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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 하셨던 응담스님이 남기신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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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리포트 - 편집실 2000년 12월 226호
석가모니 부처님을 우리가 존경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해어진 가사와 발우 하나로 평생을 길 위에서 사셨던 모습 때문이다. 존경하면서도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는다. 또 한 스님이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평생을 단순하고 소박하게 사셨던 응담 스님. 응담 스님 가시던 날, 꽃상여도 애끓는 조사도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흩뿌렸다.
“시주의 은혜를 입거나 신도와 상좌의 신세를 지고 싶지 않다. 내가 죽었을 때 사방에 알려 번거롭게 하지 말라. 산중에서 조촐하게 화장하여 흩어버려라.” 11월 14일 주석처인 수덕사 서당에서 원적에 든 응담 스님의 이날 영결식과 다비식은 스님의 유언대로 부고를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소식을 들은 수좌들과 일반 불자들이 전국 곳곳에서 모여들어 긴 행렬을 이루었다. 고인의 뜻에 따라 청혼독경과 수덕사 주지 법장 스님의 인사말로 우중의 영결식은 10여분 만에 끝났다. 상좌들이 비 젖은 땅에 엎드려 영결식에 참석한 스님들께 삼배를 올릴 때는 숙연함이 감돌았다.
영결식 후 응담 스님의 법구는 산중의 다비장으로 옮겨져 곧바로 다비에 들어갔다. 500여 사부대중들이 덕숭산 솔숲길을 따라 조계종 원로의원 응담 스님의 법구를 뒤따랐다. 평생을 오로지 ‘죽지 않는 법’을 찾아 참선수행에 매진했던 응담 스님은 그렇게 하얀 연기로 화해 사바세계와의 인연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제 화신으로 이승의 우리들과 함께 할 것이다.
“요즘 절집의 다비가 너무 번거롭고 호화스러워 불조의 뜻을 저버리고 시주의 은혜를 망각한 것이니, 너희들이 내 상좌라면 내가 이야기한 대로 반드시 지켜주기 바란다. 거듭 당부하니 소홀히 하지 말라.”법장 스님과 문도 대표 수경 스님은 “스님의 한평생 살림살이는 본분납자로서 매우 단순하고도 소박하셨다”고 회고했다. 그런 스님의 간곡한 유훈이었으니, 원로의원의 위상에 따른 영결식 절차를 잘 알고 있었음에도 산중에서 다비를 모실 수밖에 없었다. “저희들의 옹졸한 처신으로 종단 원로대덕 스님을 비롯한 사부대중께 큰 누를 끼치게 된 점 깊이 참회드리며, 스님의 뜻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던 저희들의 심정과 고충을 헤아려 주셨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돌아가신 스님의 마지막 가는 길이 조촐하니 죄를 지었음이고, 먼 길을 마다 않고 영결식에 온 스님들에게는 피치 못하게 결례를 하게 됐으니 헤아려달라는 말이었다.
응담 스님 가시는 날 펼쳐진 덕숭산의 법연(法宴)을 누구 하나 조촐하다고 나무라지 않았다. 원로의장 법전 스님은 “참으로 잘 했다. 이렇게 해야 한다”며 두 스님의 등을 다독였다.
사실 영결식을 어지간하게 치르기 위해서는 산중의 살림에 큰 주름살이 가는 것쯤은 감수해야 한다. 다비만큼 간편한 장례 절차도 드물지 않은데, 1~2억원이 바람에 꺼져 피어나는 촛불 연기처럼 흩어져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장례 한번 치르고 주지스님은 몇 달 동안 고생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언젠부터인가 성대하게 치러야 잘 치른 장례라는 관념이 관습으로 굳어져 내려온 것이어서 ‘욕먹을’ 각오하고 간소한 영결식을 치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음은 있어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새로운 질서는 지금의 관습에 정면으로 맞서 부수지 않고서는 만들어지지 않는 법이다.
응담 스님께서는 절집 장례의 그런 사정을 잘 아셨나보다. 혹, “누가 욕하면 내 탓으로 돌리면 되네”, 그러시지는 않았을까.
응담 스님은 입적 며칠 전 법장 스님과 상좌 수경스님을 불러 조촐하게 화장해 흩어버리라는 당부와 함께 봉투 하나를 내놓았다. “소중한 시주의 돈이니 중생을 위해 써라.” 그 동안 모아두었던 보시금 7천만원이었다. 생명나눔실천회,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지리산살리기 범국민연대, 사랑 실은 교통봉사대(어린이 심장병 치료 단체)에 기증해 생명과 자연을 살리는 일에 쓰여진다. 평생을 수행자로 살아온 응담 스님은 또 이렇게 우리 곁에 머물러 계시는 것이다.
“49재 등 어떤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뜻에 따라 49재도 치르지 않는다. 대신 상좌들이 모여 정진하기로 했다. 그리고 은사 스님이 했던 것처럼 조그만 정성을 모아 중생들의 어려움을 덜어내는 데 쓰기로 했다. 응담 스님의 고귀한 뜻은 이렇게 대물림된다.
‘덕숭산 호랑이’ 응담 스님. 공부하지 않는 모습을 가장 싫어해 빈둥거리는 스님을 보면 반드시 호통을 쳤다. 수덕사 인근 조그만 암자에 계실 때였다. 손수 빨래를 하시려고 우물가에 나왔다. 이 곳을 지나던 비구니 스님 둘이 달려들어 스님의 빨래를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응담스님은 두 스님에게 물바가지를 퍼부었다. “남 빨래해줄 시간 있으면, 공부나 더 해” 하며 쫓아냈다. 공부에 철두철미했던 노스님의 한 모습이다. 그래서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시봉도 마다했다. 한번도 빠지지 않은 새벽예불을 위해 계단을 오를 때 옆에서 거들려 하면 “평생 나를 도우려면 부축하라”는 말로 말렸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마지막 당부가 법등명 자등명(法燈明 自燈明)이었듯이 공부는 스스로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길이 있다고 가르쳐 줄 수는 있어도 누구도 대신해서 갈 수 없는 길이 공부의 길이라는 것이다.
원로의원으로 계시면서도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갈 때도 혼자였다. 사중에서 승용차를 내주려해도 손을 저었다. 나 때문에 사람이 따라붙고, 비싼 기름값 길 위에 뿌려서야 쓰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대중교통에 몸을 맡겼다. 노구에 먼길이 불편하지 않을 리 없지만, 시주의 중함을 언제나 잊지 않으심이었다. 10월 20일 서울의 총무원에서 열렸던 원로회의에도 혼자 다녀왔다. 그 날 원로의장을 뽑는 원로회의에서는 서로 의장 소임을 양보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자리’ 다툼에 시달렸던 조계종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 회의가 응담 스님이 참석한 마지막 회의였다.
죽지 않는 법을 찾아 용음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금오 스님의 선맥을 이은 응담 스님. 세수 87, 법랍 70세를 일기로 사바의 인연을 다 하기까지 금강산 마하연, 오대산 상원사 등 제방선원에서 ‘천지가 생기기 전에 본래 내 마음자리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이냐(天地未生前 是心)’를 참구했던 참수행자였다. 86년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추대됐으며, 제자로는 지리산살리기 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수경 스님과 충남 개심사 주지 현성 스님, 동국대 박선영 교수 등이 있다.
“내 몸뚱이 성할 때 ‘이 놈’ 하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불교에서 이 놈 하나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구니의 설이지 불교의 진리는 아닙니다. 수행자는 항상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상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늘도 덮고 땅도 덮는 이 자리, 마음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이것 뿐입니다.”이날 영결식에는 조계종 원로의장 법전 스님, 부의장 종산 스님, 덕숭총림 방장 원담 스님을 비롯 총무원 총무부장 원택 스님, 전 종회의장 설정 스님, 해인사 주지 세민 스님, 종회부의장 명진 스님, 종회의원 장윤 자승 지홍 향적 현각 범종 성관 현응 스님,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상임공동대표 도법 스님 등 사부대중 500여명이 응담 스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켰다. 그리고 함께 겨울비를 맞으며, 응담 스님의 소박했던 삶, 새로운 장례문화의 가능성이 무엇인지를 말없는 말로써 나누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