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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불교희곡 소고 - 하 - 해방후에서 현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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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 김미미 1987년 09월 67호
해방후에서 현재까지

해방을 기해 우리의 연극계는 일대 전기를 맞게 된다. 검열, 통제, 억압 등의 우울한 단어들로 점철된 일제의 식민문화정책에서 벗어나 바야흐로 활발하고도 자유로운 활동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그 열기를 반영하는 단적인 예로 해방 직후인 1946년 한해 동안 무려 20여편에 달하는 희곡이 발표되는데, 이는 ‘45년에는 송 영(宋影)의 ‘황혼’이 유일한 작품이었고, ‘44년에 2편, ‘43년에 3편이 나온 것에 비교할 때 엄청난 양적 변화였다. 그때에 발표된 희곡 중 상당수가 일제하의 독립투쟁이나 민족적 동질성을 주제로 한 것이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함 세덕(咸世德)의 ‘기미년 삼월 일일’(개벽), 김 남천(金南天)의 ‘3.1운동’(신천지), 박 영호(朴英鎬)의 ‘겨레’(신세대), 이 춘택(李春澤)의 ‘만주의 독립군’ (신생불교), 김사량(金史良)의 ‘봇뜰의 군복’, 박 경창(朴景昌)의 ‘단결’ (예술타임스) 등이 있다. 이는 일제치하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로 해방 후 급격히 늘어난 극단과 함께 왕성한 활동을 펴나갔다.
이런 열기는 민족간의 참상을 빚은 6.2’와 전후의 궁핍한 사정으로 인해 한동안 제동이 걸리기도 했지만, 50년대 중반부터 다시 회복기에 들어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고도성장의 붐을 타고 연극계가 유래없는 호황(?)을 누리던 70년대 중반에는 ’75년에 37편, ’76년에 49편, ’77년에 60편, ’78년에 43편(번역 희곡 제외)이라는 경이적인 창작 희곡의 전성기를 누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런 풍부한 창작 희곡의 생산이 실제 공연으로는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 예로 당시 매년 백여편이 넘는 연극 공연 중 대부분이라 할 수 있는 80%이상이 서구의 번역물이었다는 기록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창작 희곡 자체가 가지는 문제점, 즉 성숙하지 못한 문학성 및 실제로 무대화했을 때 오는 여러 불합리한 공연 가능 인소 등을 꼽는다. 여기에 일반의 서구문화 선호도까지 가세해 위세를 떨쳤으니, 창작 희곡은 자연 그 문학적 성과 정도로나 자족하고 공연은 별개의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때를 기다리기나 한 듯 홍수처럼 밀려든 서구의 온갖 사조는 무방비 상태인 우리의 극계를 선진문화라는 미명하에 마음껏 유린했다. 이제 서구는 우리가 본받고 따라가야 할 영원한 이상이었으며, 상대적으로 낡은 구시대의 유습은 한시바삐 정리하고 고쳐가야 할 초라한 것이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 밑에서는 전통사상에 근간을 둔 불교연극이 제 위상을 찾지 못하고, 지지부진 그 명맥조차 잇지 못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리라. 한술 더 떠 해방뒤로 본격화된 비구와 대처승 사이의 종권 다툼은 그 여력을 문화 예술에까지 돌릴 만큼 한가로운 처지가 못되었다. 해방 전에 그나마 간간이 발표되던 불교 희곡은 해방과 더불어 그야말로 가물에 콩나듯이 되어버렸으니, 해방 뒤부터 70년대 중반까지 발표된 불교 희곡이 겨우 예닐곱편에 그치고 마는 사실이 그를 여실히 드러낸다.
여기에서 유독 70년대 중반이라는 연대적 획을 그은 것은 70년대 이후, 특히 80년대에 들어와 구체화되기 시작한 민족적 각성의 움직임들을 새로운 차원에서 소중히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부 젊은 학생층과 재야 연극인을 중심으로하여 일기 시작한 전통성 회복, 즉 주체성 회복에의 열망은 일련의 사회운동과 더불어 외세 종속 및 식민문화 이식을 거부하는 치열한 투쟁으로까지 확대되어 갔다.
그 구체적 방법의 일환으로 나타난 것이 현대극 속에 전통극의 요소를 도입하거나,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들의 재명가 작업을 통한 현실과의 접목을 시도하는 것 등이었다. 오태석의 ‘쇠뚝이 놀이’, 윤 대성의 ‘노비문서’ 등이 이 계열의 효시에 속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80년대에 이르러 종래의 단순한 마당극에서부터 그보다 대중화를 선언하고 나선 민중극의 형태에로 가속화되어 간다.
이와 함께 비록 주도적이진 못했어도, 그리고 미약하긴했지만 불교연극에도 새로운 각성의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본고에서는 해방 후 불교희곡의 양상을 일단 70년대 초반까지 한 묶음을 짓고, 70년대 중반에서 현재에 이르는 다분히 진행일로의 과정을 다시 한 단락으로 나누어 주로 잡지등 지상을 통해 발표된 희곡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해방후 최초로 불교잡지에 실린 희곡은 이 춘택의 혁명극 ‘만주의 독립군’ (1946, 신생불교)이었다. 주인공 김 인식을 중심으로 만주 봉천 일대에서의 독립군의 활약상을 생감있게 그린 이 극은 신파극이나 무성영화에서처럼 변사가 등장하는 점이 흥미롭다. 주로 신출귀몰하는 독립군의 영웅적 애국심에 촛점을 둔 이 극을 딱히 불교연극이라고 보기에는 다소간의 무리가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구국의 과제 앞에 불교는 항시 선봉장의 노릇을 해왔었던 점을 미루어, 당시 해방 후 창간된 문자 그대로 신생불교지에 과감히 혁명극을 게재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후대의 불교연극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그 후 한 숙희(韓淑姬)의 희곡 ‘눈먼 왕자’ (1957, 녹원)와 박 희진(朴喜璡) 작 ‘아난존자와 프라크리티’ (1967, 현대문학)가 십년을 간격으로 발표되었다. 이 두 희곡은 인도를 무대로 하는 불교 설화에 근거한 것으로 특히 아난존자와 프라크리티(마등가)의 이야기는 매우 연극성이 짙어 연극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기행적 삶과 불교적 업적으로 인해 세인의 관심을 끄는 원효의 생애를 조명한 김 홍우 작 ‘원효대사’ (1970, 법시)가 희곡화되었다. 원효와 요석공주와의 운명적 결합에 주로 촛점을 맞춘 이극은 자칫 낭만으로 경도되기 쉬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다양한 신분의 인물들을 통해 원효의 깊은 사상을 엿보게 한다. 그밖에 이 시기에 발표된 희곡으로 동국대학교 학생스님들의 학보를 통해 발표된 김 인묵(金仁默)작 ‘표류선들의 향연’ (1970, 석림)과 남 은 작 ‘묘지부근’ (1971, 석림)이 있다. 전자가 현대인의 도덕적 타락, 사랑의 부재와 좌절, 근친 살해, 가출 등 삶의 위상과 허무를 정면으로 파헤친 것이라면, 후자는 그것이 저주에서 비롯됐건 막연한 희망이건 간에 목적을 잃은 삶의 허망한 종말을 그리고 있다. 대개가 인간성 상실에서 오는 감상적 허무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채 파멸하는 자세로 일관한다는 묘한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7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불교희곡은 도처에서 다양한 새로운 시도를 보인다. 일각에서는 여전히 설법체의 지루한 교리극이 위엄스레 버티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의 사상성과 예술적 표현과의 만남을 추구하는 일군의 움직임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후자 계열의 작품으로 최 인훈 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1979, 최인훈 전집10), 노 경식 작 ‘탑’ (1980, 제3회 대한민국 연극제 희곡집), 김 정률 작‘터’ (1982, 한국연극), 김 상렬 작 ‘님의 침묵’ (1984, 우리극단 ‘마당’)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의 특징은 모두 공연화되었다는 점과, 공연의 성과면에서도 비교적 성공적인 작품이었다는 데 있다. 그리고 대개가 극중에 스님이 등장하거나 혹은 불교정신이 중심이되어 극을 풀어감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인 설교나 파장을 최대한 배제시키면서, 탄탄한 극적 구성과 예술적 표현으로 참신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특히 만해 한용운 선사의 일대기를 그런 뮤지컬 ‘님의 침묵’은, 일제 하에서 치열한 투쟁을 벌였던 만해의 조국애롤 선명하게 부각시킨 최초의 불교 뮤지컬로 유 승엽에 의해 작곡된 총28곡의 걸고 짧은 삽입곡이 들어 있다.

이처럼 연기적 불교관, 인과의 세계를 기저로 하면서 전통과의 혹은 역사와의 새로운 만남을 시도한 작품들 외에, 80년대의 또 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승려로서 그리고 시인으로서 불교회곡을 내놓은 박 진관의 ‘선객’ (1982, 월간불교)을 들 수 있다. ‘선객’은 중국 백장(百文)선사의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정신을 근거로 하여 본격적 노동선을 주장하면서 민중과 불교의 접합을 꾀하고 있다. 실제로 무대화되어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았던 이 작품은 공연의 성패나 문학성의 논란에 앞서 더 이상 산사에서 침묵하기를 거부한 민중불교운동의 일환으로, 새로운 연극적 지평을 열었다는 데에서 더욱 그 의의가 크다.
이밖에 이 시기의 불교희곡 중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부지런히 발표된 아동극의 대본이다. 부처님의 본생담과 기타 여러 경전에서 얻은 흥미로운 이야기, 거기에 우리의 불교전래 설화 등도 곁들어 다채로운 소재로 동극을 통한 포교에 많은 성과를 얻고 있다. 특히 불교 동극집 ‘대웅전의 하얀까치’, ‘수레 끄는 사슴들’ 등 많은 동극을 발표한 작가 곽영석은 불모지대나 다름없는 불교아동극계에서 정력적인 창작활동으로 외롭게 고투하고 있다.
이상 열거한 경향들 외에도 80년대 이후 두드러진 불교연극으로 각 대학의 불교 서클을 중심으로 시도되어진 마당극 및 재판놀이를 들 수 있다. 아직 질적, 양적인 열세로 다양한 문화의 요구나 예술적 차원의 극복을 과제로 안고있는 이 두 극총(劇鍾)에 대한 보다 다각적인 검토는 다음호 ‘불교 공연 예술 실태’편을 빌어 좀더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미루어 둔다. 전통극의 연행적 특질을 토대로 통렬한 시대 풍자와, 종교적 탄압 실례 등 현실을 적나라하게 대변하여 엮어낸 이들이 그 구조적 특성이 가지는 가변적 요인 (즉 일회성, 집단성, 즉흥성 등)과 정책적인 문제로 인해 희곡화되어 보급되지 못하는 점 등이 시대적 아쉬움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