다면 훨씬 사는 것이 이처럼 척박하지는 않으리라 싶다.
세상을 피해 사는 데에 도원桃園만한 곳이 있을까. 서진西晉시대의 도연명은 도화원기桃花源記를 통해 복숭아꽃이 냇가 양켠으로 늘어서서 꽃잎을 날리고 있는 무릉武陵 근처 작은 마을에 대해 노래한 이후로 복숭아꽃 동산은 세상일에 지친 이들이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곳으로 이해되어왔다.
세상이 고단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것일까. 아무 걱정 없었을 듯한 이천년 전 사람도 무릉을 찾았으며, 지금보다 삼강三綱과 오륜五倫을 더 따지던 육백년 전 조선에도 도원은 꿈에서도 그리워하던 곳이었으니 사람이 사는 일이란 것이 고금을 막론하고 팍팍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세종대왕의 아들이고 수양대군의 동생이던 안평대군(1418~1453)은 예술적 감수성과 작품으로 알려진 인물이며, 당시 소장파 학자와 예술가들의 후원자로도 이름 높았다. 특히 그의 글씨는 세상이 알아주는 명필이었는데 그의 서체로 임신壬申년 금속 활자가 만들어졌을 정도였다. 1453년 단종 즉위 시 벌어진 계유정난으로 김종서와 함께 사약을 받아 세상을 떠났으니 임신년 활자는 다시 용광로로 돌아가고 그의 서체도 그 해 함께 세상에서 잊혀졌다. 비해당匪懈堂(안평대군의 호) 서체로 활자가 주조된 지 불과 일년도 안 되어 일어난 일이니 세상일이 이처럼 덧없을 수도 있다. 그야말로 급류와 같은 세상을 살았기 때문일까. 어느 날 안평대군의 꿈에서 가보았다던 도원도 도연명이 다녀온 도화원과 그리 다르지 않아 당시 어지러운 세상의 피난처가 되었음직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도연명이 가보았던 도원에는 머리를 장식하지 않고 소박한 옷을 입고 있던 사람들이 그 때가 어느 때인지도 알지 못하고 태평스럽게 살고 있었으나 안평대군이 다녀온 그곳엔 사람과 가축이 모두 없으며 그저 무너진 흙담과 조각배만이 하릴없이 오가고 있었다. 안평의 도원은 그저 복숭아꽃이 만발한 동산에 그보다 붉은 노을이 사방에 벽처럼 치솟은 봉우리에 무심히 비추고 있었던 그런 곳이다. 그의 도원은 사람이 아닌 별유천지였으니 안평대군 그마저도 그곳에 머물지 못하고 곧 발길을 돌렸던 것이다.
안평의 도원을 세상에 보여준 것은 바로 안견安堅이란 걸출의 화가였다. 안견은 도화원의 화원으로 있으면서 당시 화단을 앞서가는 화가였으며 그의 기예에는 안평대군의 후원이 차지한 몫도 상당했었다. 안평대군은 자신의 꿈 이야기를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에게 이야기하여 서로 시를 나누었으며 안견에게는 그것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 그리하여 3일 만에 완성한 그림이 바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이다.
몽유도원도는 세상의 순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드러낸 듯 그 시점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 굽이를 돌아 도는 개울을 건너고 병풍처럼 둘러친 기암절벽을 돌아 오르니 종종한 어느 분지에 복숭아꽃이 만발한 그 도원이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에 꿈에 본 무너진 흙담도 담겨 있고 반쯤 닫히다 만 싸리문도 그대로이다. 우리가 그리던 무릉이 어디에 펼쳐 있는가, 그림을 보면서 아득한 마음에 눈을 감는다.
새해 아침, 지난해의 회한과 즐거움을 헌 달력에 딸려 보내고 새 달력 열두 장 펄럭이다보니 매해 걷고 있는 주변의 경치보다는 너무나 멀리 있는 도원을 그리며 지금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싶어 부끄러운 마음이 먼저 일어난다.
어느 날 한 스님이 백장 스님께 물었다.
“번뇌와 32상이 본래 없다는데, 어떻습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부처님 쪽의 일이다. 본래 번뇌가 있다거나 지금 32상이 있다는 것은 범부의 생각일 뿐이다.”
천년을 전하려던 도화원의 그 모습은 중생의 번뇌와 삼십이상이 만들어낸 허상虛像인가. 부처님 쪽의 일은 그렇다 두고 그 부처의 자리를 누가 뺏어간 것인가. 뺏어간 사람과 빼앗긴 사람이 있다면 한겨울 수북한 눈 속에 당장 묻어버리리라. 가가呵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