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십지품의 마지막 제10, 법운지法雲地의 내용이다. 총체적인 결론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십지법문이 끝나자 타방他方의 여러 부처님께서 오셔서 증명하신다.
“이 때에 다시 부처님의 신통력으로써 시방으로 각각 십억 세계의 티끌 수 같은 세계 밖에 십억 세계의 티끌 수 같은 보살들이 이 회상에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잘하였도다, 금강장이여. 이 법을 통쾌하게 말하였도다. 우리들은 다 같이 이름이 금강장이며, - 모두 부처님의 신력으로써 이 모임에 와서 당신을 위하여 증명합니다. 우리들이 지금 이 세계에 들어온 것처럼 시방의 모든 세계에서도 다 이와 같이 가서 증명하나니. [爾時에 復以佛神力故로 十方各十億佛刹微塵數世界外에 有十億佛刹微塵數菩薩이 而來此會하야 作如是言하사대, 善哉善哉라 金剛藏이여 快說此法이로다 我等도 悉亦同名金剛藏이요 - , 悉以佛神力으로 而來此會하야 爲汝作證하노니 如我等이 今者에 入此世界하야 如是十方一切世界도 悉亦如是하야 而往作證이로라]“이 지에 머물러선 삼계왕[대자재천왕] 되어 삼승의 모든 법문 연설도 하고 잠깐 동안 한량없는 삼매 얻으며 부처님을 뵈옴도 이와 같더라.[住此多作三界王하야 善能演說三乘法하며 無量三昧一念得하고 所見諸佛亦如是로다]이 지 공덕 지금 대강 말했거니와 전부를 말하자면 끝이 없나니[此地我今已略說호니 若欲廣說?
琅?戮繭?시방 국토 부수어 티끌 된 것은 한 생각에 그 수효 알 수 있고 털끝으로 허공 재어 안다 하여도 이 공덕은 억겁 동안 말로 못 다해[十方國土碎爲塵이라도 可於一念知其數며 毫末度空可知量이어니와 億劫說此不可盡이로다]”십지의 완성은 법운지에 있다. 법운法雲이란 청량 스님은 『십지경론十地經論』을 인용하여 “큰 법신을 얻어 자재한 능력을 구족하였으므로 법운지法雲地라 한다[得大法身의 具足自在故로 名法雲地니라]”고 하였으니 ‘법의 그릇[法器]을 완성하였다’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화엄의 중심사상은 공덕성불功德成佛이요, 만행성불萬行成佛이다. 이런 사상은 한국불교의 특징인 통불교적인 경향과 맞물려 우리의 신앙이 되어 왔다. 그 마지막 부분에 시방에서 불보살이 오셔서 이구동성으로 이를 ‘통쾌하게 말하였도다’라고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게송은 80화엄의 끝부분인 입법계품入法界品의 총결송과 많이 닮아 있다. 그래서 불공의식의 마지막에 회향송으로 설해져 왔다.
“세계 티끌 같은 마음 헤아려 알고 큰 바다 물이라도 마셔 다하고 허공을 측량하고 바람을 얽어 매어도 부처님의 공덕은 말로 다 할 수 없네[刹塵心念可數知하고 大海中水可飮盡하며 虛空可量風可繫라도 無能盡說佛功德이로다]”불법의 오묘함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십지법문의 서두에 “허공에 날아가는 새의 발자국 말할 수도 보일 수도 없다[如空中鳥跡을 難說難可示하야]”라 한 적이 있다. 그래서 지금 ‘이 공덕은 억겁 동안 말로 하여도 다할 수 없다’고 결론맺고 있다.
부존분별견不存分別見이면
불도자연성佛道自然成하리라
여기서 중국화엄의 대가大家이신 청량국사淸凉國師(738-839)의 깨달음의 노래[悟道頌]를 살펴보자.
“진여본성을 알고자 하거든 모름지기 망령된 집착을 버려야 하리니 분별하는 마음이 있으면 생사의 길이요 망념이 없으면 열반의 성이로다. 번뇌의 주인이 누구냐 깨달음도 오히려 이름을 빌린 것이니 분별의 견해를 두지 않는다면 불도는 자연히 성취되리라[欲知眞如性인댄 須遣妄執情이니 有心生死路요 無念涅槃城이로다 煩惱誰爲主아 菩提尙假名이어니 不存分別見이면 佛道自然成하리라]”
평생을 화엄학 연구와 홍포에 뜻을 두었던 국사는 101세를 사신 큰스님이셨다. 계율이 엄정하기[十誓堅固]로 유명하였던 스님이어서 더욱 후세의 모범이 되었다. 화엄에 대한 연구성과는 최고봉이라는 명성을 가진 국사의 오도송인지라 더욱 새롭기만 하다. “분별심을 두지 않으면 불도는 자연히 이루어진다”고 한 말씀을 기억해두자.
금일일난풍화今日日暖風和하니
나라리 니라라로다
나의 노사이신 경봉 선사는 일상법문을 통해 자주 화엄을 말씀하시곤 했다. 노년에 허리를 다쳐 누워서 지내시는 스님께 어떤 수좌가 법문을 청하였다. “스님 한 말씀 일러 주십시오.” “아야 아야 하니 아야가 아니로다. 그럼 이뭣꼬? 초명螟이 방귀로다.” “지금 많이 편찮으십니까?” “여시여시如是如是 하니라” 그리고는 법회에 휠체어를 타고 법문하러 가셔서,“금일일난풍화今日日暖風和하니 나라리 니라라로다. 태평가太平歌 불러 보-세 태평가 불러 보 - 세 악. 내가 어제 설사병이 나서 온 방에 똥칠을 해놓았다. 그래도 시자는 향기가 난다고 하는구나. 나는 법상에 앉아서 태평가 부르고 -.”
이렇게 깨달음의 소식을 전하던 도인들의 세계는 이렇게 미추美醜가 따로 없으니 곧 불구부정不垢不淨의 무애법문無法門인 것이리라.(초명이는 모기의 눈썹에 사는 벌레 이름이라고 하셨다)시절은 겨울로 향해 쉼없이 가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화엄의 게송이나 그 사이사이마다 인용한 큰스님들의 깨달음의 노래를 오늘 다시 되새기면서 그 분들이 다니시던 옛 길을 걸어보았다. 그런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 길을 왜 낯설어 하는지 모를 일이다. 책이나 어록 속의 길이 아니라 우리가 가야할 길은 바로 이 한 길밖에 없을 텐데 말이다. 세상이 아무리 변하여도 수행을 하는 우리들의 길은 변할 수가 없으리라.
그동안 산책길에서 만난 해인법우들과 행복한 시간 듬뿍 가졌었다. ‘화엄경 게송산책’의 연재連載를 마치면서 이번 동안거를 맞아 이런 게송을 되뇌어 본다.
“숨어 살면서 무엇을 구하려는가[隱居復何求] 말없는 가운데 깨달음으로 향한 마음 커간다네[無言道心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