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에 재가 있는 날이면 소년은 어김없이 툇마루에 나와 앉아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어이 아에 히에 야에 히에 야으으 어 으어 어어 으어…….
또래의 아이들에겐 귓전을 스치고 지날 뿐인 의미없는 것이었지만, 소년에게 범패는 영혼을 울릴 만큼 전율과 환희를 선사하는 아름다운 소리였다.
소년의 아버지는 범패를 잘하는 승려였다. 후에 중요무형문화재 영산재 기능보유자였던 어장魚丈 일응 스님이 바로 그분이다. 절에서 나 절에서 자랐기에 소년에게 범패는 익숙한 소리였다. 재가 있는 날이면 어느 날은 하루종일, 어떤 날은 며칠 동안 이어지는 소리였으니.
소년은 범패가 담고 있는 의미를 알 리 만무했지만 그 소리를 듣고 있는 순간 만큼은 편안하고 행복하다고 느꼈다.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내 언젠가 저 소리를 한번 해보리라.’
어느 날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소리를 배우고 싶다고. 그러나 아버지는 범패는 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니라고 이르셨다. “소리를 배우기 위해서는 출가를 해야 한다”며. 아버지 말씀에 소년은 주저없이 말했다. “출가하겠습니다.” 그때 나이 열네 살.
아직은 부모님의 품이 그리울 어린아이였지만 소리를 배운다는 일념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겁 없이 머리를 깎고 절로 들어갔다.
30년간 오로지 범패로 일관해온 인묵 스님에게 범패는 숙명적 신앙이요, 화두였다. 그리고 지금 조계종 어산학교 학장으로 후학들에게 범패를 전수하고 있다.
조계종에서 범패를 할 수 있는 어장급(고수) 스님은 셋 정도. 인묵 스님 외에 원명 스님, 비구니 동희 스님을 꼽는다. 특히 인묵 스님의 목소리는 맑고 청아하며 부드러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묵 스님은 어린 나이에 목을 틔웠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국악도 마찬가지지만 범패는 어려서 본능적으로 받아들여야 목이 트여 소리가 부드럽단다. 변성기를 지나 나이가 들면 목소리가 변해버려 노력해도 소리가 뻣뻣하다. 일반인들이야 잘 알아듣지 못할 수도 있지만 소리를 아는 사람들은 대번에 알아차린다.
그런데 요즘 범패를 배우는 학생들은 한결같이 30-40대가 주를 이루니 소리를 제대로 내는 것을 기대한다는 것이 사실상 힘든 일이다.
“제도적으로 어린아이들이 범패를 배우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어산학교에서 범패를 공부할 수 있는 자격조건이 강원교육까지 마치고 비구계를 수지해야만 가능하고, 게다가 예전과 달리 출가를 하려면 고등학교 졸업 이상으로 만 19세가 넘어야 하니 아무리 일러도 스물다섯이 넘어야 하죠.”
인묵 스님이 가장 안타까워하는 점이다.
변성기 이전의 어린아이들은 아니더라도 계 받기 전에 단 몇 개월이라도 의무적으로 의식과목을 공부케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지금은 계 다 받고 3급고시를 보기 위해서는 율원, 학림, 어산학교, 대학원 석박사과정, 선방 등 5개 가운데 한가지를 선택토록 하고 있다.
인묵 스님이 계 받기 전을 주장하는 것은 그때가 가장 신심이 올랐을 때고, 소위 말하는 군기가 들어 있는 때로 보기 때문이다.
스님은 행자시절을 가장 순수한 열정으로 소리에 몰입했던 때로 기억하고 있다.
범패소리만 배울 수 있다면 무엇이든 다하겠다는 생각으로 집을 나선 소년이 행자생활에 들어간 곳은 금산사 말사인 남고사였다. 나무하고 전답 부치고 갖은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소리를 배우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였다. 범패가 불교의식이기에 불교의식집을 구입해 전부 외우기도 했는데, 책에 있는 의식내용을 종이에 베껴 두었다가 밭일을 하면서도 나무를 하면서도 꺼내 외우곤 했다. 물론 한자의 뜻은 몰랐으나 한글 토가 달려 있는 대로 외운 것이다. 얼마나 몰입해 외웠던지 나중에는 의식문 하나하나를 앞으로는 물론 뒤로도 줄줄 외우게 되었다.
스님이 속가의 아버지 일응 스님 밑에서 본격적으로 소리를 연마한 것은 절집안에서 10여 년간 이런 저런 과정을 마치고 84년이나 돼서 가능했는데, 그리도 원하던 것이었지만 행자시절 만큼 맑고 순수한 영혼으로 다가가진 못했다고 한다.
스님이 계 받기 전을 고집하는 데는 이런 체험에 근거한다. 그러나 아직 불교의식에 대한 종단의 인식은 인묵 스님의 기대에 못 미친다.
선불교 우선의 풍토에서 의식을 부차적이고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던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일제 36년 동안 의식은 한풀 꺾였고, 서구문물이 들어오면서 다시 또 한풀 꺾이면서 불교의식은 위기를 맞고 있었다. 또한 그 와중에서 불교종단의 혼란으로 안정을 찾지 못했던 점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인묵 스님은 그래도 자신이 어렸을 때만 해도 재가 있으면 반드시 범패와 승무가 함께 공연되는 등 꽤 활발했다고 한다. 최근 조계종단이 안정을 찾아가면서 의식이 제법 여법해지고 성대해져가고 있는 추세에 있다. 지난해에는 조계사 마당에서 범패와 작법이 주도하는 영산재가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횟수도 잦아지고 있지만 그러나 정작 이를 주도할 사람은 몇 안 되다 보니 인묵 스님은 요즘 너무 바쁘다. 송암, 일응 스님 등 1세대 노장스님들이 세상을 떠나고 이제는 그들을 이은 몇몇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인묵 스님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이을 사람이 없는 것이다. 출가자도 줄어들고 따라서 어린 나이에 범패를 배우는 일은 이제 거의 불가능하다. 태고종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범패를 배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산학교는 2년과정이지만 1학기는 일반의식을 배우는 과정이고 그것을 마치면 범패와 작법(승무)에 들어간다. 그러나 1년이 지나면 인원은 반으로 줄어든다. 그리고 다시 1년이 지나 졸업할 때면 그 반으로 줄어든단다. 그만큼 범패는 어렵다.
인묵 스님은 10년 동안 일응 스님으로부터 범패를 전수받았다. 계속해서 사사하면 3년 정도 걸리지만 실전까지 거치려면 10년은 해야 한다.
범패에는 악보가 없다. 그러기에 배우고 외우고 실전을 거치는 과정을 반복한다. 나름대로 기억을 놓치지 않으려고 기호로 자기만 알아보는 표시를 해놓기는 하지만 요들송 식의 장식음이 많은 범패는 도저히 악보로 표시할 수가 없다. 그래서 표준은 있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약간씩 달라 호남과 영남, 서울 등 지역에 따라 특징이 있다.
7월 18일 부터 국립극장에서 주도하여 각 지역의 범패공연이 있다. 이런 일은 불교종단에서 나서서 해야 마땅하지만 전통문화 보존차원에서 공공기관이 보조하는 공연이다. 종단에서 아직 손쓰고 있지는 못해도 그나마 국가에서 인식하고 있는 것만도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인묵 스님은 범패의 고수인 일응 스님이 나이 들어서도 주머니에 소리를 메모해두고 수시로 익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평소에도 늘 범패를 화두처럼 들고 있는 것이다. 범패가 바로 수행이어야 한다.
그래서 일응 스님은 범패 이외에 다른 일을 하지 말라 이르셨다. 인묵 스님은 주지직을 몇 년째 맡으면서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깨달았다. 평소에도 일념으로 화두처럼 들고 있어야 흐름이 이어지는데, 다른 일에 매달리면 흐름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현재 자재암 주지로 있는데 사실 주지직은 상황이 어쩔수 없어서 맡은 것이지 제대로 노릇을 하지는 못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대부분의 생활이 어산학교가 있는 대원암에서 이루어진다.
그래도 스님은 누구보다 외도가 많았다. 범패는 종교적 목적을 갖고 있지만 역시 예술적으로 승화된 소리니 만큼 인묵 스님은 예술적인 끼가 넘쳐나는 사람이어었기에, 다른 분야의 연주자들과 함께 하는 공연이 많았다. 일본에서 열린 한일 아트페스티벌에 나간 적도 있고, 미국에서는 피리,양금,바이올린,플룻, 대금 무용 등과 함께 공연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쟁과도 드럼과도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해에 돌아가신 일응 스님은 인묵 스님의 외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기에 외국에 가도 몰래 갔다오곤 했단다.
그렇지만 인묵 스님은 노스님의 뜻을 충분히 알아듣고 있다. 범패가 바로 수행이 되지 않을 때 전문 재받이 중으로 전락되기 쉽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은 생활 속에서 닥친 여러 가지 일로 의식을 물어오기도 한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인터넷 카페를 하나 열어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해주는 게 어떠냐고 하지만, 사실 스님은 컴맹이다. 도저히 컴퓨터가 익숙해지지 않는단다.
이제는 종단차원에서 의식을 정리할 때임에는 분명하다는 생각이다. 종단에서 많은 정성을 들여 <통일법요집>을 내놓았지만 사찰마다 포교당마다 의식이 달라 동질성과 공동체성을 유지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각계의 전문가로 이루어진 불교의식의례의전연구소가 만들어져 의식을 정비하고 통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바른 의식을 정립하고 또한 의식을 몰라 답답해 하는 불자들에게 상담도 해줄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불과 사시마지는 전국이 거의 통일이 돼가고 있어요. 불교방송의 역할이 크지요”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한 고집과 우직함이 오늘의 우리불교가 있게 한 원동력이자 미래의 버팀목임에 분명하다. 불교의식사에 큰 바위얼굴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