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성 보살님은 내가 수행자의 길을 놓아 버리지 않고 여기까지 오게 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분이다. 자비를 행하는 위대한 마음은 유·무식에 있는 것이 아닌, 수행에서 나온다는 것, 그래서 그 수행이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 준 그분을 내가 만난 것은 힘들게 행자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착하고 모범적이던 누나가 출가를 해서 잠깐 집에 다니러 왔을 때, 삭발한 누나의 모습을 보고 울었던 내가 ‘언젠가는 누나 곁에 살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아마도 그러한 생각이 출가로 이어졌던 것은 아닐까? 불연이 깊었는지,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불교학생회를 조직해 활동을 활발하게 하면서, 《금강경》·《초발심》·《천수경》을 배우면서 출가에의 기초를 다졌다. 중학교 1학년 때, 수계를 받으면서 ‘스님이 된다’는 생각을 늘 가졌으므로 고기를 일절 먹지 않았다. 언젠가는 고기기름으로 튀긴 도너츠를 먹고는 백일기도 회향날에 밤새도록 울면서 참회기도를 했으니, 3학년에 올라가자 미련없이 교복을 벗어던지고 절로 들어온 것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어렵사리 어머니의 승낙 도장을 받아 윗옷 양쪽 주머니에 공처럼 둥글게 만 양말 한 켤레씩을 넣은 채 집을 나섰다. 그렇게 양말 두 켤레만을 가지고 집을 나서 이순의 나이를 넘겼으니 출가의 세월이 어언 쉰 해에 가깝다.
중학시절에 가르침을 주었던 혜철 스님에게 갔다가 고향인 제주도 시내에 있는 한 포교당에서 채공을 하며 행자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같이 살던 나보다 두세 살 위인 공양주 행자가 심심하면 꿀밤을 먹이고 도망가고, 미처 찬이 준비도 되기 전 공양시간을 알리는 목탁을 쳐버리고 하는 등 어찌나 애를 먹이는지 어린 마음에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수시로 일어나곤 했다.
하루는 같이 국수를 먹다가 또 심정을 상하게 해서 울면서 그에게 국수를 뿌려 버린 적도 있다. 좌우지간 그와 맞지 않아 고통을 당하고 있던 어느 날, ‘중노릇을 때려치우더라도 저놈을 한번 손보고 말리라’ 다짐을 했고, 그를 골탕먹일 궁리를 사흘 동안 한 끝에, 엉성한 판대기로 만든 문 위쪽에 옹이진 장작을 올려 놓았다. 문만 열면 장작이 떨어질 터였다. 부엌으로 들어가는 문에 하나, 부엌에서 찬간으로 올라가는 문에 하나, 찬간에서 법당으로 들어가는 문에 하나, 이렇게 무려 세 개의 문에 장작을 끼워 놓고 나무 위에 올라가 공양주가 문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기다리는 공양주 행자는 나타나지 않고 노보살님인 관음성 보살님이 나타나 부엌문을 여는 것이 아닌가. 문을 살짝 건드리자 큰 장작이 떨어졌고, 곧 ‘아이고’ 하면서 노보살님이 쓰러졌는데, 손가락 사이로 피가 새어나오는 게 아닌가. 그런데 웬일인지 노보살님이 일어나 다시 찬간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는데, 등허리에 장작이 살짝 내리쳤다. 부엌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보니 벌써 피가 많이 흘러 있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사죄를 하니 노보살님은 ‘나무아미타불’만을 부르면서 손수건으로 피를 닦아내고 계속 솟아나오는 피를 누르면서 하는 말씀이, ‘행자님, 절대 이런 장난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마세요. 오늘 이 일은 우리 둘만 아는 겁니다. 빨리 바닥의 피를 닦아 버리세요. 저는 집에 가면 됩니다’ 하면서 욕 한 마디는커녕 눈 한 번 흘기지 않고 집으로 가는 것이었다.
하루도 거름 없이 조석예불을 드리러 오던 노보살님은 그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니 내 가슴이 얼마나 탔겠는가. 그런데 한 스무 날쯤 지나서 노보살님이 나타났다. 반가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에 내가, ‘보살님 치료비 많이 드셨지요? 제가 저희 어머니에게 말씀드려 부담을 좀 하겠습니다’라고 했더니, 그 보살님이 ‘저는 다 나았으니까 괜찮아요. 잊어버리세요’ 했다. 그래도 내가 부담이 되어서 안 된다고 치료비를 드리겠다고 우겼더니, 노보살님이 이렇게 말했다.
“정말 주시겠어요? 그럼 제가 치료비를 말할 테니 잘 들으세요. 행자님, 행자생활 하는 게 힘들죠? 그러나 아무리 어렵고 괴로워도 그만두면 안 됩니다. 아무리 괴로워도 포기하지 말고 앞으로 큰스님이 되어 전국 방방곡곡 돌아다니시면서 부처님 법음을 전하면서 존경받고 인정받는 좋은 스님 되세요. 이것이 행자님이 제게 주어야할 치료비입니다.”
나는 그때 부처님 법이 정말 위대한 것을 알았다. 한 촌로에 불과한 할머니에게서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살아 있는 소리가 나오는 것을 보며 그리 생각지 않을 수 없었고, 어떤 고난이 와도 결코 그만두지 않으리라 새로이 발심했다. 그후 출가의 길에서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나는 노보살님과의 약속을 상기하곤 했고, 노보살님의 당부처럼 지금 국내외를 막론하고 제방을 누비고 다니며 부처님 법을 전하고 있으니, 내게 그분은 분명 선지식이었다. 그때 만약 공양주 행자가 다쳤더라면 나는 아마 세속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때 노보살님은 예순을 넘긴 나이였는데 구십이 넘어 돌아가시는 날까지 낮에 방바닥에 등을 대는 적이 없었다. 앉아서 졸지언정 결코 누운 적이 없을 만큼 수행을 잘 하셨던 그분은 내게 출가의 길에서 만난 인로왕보살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나는 이 세상에 나와서 잘 한 것이 별로 없는데, 달랑 양말 두 켤레 들고 나와 이리 행복한 수행자로 살아가는 걸 보면 전생에 공덕을 좀 지어 놓은 것 같다. 서른 살 때의 일이다. 군대에 가 있을 때, 하루 5천배씩 20일 동안 10만배 기도를 하면서, ‘나이 서른이 되면 그간 알고 모르고 지은 죄, 몸과 마음으로 지은 죄를 한 번 완전히 청산하리라. 죄업청산과 부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리라’는 발원을 했었다. 그리고는 나이 서른이 되자, 백련암의 성철 스님을 찾아 뵙고 ‘100만배 기도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했더니, 이렇게 내게 힘을 실어 주는 말씀을 했다.
“절? 좋지. 그런데 하다가 중간에 그만둘 바에는 시작하지 말고 끝장낼 작정이면 한번 해봐라.”
‘하겠습니다’ 하는 내 결심을 듣고, 스님은 이렇게 큰스님다운 말씀을 했다. .
“명심해라. 지금까지 절하다 죽은 놈 없고 절하다 죽더라도 지옥은 안 간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한 번 시작했으면 멋지게 회향해야 한다.”
그러나 해인사 장경각에서 시작한 죄업청산의 길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중간중간 코피를 제일 많이 쏟았다. 그럴 때면 장경각에 들어가 하늘로 고개를 쳐들어 코피를 삼키고 말리고 나서 다시 절을 했다. 무릎에 고름이 들었으나 무시하고 절을 하다 보니 나중에 저절로 없어져 버렸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절을 시작한 지 한 달 정도 되었을 때였다. 방석 밑에 송곳이나 못이 들어 있어 찌르는 것처럼 무릎이 아팠다. 그런 과정이 너무 괴로웠는데 어느 눈 깜짝할 한 순간, 아픈 것이 더는 올라갈 것이 없을 만큼 고통의 절정을 느꼈다. 나는 그때 고통이 두 손을 들고 항복하는 걸 봤다. 그렇게 확실히 고통의 절정을 느낀 후부터는 전연 고통스럽지 않았다. 절을 하는 거나 안 하는 거나 똑같았다.
중간에 물론 그만두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절하다 죽은 놈 없고 절하다 죽어도 지옥은 안 간다’는 성철 스님의 한 말씀 때문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누군가에게 ‘그놈 해낸다’ 하셨다고 한다. 그 말씀이, 그 믿음이 큰스님께서 내게 내린 법력이었고 2백일 만에 100만배를 무사히 마치고 수행자로 거듭나게 하는 힘이 되었다.
출가의 길에서 내 자성불을 찾고 생각하고 또한 항상 그리워하고 있는 나는 누가 뭐래도 늘 당당하다. 돌아보면 순수하기만 했던 나의 행자시절은 이리 떳떳하고 당당한 나의 출가수행자의 길을 훤히 열어 준 고마운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