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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앙의 형태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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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언 - 김용환 1987년 09월 67호
얼마 전에 경주 남산에 오른 적이 있다. 삼릉계의 계곡을 타고 올라가면 주위로 많은 신라시대의 불보살상(佛菩薩像)들을 배견(拜見)할 수 있는데, 그 중에 보물 666호로 지정되어 있는 선각마애여래불상(線刻磨崖如來佛像) 앞에 이르게 되었다.
그곳에는 아주머니 몇분이 이미 와 예불을 드리고 있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불상에다 소주를 끼얹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그 아주머니에게 “부처님 계율 가운데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바로 그 부처님에게 술을 부을 수가 있는가?”라는 말을 하였다. 아주머니의 대답이 “이 할배는 술을 좋아하신다. 나도 다른 절에 갈 때는 술을 가져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 할배는 옛날부터 술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 곳에 올 때에는 반드시 술을 가져온다”고 하며, 그러니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듯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 말이 있은 후 그 아주머니들은 곧 하산해 버려 좀더 자세히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갖지 못했지만, 그 때 그 일이 한국에서의 불교신앙 형태에 관하여 개인적으로 좀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선각마애불은 신라시대의 석조(石造) 불상 가운데에서 특이한 형태를 취한 수작(秀作)인데, 전부 여섯 구의 불보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뒤쪽의 암벽에는 석가여래 삼존도가 앞쪽에는 아미타여래 내영도(阿彌陀如來來迎圖)가 선각으로 새겨져 있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들의 신앙세계 속에서는 이 불상들이 이미 석가모니불도 아미타불도 아니며 다만 술을 즐겨하시는 할배(산신 할배?)로 인식되어 있었다. 비단 그 아주머니들에게만 그렇겠는가. 그것은 결코 어떤 원론적인 불교의 교리나 이론을 가지고 전적으로 부정될 수 없는 그 나름의 확고한 생명과 오랜 전통을 가진 것으로 보였으니 말이다.
경북 비안면 자락동 망해산에 석불사(石佛寺)라는 조그마한 절이 있다. 이 절의 법당은 천연의 동굴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속에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약사여래석조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절의 신도들은 대개가 주변의 농촌 지역의 사람들인데, 절이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산위에 있고, 또 평소에는 농사 일이 바쁜 관계로 절을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해마다 그믐, 정월, 초파일, 칠월칠석과 같은 때면 빠짐없이 절에 찾아 오곤 하며, 그 때는 거의 한결같이 돈 삼천원에 쌀 한 되를 가지고 온다고 한다.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사동리에 안심사(安心寺)라는 고찰이 있다. 신라혜공왕(惠恭王) 11년(서기 775년)에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절인데 현재는 이조시대에 건축된 대웅전이 보물 66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비구니 스님 몇분이 수행하고 있다.
이 절은 부근에 청주와 조치원 등의 도시가 있기는 하나 전형적인 농촌 사원이라 할 수 있다. 이 절의 오랜 역사가 말하듯 선조(先祖) 대대로 이 절과 인연을 맺어 온 단신도(檀信徒)들이 많은데 주로 인근의 농민들이다. 이들은 대개 일년에 한번은 반드시 절에 오는데, 그 때가 곧 음력 정월로, 집에서 농사지은 쌀 한말과 사과, 밤, 대추, 곶감 등의 삼과질(三果實), 그리고 미역 따위를 가지고 와서, 그것으로 자신들이 직접 밥을 지어 불단에 공양을 올리고 예불을 드린다고 한다. 정월에 이들로부터 들어오는 쌀이 여섯 가마 정도가 된다고 한다.
또 이 절에는 도광(道光) 24년(서기 1845년)에 제작된 다라니목판(陀羅尼木板)이 하나 있다. 이 다라니목판은 신도들 집에 초상이 났을 때, 종이에 대량으로 찍어다가 관의 빈틈을 메우는 데 사용한다고 하는데, 그 동안 사용을 많이한 탓인지 마모가 심하여 글자의 판독이 어려울 정도이다. 이것은 이들 신도들의 장례의례(葬禮儀禮)에서 불교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해 왔었는지를 잘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위의 몇 가지 실례를 통해 다음과 같은 점들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절을 민속명절 따위를 중심으로 한해에 몇 차례정도 찾는, 이와 같은 풍습 또는 신앙 형태가 역사적으로는 적어도 이조시대 이래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지속되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로, 이와 같은 신앙형태는 위에 보기를 든 몇몇 절뿐만 아니라, 상당히 많은 수의 한국 사원에서, 특히 농촌 사원들에서 쉽사리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세째로, 한국 불교도의 상당수가 이와 같은 신앙형태 속에서 불교도로서의 자기의 아이덴티티(同質性)를 발견하고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불교의 기본적인 교리나 철학에 대한 이해가 부재(不在)함은 말할 것도 없고, 불교적인 실천으로서의 선(禪)이라든지 경전의 수지독송(受持讀誦)이며 염불 같은 것을 소홀히 하거나 아예 생략하고 있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므로 절을 찾는 것은 지극히 오래된 생활습속의 일부일 뿐으로 주술적(呪術的)이며 기복적(祈福的)인 성향이 강하다.
네째로, 오늘날 한국불교의 문제점과 그 과제를 바르게 진단하고 그 나아갈 방향을 정확하게 모색하기 위해서는, 그 기초적인 작업의 일환으로서, 이와 같은 불교의 전통적인 신앙형태에 대한 광범위한 자료 조사와 분석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결론을 끄집어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문적으로 불교민속학 및 불교사회학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속속 등장할 것이 요망되며, 교단 내부에 있어서의 자체 조사도 필요하다.
다섯째로, 또 다를 측면에서의 이 방면의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터이니, 곧, 요즘 흔히 논의되고 있는 민중사관(民衆史觀)의 입장에서 한국의 불교사를 서술하기 위해서도 이들 자료의 수집이 필수적이라 할 것이다.
이상의 몇 가지 과제들이 현대 한국의 불교도들 사이에서 깊이있게 검토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으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참다운 불교도의 영원한 과제인 정법(正法)의 수호와 실천의 측면이며, 다른 하나는 불교 외적(外的)인 변화에 기인하는 것이다.
6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급속한 공업화 및 산업화로 말미암아 전통적 사회구조가 무너지고 도시 집중화됨은 농촌인구의 급격한 감소와 노령화(老齡化)를 재촉하였으니 이것은 곧 전통적인 농촌 불교도의 감소와 노령화를 의미한다.
또 한편으로는 현대 한국불교가 이조시대 유교로부터 탄압을 받아오던 탓으로 지금에 와서는 극단적이고 배타적인 교리를 가진 외래 총교인 기독교로부터 강력한 도전을 받는 처치에 놓이게 되었다. 이조시대에는 그래도 불교가 비록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았을지라도,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삼국시대 이래로 여전히 우리나라의 민족종교로서 흔들림없는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오히려 외래 종교의 위세에 눌려 민족종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제 한국불교는 더 이상 전근대적이고 구태의연한 전통적 신앙 형태에 안주하고 있을 수 없다. 앞에서 말한 당면 과제들을 두고 진지하고 적극적인 태도로 해결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불교 내적인 필연성과 역사적인 전환기에 놓여 있음을 뼈저리게 각성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