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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사기 당하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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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김사업 2000년 12월 226호
회사원 갑이 있었다. 그는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동료 영석이가 죽도록 미웠다. 영석이만 보았다 하면 뒷골이 당기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갑은 영석이를 피했다. 복도에서 영석이와 우연히 마주칠 때면 얼른 옆사람과 이야기하는 척하며 그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갑은 이렇게 영석이를 피하고 또 피했지만,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이상 어쩔 수 없이 만날 수밖에 없었고, 그럴 때마다 기분은 엉망이 되었다.

어느날 갑은 생각했다 -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이냐?” - . 영석이를 보지 않았을 땐 평화로웠던 마음이 영석이를 보았다 하면 괴로움으로 채워지니 마음고생의 원인은 영석에게 있다고 결론을 맺었다. 괴로움의 원인이 밝혀졌으니 이제는 그 원인을 제거하는 일만 남게 되었다.

다음날부터 갑은 평소보다 훨씬 더 성실하게 일했다. 다툴 일도 사람 좋은 웃음으로 양보하면서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상대를 올렸다.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갑은 이렇게 회사와 동료에게 오랫동안 봉사했다. 주위에선 점차 갑은 꽤 괜찮고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자리를 잡아갔다.

이때쯤 갑은 품어 왔던 싸늘한 의도를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회식 장소 같은 데서 자연스럽게 영석이의 약점과 구린 구석을 부풀려 슬쩍슬쩍 던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회사의 상사와 개인적으로 업무 이야기를 할 때도 똑같은 일을 반복했다. 신임을 얻고 있던 갑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였으니, 가랑비에 옷 젖듯 영석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혹심한 불경기가 찾아왔고 그 회사도 감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눈물을 훔치며 회사를 떠난 사람 중에는 영석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갑의 치밀하며 끈질긴 의도 그대로였다. 영석이가 회사를 떠나던 날, 갑은 너무도 기뻤다. 앓던 이가 쑥 빠진 듯 날 것만 같았다. 내일부터는 영석이를 볼까 노심초사할 필요도 없이 마음 편하게 회사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퇴근 후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아까웠다.

퇴근 후 혼자 술집에 들른 갑은 기분좋게 취했다. 그날 따라 술맛이 그저그만이었다. 노래도 서너 곡 불렀다. 그러다가 저 건너편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젊은이에게 시선이 갔다. 젊은이는 세상의 고뇌를 다 짊어진 듯 얼굴을 찌푸리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갑은 자기 술병을 들고 그 젊은이에게로 갔다. 술을 한 잔 따라 주면서 젊은이에게 말했다. “젊은이, 너무 괴로워 말게. 세상은 살 만한 곳이야!”다음날 갑은 휘파람을 불면서 회사에 나갔다. 그 다음날도 즐거운 하루였다. 매일이 즐거운 가운데 갑은 사람 미워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은 적어도 자신에게서만큼은 끝난 줄 알았다. 한데 웬걸, 일년 반이 지나자 영석이만큼 미운 놈이 회사에 또 한 사람 생겨났다. 괴로움은 또다시 시작되었고…….

일이 이 지경이 되자 갑은 이제까지 살던 서울은 희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지방으로 근무지를 옮겨 달라고 회사에 요청했고, 그의 청은 받아 들여졌다. 갑의 기대대로 환경이 바뀐 지방에서는 미운 놈도 없었고 살 만했다. 초면인 사람들은 누구라도 갑에게 싹싹했고 갑도 친절히 대했다. 그러나 그 생활도 오래 가지 않았다. 그곳에서도 순차적으로 미운 사람이 생겨나 갑을 괴롭혔던 것이다.

허탈해 하던 갑은 큰 결심을 했다. 한국을 떠나 희망과 꿈의 나라 미국으로 전근 가기로 했다. 전근은 갔지만 살아보니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갑은 그렇게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며 미워하고 복수하면서 예순 살 가까이까지 회사생활을 했다. 퇴임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생로병사의 그림자는 예외 없이 갑에게도 찾아왔다. 갑이 죽음에 이르는 중병에 걸린 것이었다.

생을 마감하게 된 시점에서 비로소 갑은 자신의 일생을 차근히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회고해 보니 회사생활 내내 사람을 미워하며 살아온 자신이었다. 아니 사람을 미워하기 시작한 것은 입사 훨씬 이전 철들면서부터였다. 그러니 일생 대부분을 미워하고 앙갚음하며 산 셈이었다. 처음부터 다시 산다면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후회했지만, 업보의 끈은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 몇 십년 전 젊은이에게 술 한 잔을 권하며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 큰소리치던 그도 후회하며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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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갑은 누구인가. 정치인? 부도덕한 경제인? 옆집 아저씨? 아니다. 갑은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우리들 대부분도 갑과 같이 살다가 간다. 갑처럼 후회하며 세상을 하직하기 싫거든 지금이라도 갑을 통해서 나의 모습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갑은 일생을 통해 수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서울에서, 지방에서, 미국에서 각양각색의 사람을 만났고 여러 가지 음식을 맛보았다. 신문에 실리는 기사만큼 다양한 경험을 한 그였지만 그의 생애 내내 변하지 않았던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 자신의 미워하는 마음이었다. 미움의 대상은 바뀌어 갔지만 미워하는 그의 마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대로였던 것이다.

혹자는 말할 지 모른다. 미워할 만한 사람이니까 미워한다고. 그러나 잠깐, 왜 그 사람을 미워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내 자신의 이익과 시기심 때문에, 내 자신의 권위 때문에, 나보다 못하다고 미워하지는 않았는지. 내 마음 속의 이러한 요인을 다 빼고도 여전히 미운 놈으로 남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위 이야기에서 드러났듯이, 미움으로부터의 해탈, 미움으로부터의 자유는 미운 놈을 하나하나 제거하는 데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내 마음 속에서 미움이 녹아 떨어질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미움이 이러하다면 다른 번뇌도 마찬가지다. 내 속의 모든 번뇌가 흔적 없이 사라진 그 자리가 해탈이요 열반이다. 따라서 해탈과 열반의 길은 남이 아닌 내가 변하는 데서 열리기 시작한다. 내가 변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갑처럼 문제의 원인을 바깥에서만 찾고 있다. 우리 스스로에게 엄청 사기 당하고 있는 것이다. 너와 나는 번뇌의 원인이 자기 바깥에 있다고 은연 중에 생각하고 바깥의 원인 제거에 전생애를 소모하며 살아간다. 자신은 변하려고 하지 않고 남만, 세상만 본인 입맛대로 변화시키려 하다가 한 번뿐인 삶을 마감한다.

남에게 당하는 사기는 눈치도 잘 채고 사기 당했다는 것이 판명나면 그렇게 억울해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자신에게 당하는 사기에 대해서는 둔감할 뿐이다. 2500여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도 이 점을 심히 염려하셨다.

녹야원에서 첫 설법을 마친 석가모니는 바라나시를 떠나 왕사성으로 향했다. 도중 어느 나무 아래에서 삼매에 들어 있을 때 인근의 상류층 청년 서른 명이 그 숲으로 놀이를 나왔다. 저마다 아내를 데리고 왔는데, 한 사람은 독신자여서 기생을 데리고 왔다. 다들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에 그 기생은 여러 사람의 옷가지와 패물 등을 가지고 도망쳐 버렸다.

청년들은 허둥지둥 그 뒤를 쫓다가 부처님이 좌선하고 있는 장소에 이르러 부처님께 물었다. “한 여자가 지나가는 것을 혹시 보지 못하셨습니까?” 부처님은 청년들을 돌아보며 말씀하셨다. “젊은이들이여, 여자를 찾는 것과 자기 자신을 찾는 것, 그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 “물론 참다운 자기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렇게 해서 서른 명의 청년은 부처님께 예배하고 그 자리에 앉았다. 설법을 듣고는 모두 즉석에서 출가했다.

달아난 기생만 쫓는 것은 미운 놈만 없애고자 하는 것이며, 참다운 자기를 찾는다는 것은 내 속의 번뇌를 살펴서 스스로 변하고자 하는 것이다. 달아난 기생만 쫓고자 한다면 길을 거꾸로 가는 것이니 스스로에게 사기 당하는 꼴이다.

내 속의 번뇌가 내 몸과 마음을 쉴새없이 갉아먹고 있고 남은 생은 시시각각 줄어들고 있다. 한데도 계속 자신에게 사기 당하고만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