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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화 그늘을 건너가는 인욕과忍辱과 불방일不放逸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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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문태준 2000년 12월 226호
얼마 전 선보인 한 물리학자의 책이 화제가 되고 있다. 게리 주커브가 쓴 『영혼의 의자』라는 책. 이 저자는 과학철학서 『춤추는 물리』로 1979년 ‘아메리칸 북 어워드 인 사이언스’를 수상하기도 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인간 존재의 궁극적 목적은 단순히 물질을 소비하는 인간을 뛰어넘어 ‘진화된 인간’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설파한다. 그렇다면 ‘진화된 인간’이란 무엇일까? 주커브를 빌리자면 ‘진화된 인간’은 금수적 본능을 능가하는 겸손과 관용과 사랑, 그리고 생명에 가치를 둔 인간형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과학주의자인 그가 ‘오감을 가진 인간’을 ‘진화된 인간’의 모습으로 옮겨갈 수 있는 힘을 합리적 이성 같은 데서 찾지 않고 감성과 직관, 명상 같은 것, 이른바 정신적 수양에 할애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리학자 주커브의 주장은 심성의 수양을 중시하는 동양적 사유에 비견하자면 그리 새로운 발견은 아니다. 문제는 과학주의를 맹신하는 서구 세계가 동양세계의 정신주의에 대해 깊이 매혹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조가 큰 흐름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에, 지금 우리나라는 온통 IT(정보기술) 붐이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정보기술의 잠식은 과히 놀라운 지경이다. 전자결재, 전자책, 전자우편, 이메일 뉴스 등등. 시간과 공간의 벽을 허물어 버리면서 온갖 정보들이 게릴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른바 컴맹들이라 불리는 또다른 집단군은 불과 수년만에 발 딛고 있는 이 세상이 살아가기 그지없이 불편하고 어려운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이런 정보화 사회의 그늘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컴퓨터 중독증이 새로운 사회문제가 되고 있고, 쓸데없는 정보가 넘실거려 마치 음식물 쓰레기 처리를 두고 고민하는 신세로 인간을 피곤하게 만들고 있다. 누군가는 정보화 재앙을 환경론적인 시각에서 ‘데이터 스모그’라고 불렀다고 한다. 사실 이런 정보 폭증은 인간들을 편리하게 하는 척하지만, 인간의 정신적 삶에 치명적인 위해危害요소가 될 수 있다. 몇 가지만 들자면, 정보화의 허점은 거짓나부랭이 전문가를 대량 양산할 수 있다는 것, 인간에게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반성적 사유를 강탈한다는 것, 늘 업그레이드된 정보를 갈구하게 함으로써 존재의 결핍증을 끊임없이 강요한다는 점 등이다.
구차하게 서론을 중언 부언하는 이유는 요즘 우리 사회가 불교를 포함한 동양적 사유를 구태의연한 것으로 착각하면서 서구 사상과 서구화 흐름에 지나치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욕의 시대, 속도의 시대라는 사회적 징후를 전제로 할 때 불교적인 사유는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강조되고 확산되어야 마땅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정보화에 의한 자기불안은 결국 자신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포기하는 일이다. 스스로의 존엄한 가치를 폐기하는 이러한 경향은 집단 전염으로 확산될 경우 타자에게 익명을 가장한 폭력을 행사하도록 함으로써 사회불안을 촉발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은 일생을 통해 끊임없이 환상과 중독에 빠지기도 하고, 외적인 힘을 추구하면서 세상의 욕심만을 채우기에 바쁜 나날들을 보내기도 한다. 사랑은 사랑으로 미움은 미움으로 되돌아오는 인과의 빚은 인간을 고독감 속에 빠뜨리고 만다. 게다가 소비사회, 정보화라는 급변하는 세태는 가치판단에 대한 인간의 분별력을 흐릿하게 만든다. 마음의 중심자리는 그래서 한없이 흔들린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어떤 처방을 내놓고 있는가? 불교에서는 중심이 흔들리는 데에는 인욕忍辱만한 양약이 없다고 말한다.
“인욕은 수미산과 같다(월등삼매경月燈三昧經)”. “사문으로서 현명한 사람은 인욕을 제일로 알아, 마땅히 맑은 물의 잡스러움이 없는 것 같아야 한다. 물은 죽은 사람, 죽은 개, 죽은 뱀, 똥오줌을 다 씻어 내거니와, 그러면서도 물의 맑은 성질은 파괴되는 일이 없다(견의경堅意經)”. 인욕은 공덕의 곳집임을 알아야 한다.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는 인욕의 열 가지 작용을 설하고 있다. 첫째는 아(我-불변하는 주체로서의 자기)와 아소(我所-내것이라는 관념)의 공空함을 관찰하는 것. 둘째는 종성(種性-가족,성,혈통,가문)을 생각지 않는 것. 셋째는 교만을 제거하는 것. 넷째는 남이 악한 일을 해 와도 보복하지 않는 것. 다섯째는 무상한 모습을 관찰하는 것. 여섯째는 자비를 닦는 것. 일곱째는 마음이 방일放逸하지 않는 것. 여덟째는 기갈(飢), 고락(苦樂) 등의 일에 마음이 영향받지 않는 것. 아홉째는 노여움을 끊는 것. 열째는 지혜를 수행하는 것 등이다.
그런데 이런 인욕은 끊임없이 정진하지 않으면 사상누각이다. 큰 바다도 한 사람이 말(斗)을 헤아리며 무한한 시일이 지나도록 그치지 않는다면 그 밑바닥을 본다고 했다. 하물며 사람이 지극한 마음으로 가르침을 구하며 정진한다면 무슨 구함인들 얻지 못할 것이며 무슨 서원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잡아함경雜阿含經》을 빌리자면 모든 집이나 공회당은 마룻대로 으뜸을 삼고, 모든 선법善法에서는 불방일不放逸이 그 근본이 된다고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인간이 악취에 떨어지는 일도 방일에서 생겨난다고 경계하고 있다.
온 세상이 정보화-인터넷 전쟁에 들떠 있다. “한때 연어처럼 귀하고 소중하던 정보가 이제는 감자처럼 흔하고 당연한 것이 되었다”( 데이터 스모그 , 데이비드 솅크 지음). 그런데 정보화 시대의 사람들은 왜 더 쓸쓸하고 외로운가? 정보화 시대의 인간들은 실재와 가상을 혼동하며 새로운 중독증에 시달리고 심약한 존재로 전락하고 있는데, 왜 그러한가? 과학주의의 상징이라는 물리학을 공부하는 외국 학자들은 왜 이 첨단시대에 개별자들의 정신수양을 최고의 덕목으로 강조하고 있는가? 불교적 세계의 웅숭깊은 심연에 이르고자 만행萬行을 마다않는 벽안의 지식인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하는데, 그들은 왜 그러한가?얼마 전 도심 속에 자리한 사찰 선방을 찾은 일이 있다. 냉골의 선방을 찾은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묵상의 세계가 아직도 기억 속에 선연하다. 물욕에 대한 끊임없는 유혹을 인욕으로 끊어내고, 죽비로 등줄기를 후려치며 방일을 경계하는 구도자들의 모습이 선연하다. 마음의 중심자리를 지켜가는 그들의 향기가 아직도 서늘하다. 정보화의 그늘을 건너갈 수 있는 힘은 한없이 자기를 비워냄으로써 중심자리가 흔들리는 것을 다잡는 정신적!
수양에 있다. 오직 진리의 길, 구도의 길을 찾아 떠나는 운수납자雲水衲子 행렬을 주목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