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서 현웅 스님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법랍 40년이 다 돼가지만 스님들에게도 그 이름이 생소한 것은, 출가후 반 이상의 세월을 미국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해외포교를 해온 것이다. 치열한 구도 열정, 더 넓은 세상으로
스님이 해외포교에 나선 것이 1984년이니까 세속 나이로 마흔살이었다. 애초 해외포교에 무슨 큰 뜻을 품었던 것은 아니지만,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 좀더 넓은 세상에서 치열한 삶을 원했던 스님은 그것을 기회로 받아들였다.
송광사에서 구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구도의 열정이 강한 수행자였다. ‘어영부영’은 스님에게 용납되지 않았다. 구산 스님뿐 아니라 성철 스님 회상에서도 있었고 제방의 선방을 두루 다니며 열심히 가르침대로 수행을 했지만, 변화가 없는 것에 많은 회의를 하곤 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까지 생각하기도 했는데, 자식의 시신을 대할 부모님 생각으로 마음을 바꾸기도 했다.
한동안은 모든 것을 놔 버리고 무일푼으로 동가식서가식하는 만행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도반이 사는 곳에 가서 대화를 하다 문득 자신을 이끌어 줄 스승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인천 용화사로 향했고, 여기서 제2의 스승인 전강 스님을 만나면서 현웅 스님의 방황은 끝났다.
그후 공부길을 다잡아 6년간 토굴생활을 하고 나와 선방에서 유나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은 복잡하게 얽힌 것도 많았고, 한국이라는 나라가 참으로 좁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 때 스위스로부터 초청장이 날아온 것이다.
미국생활 5년 쯤 돼서인가. 어느날 아침 좌선을 하던중 스님은 문득 <방거사어록>의 “있는 법도 없게 해야 하는데 하물며 없는 법을 있게 해서야”라는 구절이 떠오르면서 일시에 법에 대한 의심이 풀려나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스님은 당시의 느낌은 “마치 물이 가득 담긴 항아리의 밑구멍이 터져나간 것과 같았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나자 조사록이나 경전 등이 그대로 이해되었다. 그후 스님은 한국에 와서 전국의 선원을 돌며 선사들과 법거량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웅 스님은 지금 그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판단은 좀더 후에 자연스레 내려질 것이기에.
한국식 불교는 서양인들에게 통하지 않아
지식과 이해 놓아버리는 선(禪)을 통해 전법
유럽으로 간 스님은 부와 지성을 겸비한 서양인들이 동양인 ‘멍크’의 말과 행동을 주시하는 경험을 하면서 한동안은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지만, 불어권인 스위스는 언어의 장벽이 너무 컸다. 그래서 영어권인 북미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국 땅에서 부딪친 가장 큰 어려움은 언어나 돈보다 문화적 차이. 우리에게 이미 습관화된 관념과 자세가 전혀 통하지 않았다.
말끝마다 “땡큐”를 연발하는 그들의 습성부터 이해할 수 없었다. 나중에야 그게 매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한국에서 하던 버릇으로 점잖게 앉아 오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말도 ‘찾아오는 사람이 한국말을 배워야지’ 하는 오만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현웅 스님은 그것은 좋지 않은 버릇이었다고 말한다.
5년 정도 지나 더 이상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새로 탄생한다는 마음으로 밑바닥부터 새롭게 시작했다. 팜플렛을 만들어 직접 주택가에서 나누어 주면서 멤버가 되어 줄 것을 청하기부터 했다. 모든 권위의식을 깨끗하게 포기하고.
중년의 나이에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없는 것으로 하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 말은 쉽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스님은 깨끗하게 포기하는 데 선수다. 대강 살아가는 것은 스스로 용납이 안 되기에.
문화의 차이는 불법을 전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다른 것을 요했다.
유교식 불교에 익숙한 우리의 불교적 토양이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조상을 잘 받들기 위해 천도를 한다든지, 자손을 잘되게 해달라거나 합격들을 기원하는 식의 정성을 들이는 불교가 그들에게는 없었다. 우리는 이해가 안 돼도 ‘그렇게 하면 조상이 잘된다더라’ 하면 믿는데 저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우리식의 불교를 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머리로 이해하지 않으면 행하지 않는다.
현웅 스님은 선禪이 서양인들에게 불법을 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결론짓는다. 서양인들은 아는 것이 너무 많아 믿음이 없기에, 아는 것을 통해서 아는 것을 쉬게 함으로써 바로 선, 부처님 마음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비파사나는 일정경계에 머물 우려
스승 부재는 화두선의 맹점
현웅 스님의 선법은 간화선법을 근간으로 한다. 여기에 염불선이나 호흡법을 수용해 사람의 근기에 맞게 수련시키기도 한다. 태국에 있는 절에 들어가 태국의 수행자들과 함께 비파사나 명상법도 익힌 바 있는 스님은 간화선과 비파사나 명상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다.
“소승불교의 비파사나 같은 명상법은 잎사귀, 가지 등 감각을 통해 느껴 들어가 깨달음을 완성하는 것이라면 대승의 화두선법은 그런 무상한 것들은 놔두고 처음부터 나무의 뿌리를 자른다고 할까요.
서양인들이나 동양인들이나 마찬가지로 감각을 통해 들어가는 것을 쉽다고 느끼지요. 그러나 비파사나는 어떤 경계에 머물러 즐기면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게 되는 위험성이 있어요. 부처님이 살아계실 때는 지켜보면서 단계를 설명해 주셨기 때문에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지만, 오늘날은 공부의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부처님과 같은 깨달은 스승이 없다는 점에서 궁극의 경지에 이르기 힘들다는 점이지요.”
그러나 비파사나 명상가들은 화두선은 스승이 없음을 단점으로 지적한다. 실제 한국의 화두선은 스승이 있지만 스승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기보다는 혼자서 공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자기식으로 열심히 해서 어떤 경계에 이르면 스승의 검증없이 깨달았다고 쉽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감성보다 이성적으로 길들여진 서양인들
우울증 등 정신병리적 증상 심각한 상태
서양인들은 동양사상과 문화를 신비롭게 생각하는 데 반해, 동양인들은 서양의 거대한 물질문명과 합리적 사고방식을 동경한다. 한국인들도 서구인들을 동경한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롱다리’는 신세대들이 추구하는 이상적 외모이며,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자유분방함은 어느새 우리 속에도 뿌리내려 가고 있다.
그런데 서양인들과 오래 호흡해온 현웅 스님이 보는 시각은 어떨까. 스님은 우리의 서양인들에 대한 동경은 껍데기만 본 것으로 허상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한다.
“긍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아이가 울면 우리들은 젖을 물려 주며 달래지만 그네들은 장난감 하나 줘서 빈방에 혼자 놔둡니다. 아이는 울다 알아 주는 이가 없으니까 혼자 그쳐 버리지요. 어려서부터 혼자라는 자아가 생기게 됩니다. 개인주의가 형성되는 것이지요. 또한 어릴 때부터 이래라 저래라 하며 때린다거나 하지도 않아요. 부모는 도와 줄 뿐입니다. 자존심을 키워 주는 거지요.
미국 애들은 혼자 한국공항에 내리면 말도 못하면서 그냥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 애들은 미국공항에 내리면 일단 움츠려들어요.”
그러나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길들여진 그네들은 냉철하고 지성적이고 도덕적이지만, 그러다 보니 감정처리가 안 돼 지성인일수록 우울증이 심각해 하버드생의 20%가 사이코란다. 그리고 급기야는 총기난사 사건과 같은 극단적인 행동이 발생한다는 얘기다.
“자유분방함도 좋지만 인간은 마음에서 자유스러울 때 비로소 자유스러워지는 것이지 마음에서 생각만 자유스럽게 습관을 들여 생각이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면 그 습관은 재앙을 부르게 되지요.”
현웅 스님은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서양의 허구적인 면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싶다고 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가족제도 속에서 사소한 것이 걸러지고, 어른을 공경하며 수줍어할 줄 아는 모습이 얼마나 인간적인 것인가를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님은 서양인들에 대해 ‘정은 안가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한다.
스님은 서양의 이성적인 면보다 감성적이 동양의 풍토가 인간의 삶에는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한국의 부정적인 면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지나치게 남들의 눈을 의식하고 외형적인 것에 치중하는 면, 능력만큼 인정되지 않는 관료의식 등 서양과는 또 다른 난관들이 삶을 피곤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 우리만의 미덕도 있다는 것을 스스로는 오히려 알지 못하거나 외면하고 있다는 점을 현웅 스님은 일깨워주고 있었다.
아직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원고를 얼핏 살펴 보니 적극적인 스님의 삶의 자세와 진지한 스님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었다. 먼 곳에 있으면서도 불교신문에 난 선에 대한 기사를 반박한 기고문이나, 국내에 연고가 있는 스님이라면 선뜻 내놓기 힘든 큰스님들과의 법거량 일화 등 신선한 충격을 준다.
타성에 젖지 않고 늘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음은 큰 기쁨이었다.□
취재·글/이연정쪾사진/문영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