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분의 가르침대로 걷고자-수진 / 담양 용화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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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박원자
2003년 02월 252호
한 사람의 일생에 있어서, 그것도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 청소년기에 있어 스승의 존재란 거의 절대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누구를 만나느냐가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관건이 될 것이다.
열일곱 살이던 고등학교 1학년 때 나는 나를 키워 주던 할아버님을 잃었다. 세상을 다 잃은 듯 할아버님을 잃은 상실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그 때, 나는 내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된 한 분의 스승을 만났다.
바람이 스산히 불고 가랑잎이 떨어지던 어느 가을날, 나는 내 종조부님을 따라가서 한 분의 수행자를 뵈었고, 맑은 분위기에 청초한 모습의 그분과 대면한 그날, 나는 출가자라는 결코 평범치 않은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아마도 나는 그분이 아니었으면 출가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그분은 출가의 길을 걸은 나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분이 가진 모든 것을 배웠고 추종했으며, 그분이 가르쳐 준 대로 길을 걷고자 한평생 노력했다. 그리하여 그로부터 사십여 년이 흐른 후, 그분의 율맥을 이어받아 해동율맥 11대 율사가 되었다. 돌아보면 실로 깊고 깊은 인연이었다.
고1 때 겨울방학을 맞아 처음 절에 와서 노스님을 시봉하면서 지내는데, 마치 오래 살아온 듯 절생활이 이질감 없이 익숙하고 편했고, 마땅히 내가 살아야 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마음이 가볍고 좋을 수가 없었다. 마음이 굉장히 시원해지고 잡다한 생각 없이 순수해짐을 느꼈다.
아침 저녁 예불하고 법당 청소하고 노스님 시중들며 방학을 보냈다. 하루는 양지바른 곳에 앉아 <천수경>을 외우고 있는데, 노스님께서 보시고 ‘시키지도 않는데 <천수경>을 외우는 것을 보니 인연이 있구나’ 하셨다.
절 생활이 마음에 들기도 하고 그 땐 생활이 어려울 때라 학교 다니는 것도 버거워 노스님께, ‘학교 안 다니고 그냥 중노릇하면 어떻겠습니까’하고 여쭈었더니, ‘졸업하고 출가해도 늦지 않으니 배우던 것 마저 배우고 와라. 그 대신 네가 졸업할 때까지 쌀 두 말씩 학비로 주마’ 하셨다. 고3 때를 제외한 매 방학 때마다 스님이 계신 곳에 와서 시봉을 하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음 다음날 본격적인 출가를 위해 용화사에 계신 스님을 찾아뵈니 뜻밖이라고 생각하셨는지 그리도 좋아하셨다. 말씀으로 표현은 안 하셨으나 온 몸에 기쁨을 숨기지 못한 채 괜스레 이 방 저 방을 왔다갔다 하시면서 헛기침을 하셨던 기억이 새롭다. 훗날 들으니, 어렸을 적부터 한문을 익히고 뼈대있는 집안에서 자란 나를 스님께서 재목으로 찍어두었다고 했다.
그러나 처음 뵐 때 그리도 청초해 보였던 노스님은 내게 그렇게 무섭고 두려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스님 앞에 서면 마치 고양이 앞에 쥐처럼 조심스럽고 무서웠다. 그러고 보니 행자시절을 시작으로 강원에 다닐 때도, 그후 선방에서 지내다가 노스님 곁에 머물면서 스님을 모시다 스님께서 열반하실 때까지, 노스님은 내게 늘 그렇게 무서운 존재였던 것 같다. 남들에겐 ‘내 손자상좌’라고 자랑스레 말씀하셨다고 하나, 내게는 한번도 직접 잘한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 입안의 혀처럼 해드린다고 했으나 항상 ‘너는 왜 그리 흐리멍텅하냐. 너는 과거전생에 술을 많이 먹었어!’ 하는 소리를 수없이 들었다. ‘잘못한다’고 혼만 났을 뿐이었다.
밥 먹는 모습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너는 왜 그리 째금거리고 먹냐?’ 하시며 ‘밥은 이렇게 먹어라’ 하셨고, 내 잠자는 것을 보시고도 ‘넌 잠자는 것이 왜 그 모양이냐. 잘 적에는 오른쪽으로 누워 무릎을 약간 구부리고 다소곳이 자야 마음이 산만하지 않고 고요하다’ 하시면서, ‘엎드려 자는 잠은 아귀잠이요, 왼쪽으로 누워 자는 것은 축생잠이며, 반듯이 누워 자는 것은 송장잠이니, 오른쪽으로 누워 자는 길상잠을 자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노스님의 꾸지람이 수행자로서의 정신을 살찌웠던 것 같다. 아마도 스님께선 그런 꾸지람으로 나를 키우고 보살폈을 것이다. 나중에 노스님을 따라 다니면서 온갖 불교의식을 배우고 익힐 때 그런 꾸지람에 따른 가르침이 아니었으면, 내가 어찌 오늘날 그분의 법을 잇고 복장의식, 예수재, 수륙재 등의 불교예식을 배워 행할 수 있었겠는가.
해동율맥 9대 율사로서 조계종 5·6·7대 종정과 태고종 2·3대 종정을 역임한 묵담 노스님은 선과 율에 밝고 이사理事를 두루 갖춘 당대 선지식이셨던 분이다. 계율에 어긋나는 일은 바늘귀만큼도 용납을 하지 않았고 매사에 원리원칙을 지켰던, 부처님의 극진한 효자이셨다. 어떤 일에도 ‘그냥’이라는 말은 통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노스님의 부처님을 향한 효는 보는 이로 하여금 숙연함을 자아낼 만큼 극진했다.
그 당시만 해도 쌀이 잘 정제되어 나오지 않아 병든 썩은 쌀을 가려내고 충실한 쌀을 골라 그걸로 마지를 지어서 부처님 전에 올리게 했다. 향을 하나 올리고 죽비 마지 하나를 올려도 노스님의 모습은 그렇게 정성스럽고 지극할 수가 없었다. 부처님께 소홀히 하는 일은 감히 있을 수 없었다. 감나무에 감이 지천으로 매달렸어도 부처님 전에 먼저 올리지 않고는 먼저 먹어본 적이 없다.
수행에 전념한다 하여 부처님께 소홀히 하는 요즘 수행자들이 배워야 할 부분으로 생각한다. 어느 날 노스님께서 어느 절엘 다녀오시더니, ‘법당은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아 먼지가 풀풀 나는데, 스님 방은 분칠을 해놓았더구나’ 하셨다. 노스님은 한평생을 좁은 방에서 살며, 모든 언행을 부처님 위주로 사셨던 분이다. 나는 행자시절부터 스님이 열반에 드실 때까지 그분께 원리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상과 부처님께 올리는 효를 배우려 노력했고, 지금도 그것을 지키려고 힘쓰고 있다.
내 염불소리가 노스님의 염불성을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데, 정작 노스님은 나의 염불소리를 듣지 못하셨다. 내가 스님을 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스님께선 폐렴을 호되게 앓으시고는 청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은사 스님이나 다른 스님들에게 ‘저 아이, 초성은 좋으며 염불은 잘 하느냐’고 물으셨다고 한다. 스님께선 그 때 돌아가실 만큼 크게 폐렴을 앓으셨는데, 병원에 입원하시는 스님을 뒤로 하고 학교에 다니기 위해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그랬었다. ‘만약 노스님께서 돌아가시면 나를 잡아 줄 사람도 없으니 출가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스님께선 기력을 회복하셔서 제2의 삶을 사셨고 나는 스님의 새로운 생과 함께 출가의 길을 걸었으니, 만약 그 때 스님께서 돌아가셨다면 나는 지금쯤 세속에 있었을 것이다.
나의 행자시절은, 학교를 다니면서 방학 때만 되면 용화사나 전주 관음선원에 계신 스님에게로 가 스님을 시봉하면서 지냈던 고등학교 시절과 해인사 강원으로 가서 두 달쯤 후원생활을 한 시절일 것이다. 노스님 곁에 있으면서 내 정신을 살찌웠던 행자시절도 잊을 수 없으나, 해인사 강원에 다니면서 대중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했던 후원생활도 잊지 못한다. 마침 대적광전을 보수할 때라 한 끼에 두 시간씩 고무장갑도 없이 설거지를 하고 나면 손에 때가 끼어서 씻어도 씻어도 씻겨지지 않았던 것도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사집반에서 공부를 하면서 설거지가 끝나는 대로 그날 오전에 배운 책을 가지고 계곡으로 가서, 돌로 책상을 만들어 책을 올려놓고 죽어라 외웠던 일이다. 신심 가득하고 순수하기만 해서 하나 배우면 그대로 살이 되고 영혼이 되던, 그저 하루하루가 재미있기만 하던 그 때를 잊을 수 없다.□
취재·정리/박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