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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불교는 세간에 어떤 모습으로 비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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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리포트 - 편집실 2004년 07월 269호
불교는 출세간을 지향한다. 출가는 출세간을 상징하는 일대 사건이다. 석가모니 부처님 이래 출가를 결행함으로써 진리의 빛은 2004년의 오늘에도 세상의 빛이 되고 있다. 그러나 출세간을 지향하되 세간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때의 세간은 정토가 되어야 할 세상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세간은 출세간을 있게 하는 출발점이며, 불교는 세간을 진리로써 성화聖化시키는 연기의 관계로 맺어져 있다. “마치 부처님께서 중생을 위해 중생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교화하시듯 이웃과 더불어 슬픔을 나누고 기쁨을 더하고 자비를 베푸는 관계”(불교상식백과, 불교시대사, 639쪽)이다.
그런데 요즘, 아니 오래 전부터 세간과 출세간의 관계가 전혀 조화롭지 못하다. 세간을 말하고 있으나, 세간에서 살면서 희로애락을 겪는 중생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세간 또한 불교를 진리를 추구하고 실현하는 거룩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다. 심하게는 보수집단, 기득권계층, 개혁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눈도 있다. 몇몇 계간지들이 몇 해 전부터 ‘종교’를 특집으로 다루는 데서 이런 현상이 뚜렷함을 보여준다. 최근의 것으로는 <아웃사이더>에서 ‘한국개신교 다시 보기’를 특집으로 꾸몄는데, 그 이유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한국의 개신교를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기득권 구조 하나를 건드린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것은 개신교인 개개인에 대한 문제제기와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개신교에만 적용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단지 개신교가 한국의 근대, 한국의 정치권력, 한국 사회와 문화 등에 가장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해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적이 단순한 종교적 논쟁으로 비화되기보다는 우리 사회를 성찰하는 한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김동춘, 아웃사이더 12호(2004. 4), 13쪽)
인용문 중에서 개신교를 불교 또는 종교로 바꾸어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지레 놀란 듯 불교로 읽히기도 한다.(과잉된 자의식의 표출일까.)
그럼 불교의 어떤 모습이 불교와 세상을 멀어지게 하는 것일까. 불교에 대한 세상의 몰이해와 오해도 원인의 하나일 것이지만, 우리 불교 내부를 살펴보는 일이 먼저이다.
먼저, 부처님오신날 직후인 5월 말 언론에 주요 뉴스로 다뤄진 사건. 공적자금을 받은 회사의 회장이 회삿돈을 빼돌려 검찰에 덜미가 잡혔는데, 시주의 방법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심각한 것은 이런 일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데 있다. 10여 년 전 당시 조계종 전국신도회장이었던 건설회사 사장 조 모 씨가 관급공사 수주대금의 일부를 불법 정치자금으로 제공했는데, 그 방법으로 사찰의 시주금을 이용했다. 즉, 조씨는 사찰에 거액의 시주를 했고, 사찰은 이 돈을 정치인에게 건넸다. 이런 방법을 이용하는 것은, 사찰은 세무조사 등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검찰수사도 사찰의 일주문을 넘어서지 않는다. 종교 및 종교인에 대한 예의 내지는 사회적 성역을 둠으로써 사회의 안정과 통합에 기여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사찰을 통한 불법 정치자금 제공이나 불법자금의 세탁은 이 같은 점을 악용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악용은 사찰의 협조 없이는 이뤄지지 않는다. 결국 사찰이 부패사슬의 한 고리가 된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 세간의 반응은 어떠한가. 욕을 퍼붓고 냉소를 보낼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무반응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듣게 되는 부패사건의 하나로 받아들였다. 이는 이미 불교의 청정성과 도덕성이 높지 않다는 의미이다. 깊은 불신의 표시이다. 기대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냉엄한 선언, 그 이상이다.
사회의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무관심의 정도도 심각한 상황이다. 우리 사회는 소위 20:80의 사회가 된 지 오래이다. 20%의 사람들이 사회적 부의 80%를 소유하는 구조적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300만 명의 신용불량자와 청년실업 8%의 사회, 한 가족이 가난 때문에 목숨을 끊는 일이 그치지 않는 참으로 가혹하고 혹독한 현실이다. 무한경쟁의 자본주의 사회가 낳은 사회적 결과이다. 세계시장에서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부의 집중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논리가 현 사회경제체제를 뒷받침한다. 기업의 존재 이유의 첫 번째가 이윤극대화이니만큼, 인건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생산설비와 서비스를 과학화해 자동기계로 대체하는 것도 비윤리적이라고 비판할 수도 없다. 부의 집중과 이윤극대화가 기업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윤리가 된 무한경쟁의 논리가 관철되는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가혹한 사회 현실에 정부의 역할이 있다. 조세징수를 통한 사회복지 프로그램의 실행이 그것인데, 정부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재정의 부족으로 사회복지 혜택이 충분하지 않거나, 이마저도 소외되는 계층이 나타난다. 또 정서적 박탈감의 치유에 있어서는 정부의 한계가 뚜렷하다. 정부와 기업의 영역 밖에 있는 시민사회 영역과 종교 영역이 담당해야 한다. 지난 10여 년 동안 시민사회 영역은 상당한 발전을 이뤘지만, 종교 영역의 발전은 아직도 더디기만 하다. 오히려 기득권층이 되어버렸다. 일찍이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면서 그들에게 다가갔던 종교인들을 이념의 색깔을 뒤집어씌워 매도하기도 했던 게 현실이었다.
종교와 불교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의지처가 되어야 한다. 종교인은 그들의 후원자가 되어야 한다. 물론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불교인이 적지 않다. 문제는,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만의 역할에 머문다는 것이다. 불교로써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몇 사람의 몫으로서 남겨두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불교는 사회의 맨 뒤에 서서 뒤처진 부분들을 추스르는 한편 사회를 선도하는 책임도 주어져 있다. 사회의 방향을 올바르게 잡아주는 것이 그것이다. 모든 부분이 권력에 예속되지 않고 고유한 성격을 살려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온갖 권력을 비판하고 권력에 맞서는 일이 벌어진다.
개발논리는 언제나 선한 것이었다. 지난 30여 년 동안 그랬으며, 지금도 그 관성은 맹렬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개발은 권력의 자기확장 수단의 하나이다. 특히 우리 나라의 각종 개발사업은 정치권력 유지의 주요한 수단으로 작동한다.
개발은 언제나 선하지 않다고 외치고, 개발로 인해 사라지는 것들의 가치에 눈을 뜨라고 호소하는 것, 물질주의와 거대주의로 인해 피폐된 삶을 소박함으로 풍요로운 삶으로 되돌리는 것이 불교의 운동이다.
우리 불교는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는가. 연기를 가르치는 불교가 철저하게 비연기적 행태를 보임으로써 세간과 단절되어 출세간의 호화로움에 지독하게 중독되어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세간에 힘겨워하는 중생들의 소리없는 읍소는 지금 일주문을 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