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내가 예뻐하던 조카 방에서 “무상무념”이라는 문구가 나의 시선을 끌었다. 그 문구를 보면서 말하기는 쉽지만 실행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이런 나의 생각도 단순한 표현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임을 곧 깨달았다. ‘쉽다’고도 생각지 말고 ‘어렵다’고도 생각지 말라는 말을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듣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사물에 대한 판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러한 현상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수행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을 한다.일단 나는 큰 법당 안으로 들어가 방석을 들고 자리에 앉으면서도 여전히 그 법고를 두드리시던 스님 생각에 흠뻑 취해 있었다. 예불의식은 그다지 길지는 않았지만 우리들 중 몇 명만이 남아 있었다. 한 스님은 아직 염불 중이셨고 나는 한가로이 머릿속에 스쳐가는 그 상념들을 떠올리면서 스님의 음률에 내 몸을 맡기며 앉아 있었다. 나는 앉는 것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내가 게으른 탓이기도 하지만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난 즉시 108배를 올렸다. 내가 원해서였다. 왜냐하면 난 ‘앉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졸음과 싸우려는 나만의 은밀한 의도가 있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어쨌든 앉아 있다는 것은 다소 규율이 엄격한 느낌이 드는 반면 절을 올린다는 것은 역동적인 느낌이 든다. 그리고 ‘단순히 절을 올린다는 것’은 ‘단순히 앉아 있다는 것’보다는 나에게 더 친밀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왜 사람들은 간혹 어렵고 힘들다고 느껴지는 것에 대해 더 큰 매력을 느끼는지 모르겠다.
큰 법당 밖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눈에 띌 만큼 천천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뒤에 있는 가야산이 드러나면서 몇 분 상간으로 동쪽으로는 어두운 곳에서 조금 더 밝은 그림자 빛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금 밖의 공기가 그다지 차지 않다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이제 아침은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 또 다른 하나의 것을 놓아야만 한다. 큰 법당에서의 예불은 여전히 계속되고 그것은 마치 모차르트의 아다지오와 같은 대단한 것이었다. 내일이 되면 난 내가 여기에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내가 해인사의 당우들을 오가면서 남몰래 즐겼던 발밑의 흙 소리도 이젠 들을 수 없을 것이고 그 새가 진짜인지 아닌지 분간하기도 어려울 만큼 시계 소리 흉내를 잘 내는 뻐꾸기도 이젠 더 이상 볼 수 없다. 그리고 그 특별한 아침을 함께 했던 멋있는 스님들도 이젠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난 서둘러 마음에 새겨둘 만한 문구를 하나 만들어 봤다. “해인사에서 보낸 아침은 너무나도 생동감이 넘쳐 마음에 내재되어 있던 무언가를 버릴 수 있도록 분별력을 갖게 해준다. 어떤 것을 버림으로써 모든 것을 얻는다는 말을 우린 흔히 듣는다. 그리고 난 그것에서 진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해인사를 떠나서의 나의 일상은 여느 때와 같이 평범하다. 나에게는 - 그다지 불쾌한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 해야 할 과제와 원고 마감시간들 그리고 부양해야 할 가족들이 있다. 이러한 모든 상념들 속에 갇혀 있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제는 더 어렵게만 느껴진다. 너무나도 흥미롭지 않은가. 게다가 해인사에서 그 친절한 스님께서 거품을 내 만들어주신 그 맛난 차는 단순히 ‘스님이 만들어주신 맛있는 차’였다. 너무 웃기는 것은 내가 그 차와 똑같은 맛을 내려고 여러 번 시도해 만들어 보았지만 내 차 맛은 그때 스님께서 만들어주신 그 차 맛이 나질 않는다. 사실 묘하게도 그 스님께서 다른 상황에서 한번 지적하셨던 것처럼 “맛이 다릅니다”라는 말씀을 이제는 알 것 같다. 그래 그 맛은 결코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 또한 괜찮을 듯싶다.
차 마신 후에는 아내랑 같이 드라이브를 가야할 시간이다.□
※이 글을 나에게 생애 처음으로 불교계의 스승이신 돌아가신 부모님들께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