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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서 졸며 바다를 건너다(坐睡渡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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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이야기 그림 이야기 - 김현정 2005년 07월 281호

방 안에 앉아 하릴없이 새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내 마음은 이미 방 안에 있지 아니하다. ‘조조롱~’ 그 한 소리에 나는 이미 푸른 숲 잔잔히 오가는 바람 속에서 노래의 주인공을 찾고 있으니 내가 어디에 있다 함이 옳은 것인가. 몸이 방에 있으니 그 몸 안에 있다 할 것인가, 푸른 숲을 헤매고 있으니 벌써 그 산중에 있다고 함이 옳을 것인가.

김홍도가 그린 <앉아 졸면서 바다를 건너다:좌수도해坐睡渡海>의 그림에는 오가는 파도와 바다 위에서 졸고 있는 앳된 모습의 수좌首座가 꽤나 우습다. 콧등과 양손을 무릎에 의지하고 편안히 눈을 감은 수좌의 얼굴은 옹색한 자세와는 영 딴판이다. 수심이나 근심, 도道에 대한 서원도 잊은 편안한 얼굴이다. 안심安心을 달리 어디서 찾을까.
이렇게 졸고 있는 수좌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갯가에서 금세 뜯어옴직한 갈댓잎 서너개일 뿐이니 파도가 오가는 창해滄海 한가운데 갈댓잎을 타고 앉아 태연히 졸고 있는 주인공은 바다에 있다 할 것인가, 혹은 바다를 잊었다 함이 옳을 것인가. 혹 나른한 여름 오후 산중에 앉아 창해의 꿈을 꾸는 것일까. 주인공은 이미 바다의 노도怒濤를 잊었으나 그림을 대하는 나의 마음은 위태로운 바다 한가운데 서서 그의 단잠을 맛본다.
김홍도는 만년에 불가와 관련된 그림을 남기고 있다. 앞서서 이미 언급했던 용주사의 영산회상靈山會上 불화는 물론이려니와 이외에도 선미禪味 가득한 선화들이 몇 점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그 소재를 바다에 의지하고 있다. 좌우로 오고가는 파도, 혹은 바닷가의 관음보살과 창해를 바라보는 고승의 뒷모습과 같이 그의 마음은 늘 바다에 머물렀던 것 같다.
<좌수도해도坐睡渡海圖>에서 수좌가 입은 승복 자락은 파도를 닮아 구불구불하다. 그의 다른 선화에서 묘사된 천의天衣나 가사袈裟 자락도 그렇게 구불구불하다. 강하지 않은 먹선으로 물결과 같이 혹은 파도와 같이 그려내었다. 마음은 늘 그렇게 오고가는 파도와 같은 것이고, 바람에 나부끼는 옷자락 같은 것이기 때문인가. 중생의 마음은 그러할지나 선의 길목에 있는 이의 마음 또한 그러할까. 또, 동서남북을 가늠할 수도 없는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단원 그림 속 선객들의 시선은 모두 감추어져 있다. 눈을 감고 있거나 혹은 모두 뒷모습을 보이고 있어, 그들의 시선을 가늠할 길이 없다. 그 눈빛을 알아보는 이가 드물기 때문이리라.

선禪은 의문을 그 문門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부처와 조사의 모든 행이 선의 길목에서는 모두 의문이 되고 문고리가 된다. 간화看話라는 것이 바로 화두를 생각한다는 것이니, 이천 오백개 법의 산맥을 넘어오면서 부처와 조사께서 던져놓은 화두는 봉우리로 화현하여 금강金剛을 이루었다. 때로는 기암절벽으로, 때로는 아름다운 꽃동산으로 그 울울창창 봉우리가 이어져 내려왔으니, 그곳을 가보지 않고 어찌 그 진면목을 평하랴.

위산山 스님이 어느 날 밤 늦게 백장(百丈 懷海:720~814) 스님을 뵈러 왔는데 스님께서 그를 보자마자 말했다.
“화로에 불을 좀 지펴다오.”
“불씨가 없습니다. ”
“아까 불씨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리고 벌떡 일어나 화롯가로 가서 손수 재를 헤쳐 불씨 한 덩이를 집어들고는 말했다.
“이게 불이 아니고 무엇인가?”
위산 스님은 당장에 깨달았다.

그 후 어느 날 스님께서 위산 스님과 일을 하다가 물었다.
“불이 있는가.”
“있습니다.”
“어디에 있는가?”
위산 스님이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두어 번 분 뒤에 스님께 바치니 스님께서 말했다.
“벌레 먹은 나무 같구나.”

불씨는 원래 화로 속에 있는 것이니 그것을 못 보고, 보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중생의 생활도 이와 같아 화로 속의 불씨를 보지 못하고 이미 꺼졌다고만 한다면 화로에 활활 타오르는 불꽃은 백년이 가도 난망難望이 아닌가. 그러므로 그 불씨를 찾아 집안을 밝히고 덥히는 이는 성현이요, 불씨를 찾아 밖으로 나돌며 추운 겨울 깊은 골짜기 두어 길 얼음장으로 찾아 나서는 이는 중생이다. 바다에서 산을 그리워하고, 산중에 앉아 파도를 찾는다.
밝히는 일은 밖을 밝히는 것과 안을 밝히는 일의 두 갈래이다.
전자는 본능本能과 오감五感을 밝혀 갈고 닦음이요, 후자는 본성本性을 밝혀 닦음이니 그 결과는 범인凡人과 부처의 양 갈래 길이다. 누구에게나 마음 속의 불씨는 가지고 있건만 잿더미 안에 있어 그 온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니, 오감을 밝히는 것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너무나 잘 알게 되는 밝음이요, 본성은 살아가면서 어두워지는 빛이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무명無明을 밝히지 못함에 연緣하여 행行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 행은 술 취한 코끼리이며, 때를 모르는 개나리꽃이다.
파도가 일렁이면 두 눈을 다 감을 일이요마는 오늘도 일렁이는 파도 한가운데 서서 한쪽 눈만 뜨고, 한쪽으로만 간다. 그것이 중생의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