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들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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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바라봅시다 - 이죽내
2000년 12월 226호
과학기술은 한없이 발달해 가는데 사람의 마음은 자꾸 왜소해 가는 것 같다. 현대인은 마음의 여유가 없다. 세상이 온통 돈벌이 경쟁이고 보면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다. 심지어는 창의성도 돈벌이를 위한 창의성이니 말이다. 돈벌이에 효자노릇을 하는 사람은 신지식인으로서 찬양의 대상이 되는가 하면, 자신의 마음을 갈고 닦아 창의력을 발휘하고 있는 사람들은 ‘낡은’ 지식인으로 내몰려 푸대접을 받고 있다. 마음은 발붙일 곳이 없고, 눈에 보이는 것은 돈밖에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인간관계는 이익 중심의 인간관계가 되어,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무관심하고 서로를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살벌하고 삭막한 인간관계가 되어가고 있다. 이로 인해 비인간화, 탈인간화는 날로 심화되어가고 있는 듯 하다.
우리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인간다운 삶을 사는 일이다. 인간다운 삶이란 전체로 사는 삶이다. 이를테면, 물질적으로 살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살고, 신지식인뿐만 아니라 ‘낡은’ 지식인도 필요하고, 장점만 인정할 것이 아니라 단점도 인정하고, 내 생각뿐만 아니라 남의 생각도 받아들이고 사는 삶 같은 것이다. 전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하다. 받아들일 때 정신적인 공간이 열린다. 가령, 자신의 결점을 인정하기가 괴로워서 발버둥쳐 오다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가슴이 확 트이는 경우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정신적 공간이 넓은 사람이다. 수도修道도 정신적 공간의 확장에 있다. 사람들 가운데는 한평짜리 정신적 공간에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주적 공간에 사는 사람도 있다. 한평짜리 공간에 사는 사람은 남을 받아들일 정신적 여백이 없다. 그런가 하면, 우주적 공간에 사는 사람은 무엇이든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대자유로움이 있다.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열린 대화, 열린 사회 등 ‘열린’이란 말도 바로 정신적 공간을 뜻한다. 정신적 공간을 갖고 있을 때 서로를 받아들이고, 서로가 왕래할 수 있고, 열린 대화, 열린 사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받아들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괴롭거나 싫은 것은 누구나 피하고 싶은 심정이다. 의식적으로 피할 수도 있고 무의식적으로 피할 수도 있다. 무의식적으로 피하는 경우는 자신도 모르기 때문에 피하고 있는 줄도 모른다. 그러기에 의식적으로는 받아들인다고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있음을 종종 보게 된다. 여기서 인간의 이중적二重的 기만성을 엿보게 된다. 이것이 불가에서 말하는 무명연기無明緣起의 모습이다. 깨우침에 뜻을 두고 있지 않는 사람들은 삶에 큰 지장이 없는 한 괴로운 문제를 그대로 안고 살아도 무방할지 모르겠다. 그것이 중생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괴로운 문제가 병으로 표출하여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면 그대로 둘 수가 없다. 치료를 받아야 한다. 정신적인 병은 원래 자신의 문제를 받아들이고 있지 않을 때, 더 심한 파국에 이르기 전에 그 병을 통해 강제적으로 자신의 문제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목적의미를 갖고 있다.
30대 후반의 직장인 미혼여성이 병원을 찾았다. 그녀는 무기력하고 어떤 느낌도 느낄 수 없고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으며, 기억력과 집중력이 없다고 호소하였다. 매우 지치고 정신이 혼란한 상태였다. 정신치료를 하던 중 환청이 나타났다. 그녀를 가장 괴롭힌 환청내용은 알 수 없는 남자들로부터 “너는 나쁜 매춘부야”라는 소리였다. 그런 소리가 들릴 때는 너무 괴로워서 귀속에 솜을 틀어막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환자의 모든 신경은 이 소리에 집중되었고, 그녀의 삶은 이 소리와의 전쟁이었다. 드디어 그 소리의 의미를 깨달음으로써 소리는 사라졌다. 그녀는 엄격한 전통적인 가정에서 자라면서 성적인 것은 나쁜 것이란 관념이 주입되어 대학에 들어가서도 남녀교제는 생각할 수 없었고 공부에만 전념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적 환상과 호기심이 일어났다. 그럴 때마다 자책하고 억눌렀다. 직장에서는 일에만 열중하여 주위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직장생활에서 때때로 우울증상이 나타났으나 강한 의지로 버티어 오다가 결국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어서 병원을 찾게 된 것이다.
이 환자의 문제는 신체적 관능적 영역, 즉 성적인 영역을 받아들이지 않는 데 있다. 그러기에 환청이 나타난 것이다. 말하자면, 환청이라는 강제적 방법으로 자신의 성적 영역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성적 영역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성 관계를 허락한다는 뜻이 아니고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지금까지는 여자이면서 여자라는 것을 억압하고 살았다. 성적 영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여성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자신의 여성성을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실감나는 여자로 태어난 것이다. 그전에는 여자처럼 보인 나 아닌 나로서 살아온 것이다. 자신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일하는 행동에서였다. 이와 같이 인간의 정신은 항상 ‘전체’로서 자각된 삶을 살기를 원한다. 어떤 영역도 무시하고, 모른 채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전체’로서의 자각된 삶을 살기란 명상적, 구도적求道的 삶을 요구하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삶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가짐이다. 그렇지 않고는 병이 생기거나 재앙이 닥쳐오기 때문이다. 환경파괴로 인한 자연 재앙이나 각종 사회범죄 등 사회 재앙도 근원적으로 ‘전체’로서 더불어 사는 지혜의 결여에서 온다. 나는 때때로 어린 시절 시골의 유유자적하며 소박한 나눔의 공동체적 삶을 머리에 떠올린다. 가진 것은 없으면서도 작은 것을 서로 나누는 질박한 삶, 비록 물질은 넉넉하지 않지마는 마음만은 넉넉한 삶 말이다. 이런 삶이야말로 서로를 받아들이는 열린 삶, 전체로 사는 삶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런 삶의 마음가짐을 갖는 것은 불가능한 것도 아닐 것이다.
우리는 지금 지식정보화시대에 살고 있다. 정보화 사회는 세계적인 정보망을 통해 풍부하고 신속한 정보를 값싸고 편리하게 제공한다거나, 개인의 지위나 권위는 지식과 기술을 기초로 한 개인의 능력에 따라 결정되는 개방사회가 되는 등 많은 장점이 있으나 그에 따른 어두운 면도 적지 않다. 지식정보화시대는 최고가 아니고는 살아남기 어려운 대경쟁의 시대라고 한다. 1등이 전부를 차지하고 2등을 해선 소용이 없다. 승자는 모든 것을 향유하는 반면, 패자는 철저히 빈털터리가 된다. 그야말로 외부환경의 변화라는 도전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대응하느냐에 생사가 달려 있는 시대가 왔다. 또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문자화되고 기호화된 정보를 통해 형성되기 때문에 심각한 인간성 상실이 우려된다. 산업사회의 인간소외적 전철을 반복한다면, 지식정보화사회는 우리에게 희망보다 절망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이제는 인간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얼굴을 한, 인간적인 지식정보화시대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러할 때, 모든 지식과 기술은 인간의 삶에 진정으로 봉사하게 되고, 적자생존이 아닌 화자생존和者生存의 시대, 즉 대립과 투쟁이 아닌, 서로 융합하고 포용하는 상생相生의 지식정보화시대가 될 것이다. 거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 이런 시대를 열어가기 위하여 바쁜 가운데 한가한 틈(忙中閑)을 갖는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 여유란 자신을 되돌아보는, 자신과 마주 서는 자기내성의 여유이다. 자신과 인류의 구원救援은 마음 밖에는 없기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