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비가 오니 산이 어두워(雨來山暗)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선 이야기 그림 이야기 - 김현정 2004년 07월 269호
우리가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크게 보면 하나이나, 그 안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은 한순간에도 십이만 구천 육백 갈래이다.
여름날 산골마다 피어나고 사라지는 구름과 안개 같은 그것을 어디에 두고 내 것이라 할 것이며, 무엇을 보아 하나라 할 것인가.
사람의 마음이 동動하기를 첫 번째가 있고 또한 두 번째의 것이 있나니 그 첫 번째 마음은 내가 이 세상에 처음 올 때의 그 다짐으로 공명하고 정대한 바른 그 마음이다. 고로 누구라도 도道를 동경하고 그리는 마음으로 첫째를 삼고자 할 것이지만 그 첫 번째 마음은 가기 어려운 길이라 놓치기 쉬워 위태롭고, 찾기 어려워 지극히 미약하다 하는 것이다.
두 번째 마음은 첫 번째 마음과 타협하고자 하는 것이라 이를 두고 악심惡心이라 한다. 버금(亞)된 마음(心)이요, 두 번째 일어나는 마음 이것 역시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공명하고 바른 길이 어렵고 험한 것은 자명한 이치이니 이를 잠시 피하고자 타협하고, 세상살이를 방편삼아 살아가는데 있어 오감五感에 이끌릴 때 이 두 번째 마음이 일어난다.
첫 번째 마음도 내 것이요, 두 번째 마음도 내 것이니 선인善人, 악인惡人의 구분도 허망하다. 성현聖賢은 그 수만 갈래 중 가장 첫 번째 마음을 취하고, 범부는 두 번째 마음과 타협하기 다반사이니 성현과 범부의 마음은 그 선택과 수행에 달려 있을 뿐이다. 그러니 뉘라서 그 첫 번째 뜻을 가슴 한가운데 품고서 득도치 못할 사람이 있으리오.

강서江西 도일道一(709~788) 스님이 형악의 전법원에 머무르며 선정을 닦을 때의 일이다.
회양懷讓 스님이 그 근기 됨을 알아보고 물으셨다.
“스님은 좌선하여 무얼 하려오?”
“부처가 되려 합니다.”
그 말을 듣고 회양 스님은 암자 앞에서 벽돌 하나를 집어다 갈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도일 스님이 의아해 다시 물었다.
“벽돌을 갈아서 무엇을 하시렵니까?”
“거울을 만들려 하네.”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겠습니까?” 하고 다시 되물으니,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지 못한다면 좌선을 한들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소수레에 멍에를 채워 수레가 가지 않으면 수레를 쳐야 옳겠는가, 소를 때려야 옳겠는가?”
스님이 대꾸가 없자 회양 스님이 다시 말씀하셨다.
“그대는 앉아서 참선하는 것을 배우느냐, 앉은 부처를 배우느냐. 좌선을 배운다고 하면 선禪은 앉거나 눕는 데 있지 않으며, 앉은 부처를 배운다고 하면 부처님은 어떤 모습도 아니다. 머뭄 없는 법에서는 응당 취하거나 버리지 않아야만 한다. 그대가 앉은 부처를 구한다면 부처를 죽이는 일이요, 앉은 모습에 집착한다면 그 이치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가르침을 듣자, 스님은 마치 제호를 마신 듯 정신이 맑아지며 눈앞이 훤해져 절하였다.

양해梁楷는 남송南宋 때의 화가이다.
인물 산수 모든 분야에 능하였으나 선화禪畵가 그의 주 종목으로 여러 폭의 선화禪畵를 남기고 있다. 황제가 금대金帶를 내리며 화원畵員 자리를 주었으나 이를 받지 않았고, 주로 절에 머물렀다. 아마 그의 선미禪味 풍부한 그림들은 그의 수행에 근본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먹을 번지게 하는 발묵법潑墨法을 즐겨 사용하긴 하였으나 먹을 금보다 더 귀하게 썼으며, 붓질을 아끼고 또 아꼈다.
양해가 그린 《출산석가도出山釋迦圖》는 필법만 논하자면 선화로서의 풍미風味는 덜할지라도 화면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앙상한 가지와 결연한 석가여래의 모습에서 선의 정신이 바로 드러나 있다. 인물의 표현과 채색과 같은 그림의 품격은 남송대 강남에서 그려진 불화와 맥을 같이한다.
화면을 채운 수많은 붓질은 초지初志로 향한 석가여래의 눈빛에 모여 하나를 이루고 있으니 그림 전부를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다.
석가여래는 앙상한 나뭇가지와 깎아 세운 절벽을 배경삼아 서 있으니 배경으로 치자면 건조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잎사귀 하나 남아 있지 않은 고목들은 이미 그가 오온五蘊을 뛰어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징표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또한 화면 전체를 구획한 절벽은 두 번째 마음과의 타협을 일절 배제하고 있는 날카로운 정신과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니 어찌 그 앞에서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든다고 할 수 있을까.

산은 가만히 있고자 하나 구름이 오고 감이 수천길이요, 그 첫 번째 의지 또한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 그를 알아보고 못 알아보는 것은 중생의 밝은 눈이 어두워서일 뿐이다.
옛 글에 이런 구절이 있다.

비가 오니 산은 어둡고 나귀를 말로 여기는구나(雨來山暗 認驢作馬).

나귀를 말로 여기는 아둔함이야 원래 산의 탓을 할 것도 아니니, 산중이 어두운 것은 내 눈이 어두워서이지 어찌 비를 탓할 것인가. 바르게 보고 또 확인해야 할 것이 있으니, 우리가 타고 있는 것은 과연 말인가, 나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