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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식의 사회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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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신준식 1987년 09월 67호
종교가 현실 인식에서 중요한 준거(準據)의 틀이 되고 있고 기존 질서의 정당성 부여에 중요한 영향을 주고 있는 만큼, 종교에 대한 관심은 바로 현실적이고 중요한 관심인 것이다. 여기서는 백중(白衆)이라는 종교적 의식을 간략하게 살펴봄으로써 종교의식의 사회적 의미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음력 7월 15일은 백종이라고 한다. 보통 일반에서는 이 날을 백종(百種)이라고하여, 백 가지의 새로운 과실을 준비하여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다. 또 불가에서는 같은 이 날을 백중(白衆)이라고 하는데, 이 날을 기해 묵언정진(默言精進)을 하던 스님들이 해제하여 각자가 3개월 동안 공부한 여러 가지의 지식과 체험을 대중 스님에게 사룀으로써 각기 자기 공부를 확실하게 하며 또한 그 동안에 생긴 문제를 서로 이야기하여 해결하는 날로 삼고 있다.
불가에서는 이 백중 날에 지켜지는 의식이 갖는 의미가 지옥에 갇혀 있던 혼백을 부처님께 기도함으로써 천도하여 해방시킨다는 것에 있다. 이 백중에 관련한 구체적인 유례로는 목련존자의 효행에 관한 것으로, 신통력 제일인 목련존자가 자기의 도력으로 돌아가신 어머님을 천도코자 온갖 정성을 다들여 자기 어머님의 영혼을 구제하였다는 데서 비롯된다.
목련존자는 그의 공부가 깊이 그의 천안(天眼)으로 천상·천하를 살펴보다 자기 어머니가 생전에 지은 죄로 아귀지옥(餓鬼地獄)에 태어나서 형언할 수 없는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을 본 목련존자는 너무나 괴로워 부처님 계신 곳으로 급히 가서 자기 어머님을 구제해 주시기를 청하였다. 목련존자의 이같은 간절한 청을 들은 세존께서는 그를 가없게 여겨 말씀하시기를, “너의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 간탐하고 살생하고 삼보를 비방하여 많은 죄를 지은 고로 한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고 시방(十方)에 있는 대중 스님을 청하여 공양을 올리고 그들의 도력을 빌려어야 어머니를 구제할 수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목련존자는 세존의 말씀을 듣고 기뻐서 어찌할 비를 몰랐다. 기뻐하는 목련존자를 보시고 세존께서는 이어 더욱 구체적인 방법을 말씀하셨다. 곧, 7월 15일 ‘우란분(盂蘭盆) 법회’ (백중맞이) 때에 백 가지 과실과 진수성찬을 장만하여 여러 대중 스님에게 공양을 올리면, 그 스님들이 결제 기간에 공부한 도력을 베풀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부모와 이미 세상을 떠난 7대 선망부모(先亡父母)와 6친 권속들을 천도하여 삼계고해(三界苦海)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목련존자는 부처님의 말씀대로 정성을 다하여 준비한 음식으로 대중에게 공양을 올렸고 그 대중 스님들에게 어머니의 구제를 부탁드렸다. 목련존자가 대중스님에게 공양을 올리고 구제를 기원하니 목련존자의 어머니는 일겁이나 더 받아야 할 아귀보(餓鬼報)를 벗어나서 고통없는 화락천(化樂天)에 탄생하여 무량복락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이야기에 연유하여, 음력 7월 15일이 되면 효성이 지극한 많은 불자들이 살아 계신 부모님이나 이미 돌아가신 7대 선망부모를 위하여 구제 천도의 법회를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날의 구제 천도의 의식을 우란분재(盂蘭益齋)라 하며, 이 날에는 특별히 여러 가지 음식을 장만하여 시방에서 여름살림을 마친 대중 스님을 모셔 공양을 올리면서 소원성취되기를 빌었다고 한다. 이렇게 공양을 올리고 소원성취를 빌면 살아 계신 부모는 병고와 액난이 없이 백세 장수를 하게 되며 7대 선망부모는 지옥고초와 아귀보를 벗고 천상이나 인간으로 태어나서 한량없는 복을 누리게 된다는 뜻을 가진 의식인 것이다.
이러한 종교의식 속에서 우리는 인간사회의 이상적인 질서를 확립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곧,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의 하나는 언제나 나타나고 있는 무질서에 직면해서 그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는 어떤 우주적인 질서에 인간의 행위를 일치시키고자 하는 데에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듈깽도 이런 의견을 피력하였다. 곧, 종교의식에서 많은 행동이 이루어지고 여러 지향이 표현되지만, 종교의식의 진정한 존재 이유는 내적이고 도덕적인 재생이며 의식 중에 예배자가 제단에 진정으로 바치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예배자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종교적 의식이 사회의 이상적 질서를 수립하는 데 기여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종교의식 뒤에 숨겨진 실재는 사회의 도덕과 규범이라고 하였다.
종교의식에 관련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와 사회와의 관계를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또한 이에 앞서 인간이 사회에서 어떠한 관계로서 정립되고 있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역사의 주체가 인간이라고 하고 사회의 본질을 인간관계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는 인간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 사회가 다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는, 곧 서로 영향을 미치는 점에서 사회는 하나의 변증법적인 현상인 것이다. 사회는 인간의 산물이다. 사회는 인간의 활동과 의식이 부여한 것을 제외하고서는 다른 어떤 것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인간을 떠나서는 어떤 사회적 실재도 있을 수 없다. 사회와 사회의 모든 구조물들이 만들어지는 ‘재료’는 인간의 활동으로 외재화되는 인간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또한 인간은 사회적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개개인의 생활사는 개인에 선행하고 있으며 또 개인 뒤에도 존속할 것이 분명한 사회의 역사 안에 포함되어 있는 하나의 삽화인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사회는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거기에 있었으며, 또 죽은 후에도 거기에 존재할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이 하나의 인간이 되고 정체(正体)를 획득하고 유지하며 자기의 삶을 이루고 있는 여러 가지 계획을 실행하는 것은, 바로 이 사회 안에서이고 또 사회적인 제 과정의 결과로서이다. 인간은 사회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사회가 인간의 산물이며 또 동시에 인간이 사회의 산물이라는 두 명제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두 명제가 모든 사회 현상에 본질적인 변증법적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
사회가 인간의 산물이듯이 종교도 인간의 문화적 산물이다. 종교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깊이 물어보고 따지는데서 생기는 인간 실존의 사건이며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이다. 곧, 종교는 인간에 대한 물음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인간이 자기 이해와 자기 고찰과 떼어 놓을 수없으며 인간의 문화와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도 없다.
그래서 엘리아데는 종교는 인간 생활과 인간 문화를 이해하고 해석하게 하는 모양과 구조를 주는 것이라 하고 또한 종교는 ‘성(聖) ’의 구조로서 세계를 옳게 보고 세계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기능을 수행하며 ‘속(俗)’의 세계에서 ‘성(聖)’의 국면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성(聖)’의 국면 혹은 종교의 차원은 종교적 상징과 신화들로서 인간 생활과 세계의 원형 및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속세의 인간에게 종교적 차원, 참된 삶의 차원, 질서 잡힌 차원을 형성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삶의 스타일은 종교적인 것이 된다. ‘성’의 세계가 ‘속’의 세계를 뚫고 들어옴으로써, 다시 말해 신화가 인생을 설명해 주고 인간이 종교적 상징과 신화를 그의 세계에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은 참된 생의 의의와 스타일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속’에서 탈출하여 ‘성’을 발견하고 다시 그것을 ‘속’의 세계로 끌어들여 속을 성화(聖化)하는 데서 종교의 역할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곧, 인간이 살고 있는 이 구체적인 세계에다 신성(神聖)의 의미를 투사해서 자신의 세계를 신비의 세계에서 관찰하고 해석함으로써 질적으로 다른 해석을 내리며 좀더 깊은 의미를 부여하는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살고 있는 이 구체적인 세계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의미있는 세계로 만들고 그 기능을 수행하는 데에 바로 진실된 종교의 기능이 있다고 한다.
사회와 인간과의 사이에 변증법적인 현상이 성립하듯이, 종교와 인간 사이에서도 변증법적인 현상이 성립한다. 종교는 인간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 종교가 다시 그것을 만들어낸 사람들에게, 특히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인간을 떠나서는 어떠한 사회적 현상도 있을 수 없고 이 사회가 없이는 어떠한 종교적 실재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포이앨바하도 “인간이 종교의 시작이요 종교의 중심점이며 종교의 끝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종교의 종류에 따라 인간관이 다를 것은 고사하고 현금의 사회가 인간을 대접하지 못하고 있다. 곧, 인간 스스로가 인간을 경시하는 꼴이 되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적 활동이나 성공 그 자체가 목적이 되다시피 하여 인간은 거대한 경제적 기계의 일부분이 된 듯하고, 더욱 고도의 기계화, 분업화 자동화, 합리화를 특색으로 하는 고도의 산업사회가 되면서 그 구조화에서의 인간은, 한낱 원자적이고 기계적인 병존관계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이는 의존관계로서 이윤추구의 도구에 불과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현대사회의 구조적 상황하에서 인간의 삶과 행동의 터가 되어야할 윤리적 가치가 쇠미해지거나 아예 동떨어져 버릴 때 문제는 더 심각해지기 마련이다.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보여지듯이, 삶의 가치가 높은 정신적, 문화적 가치와 관계를 맺지 못할 때 인간은 오직 본능적으로 삶을 사는 동물적인 상태를 벗어날 수가 없다. 인간의 최고목적이 도덕이요 도덕을 촉진하는 것이 종교라고 한 헤겔의 말과 같이, 정신 및 문화적 가치의 근간이 되는 것이 종교이고 보면 종교의 참뜻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베버에 의하면 종교가 우리 인간생활에 비합리성의 필요성을 끼어들게 했다고 한다. 유한한 인간의 눈으로 보면 당장에는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것이 종국적으로는 합리적이 되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현실에서 ‘합리화’라는 개념은 마력적인 것임에는 틀림없다. 합리화라는 것은 분야에 따라 상이한 합리화가 존재할 수가 있고 또 한편에서는 합리적인 것이 다른 편에서는 비합리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종교는 우리 인간들에게 영원을 보도록하고 궁극적인 합리화로 나아가게 지도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이 합리성이라는 구실 하에서 바로 앞만 보는 습성을 버리고 종교적 염원으로 영원을 생각하고 보려 할 때 우리의 삶은 궁극적으로는 합리적인 것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