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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사람도 숭배할 수 있는 자질을 가졌는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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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박원자 2005년 07월 281호
도혜 / 봉녕사 승가대학 학감


노스님께 멱살을 잡히다
행자가 감히 공부하는 시간에 책상에 얼굴을 대고 잠을 잔다는 것은 당시 석남사 규칙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중노릇하는 사람이 그렇게 태만하게 새벽잠을 자다니…’ 하는 불호령과 함께 당장 그 자리에서 인홍 노스님께 멱살을 잡히곤 맨발로 섭진교까지 쫓겨났다.
그 일로 일주일간을 노스님께는 물론 대중어른들에게 참회를 드리면서 대중공사를 거쳤는데, 그 자리에서 그간 나의 잘못 모두가 열거되었다. 빈틈없이 잘 산다고 노력했지만 대중생활을 하다보면 거친 부분도 더러 있게 마련인 법, 예를 들어 걸음걸이가 좀 급했다던가 혹은 공양시간에 소리내어 먹었다던가 하는 것 말이다.
아무튼 그 일주일간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참회가 받아들여질 때까지는 죄인이었으므로 떳떳하게 공양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해서 사형사제가 주먹밥을 가져다주었는데, 그 몰래 먹는 밥이 제대로 소화가 될 리 있었겠는가. 대중들 발끝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진심으로 참회한 다음 겨우 용서를 받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니, 당시는 그렇듯 법도가 엄했고, 어른이 잘못했다고 하면 변명이란 생각할 수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 뒤 채공을 살 때 한 번 더 노스님께 혼줄이 났다. 1960년대 중반 석남사는 불사가 한창이어서 대목 50명을 비롯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1백여 명이나 되었다. 삼시 세끼와 참까지 절에서 해내었으니 공양간은 언제나 눈코 뜰 새 없었다. 채공인 나와 또 한 사람의 채공, 그리고 공양주 셋이서 한 철을 착실하게 살고 나니, 원주스님께서 우리 셋의 노고를 치하하며 석남사 위 계곡인 옥류동으로 데리고 갔다. 점심을 싸가지고 잠시 소풍을 간 셈이다.
명함판 사진조차 찍기 어려웠던 시절, 사진사를 데려다 사진도 찍는 호사를 한 데다, 어린 나이에 일만 하다가 모처럼 나와서 바람을 쐬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원주스님께서 내린 한나절 보너스(?)를 잘 받고 나서 그 일을 잊고 있었는데, 일이 터진 것은 그로부터 20여일 후였다. 어떻게 노스님께서 알아버리신 것이다.
당장 불호령이 떨어진 것은 불문가지, ‘스님네가 어디 감히 세속사람들처럼 점심을 해가지고 가서 놀았으며, 더군다나 남자사진사를 불러다가 어린애들 사진을 찍어주었느냐’ 하는 나무람과 함께 우리 셋은 물론 원주스님까지 쫓겨나게 된 것이다. 그래도 이번엔 원주스님 덕분에 사흘 만의 참회로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 8년 동안 원주 소임을 본 공을 감안해서 오래 고생하지 않고 짧게 끝이 난 것이다. 노스님께 추억이 깃든 모든 사진을 압수당하고, 지금 딱 한 장 남아 있는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아마도 노스님께서 그리 어떠한 빈틈이나 방일함을 한 치도 용납치 않으셨으므로 오늘날의 석남사가 존재하는 것이리라. 돌이켜보면 그립고 아름다운 시간들이다.

모든 생명의 윤활유 자비, 그것을 실천하신 나의 은사 인홍 노스님이 엄부 같은 스타일이셨다면 노스님의 맏상좌였던 나의 은사스님은 자모와 같은 스타일이었다. 해서, 노스님께 야단맞고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을 때 뒤에서 다독여 바로 세워주신 분은 나의 은사스님인 묘경 스님이셨다. 스님은 당신의 상좌뿐만 아니라 석남사 대중 모두를 따뜻함으로 아울렀던 자비보살의 화현이셨던 분이다.
선원 입승을 보시면서 대중의 가장 모범이셨던 나의 은사스님은 대중의 허물도 자신이 감싸안으며, 습기가 있어야 씨앗에서 싹이 트듯 자비가 모든 생명의 윤활유가 됨을 몸으로 실천하셨다. 아무리 나이 어린 상좌도 남 앞에서 야단을 치지 않고 꼭 따로 불러 야단을 치실 만큼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했다.
나는 어려서 집을 떠나왔으므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허나, 세속의 어머니들이 자식에게 주는 사랑보다 더한 사랑을 주셨던 은사스님에 대한 기억은 무수히 많다. 내가 지금 반듯한 수행자로 부끄럽지 않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은사스님이 내게 주셨던 사랑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은사스님을 떠올리면 눈시울이 뜨겁다.
10년 동안의 행자생활을 마치고 운문사 강원에 가서 공부하면서도 나는 은사스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방법은 ‘아무개가 공부 잘한다’ 하는 소리를 들려드리는 거라고 생각하고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한밤중에도 잠이 오면 밖으로 나가 머리에 찬물을 끼얹고 들어와 경을 읽었고, 결국 졸업할 때 종정상 등 몇 개의 상을 받으며 강원을 마쳤으니, 은사스님의 끝없는 사랑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은사스님에 대한 은혜는 머리털을 뽑아서 신을 삶아 보답한다 해도 부족할 것이다. 강원을 졸업하고 잠깐 석남사에 가 있던 겨울이었다. 나는 그때 소화도 잘 안 되고 몸이 상당히 쇠약해 있었다. 한 달에 두 번 대중들이 삭발 목욕하는 어느 날이었다. 스님께서 ‘목욕하고 방에 가봐라’ 하시기에, 목욕을 끝내고 스님 방에 가보니, 콩나물과 김치를 넣고 끓인 갱죽을 이불 밑에 묻어놓으셨다. 목욕하고 나오면 허기진다고 당신 상좌가 좋아하는 죽을 손수 끓여서 따뜻한 아랫목에 묻어놓으신 거였다. 그날, 나는 목이 메어 간신히 갱죽을 먹었다.
강원을 졸업하고 나는 공부를 좀더 하고 싶었다. 강원 화엄반에 있으면서 중강을 하면서 학인들을 가르쳤는데, 그들과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을 종종 느끼곤 했다.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아홉 살에 출가를 했으니, 간단한 영어단어만 섞여도 소통이 안 되는 것이었다. 어디 가서도 말이 통하는 사람이 되려면 최소한 고등학교만이라도 졸업을 해야겠다 싶어서, 노스님께 말씀드리니 허락을 하시지 않았다. 당시 노스님 문하에서 절 밖으로 나가 일반인과 섞여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손주상좌의 간절한 청에 노스님은 ‘백련암 큰스님께 가서 허락을 받으면 보내주겠다’고 하셨다. 성철 큰스님을 뵙고 허락을 얻으러 해인사로 떠나던 날, 은사스님이 버스정류장까지 나오셔서는 차에 오르는 내게 수건으로 싼 병을 하나 건네주시는 것 아닌가.
“가다가 차 안에서 먹어라.”
대구에서 해인사로 들어가는 차를 타고 가다가 끌러보니 속이 온전치 않은 나를 위해 미음을 끓여서 병에 넣은 것이었다. 식을까봐 겹겹으로 수건을 둘러쌌기 때문에 병에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혹여라도 백련암까지 올라가는데 지칠까 염려해서 상좌의 손에 쥐어준 미음을 먹으면서 나는 울었다.
물론 백련암 큰스님은 허락을 하지 않으셨고 나는 노스님의 반대 속에 공부를 강행하느라 무척 고생을 했다. 더불어 평생을 선객으로 사신 가난한 나의 은사스님도 그런 나를 바라보느라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다. 은사스님은 내가 대학도 들어가기 전 세상을 떠나셨다. 스님께 받은 은혜를 백 분의 일도 갚질 못했는데, 물 한 모금도 따뜻하게 데워드리지 못했는데, 그렇게 서둘러 가셨다. 그래서 나는 은사스님만 생각하면 언제나 마음이 아려온다.
내가 강원을 나와 세파에 시달리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수행자 정신이 그대로 유지된 것은, 석남사의 엄한 규율과 성철 큰스님의 서릿발 같은 수행풍조를 그대로 실현하셨던 인홍 노스님의 사상, 그리고 은사스님의 따뜻한 사랑 덕분이었다.
행자시절을 추억하자니, ‘생각은 복이다’란 말씀을 자주 하셨던 노스님이 다시 떠오른다. 생각을 늘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쪽으로 해야 복이 된다는 가르침은, 살아보니 참으로 맞는 말씀이셨다. 스스로 밝은 생각으로 복을 짓는 것이요,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삶이 달라지기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