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제세(濟世)의 성인(聖人) 이 청북 선천 검산 일월봉하 군왕포상 가야동 홍의도(淸北 宣川劒山 日月峰下 君王浦上 伽倻洞 紅衣島)에서 탄생하셨다. 다섯 살 때 신승(神僧)을 따라 중국에 들어갔다. 장성해서는 강계사군지 여연(江界 四郡地 閭延)에 머무르기 다섯해, 황명(皇明)의 세신유족을 거느리게 되었으며 철기 십만으로 동국을 깨끗이할 뜻을 품었다. (‘홍경래난’의 격문 중에서)
제세의 성인은 곧 미륵을 지칭하는 것이라 보인다. 새로운 이상사회 실현의 메시아가 미륵이고 보면, 세상을 건지는 성인이란 미륵임에 틀림이 없다. 더우기 홍의도라는 섬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와 신승을 따라 중국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그가 미륵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미륵은 바다에서 나타나 이상사회 실현을 가능케 한다는 믿음이 미륵신앙자들의 신앙의 주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신승을 등장시킴으로써 그가 미륵임을 확인시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또한 그의 능력이 철기 10만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것으로 그의 초능력을 과장하고 있는 데서도 그것은 확인된다. 미륵은 초월적인 능력으로 평등한 이상 사회를 가져다 준다는 것이 또한 미륵신앙자들의 믿음이기 때문이다. 공초기록을 보면 당시 서북지방의 생하장군(生下將軍)의 전설도이 격문에 반영되고 있다고 여겨지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 난의 추진 주모자들이 정 성인(鄭聖人)을 미륵으로 성격지우려는 면이 강하다고 생각되는 점이다.
호남의 경우는 일찍부터 미륵신앙의 전통이 강한 곳이라고 생각된다. 후삼국시의 견훤도 미륵의 화신임을 강조하고 있었고 거꾸로 후대의 증산교(甑山敎)나 남학(南學), 심지어 원불교(圓佛敎) 등 신흥종교들의 교리가 모두 미륵신앙과 관계가 깊으며, 이들 모두가 호남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도 호남지역은 미륵신앙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곳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같은 호남지역에서, 홍경래난이 있은 지 80년 후가 되는 1892년 8월에 선운사(禪雲寺) 석불비결(石佛秘訣=미륵불 비결) 도난 사건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미륵신앙자들이 어떻게 동학교도로 변모하여 가는지를 알려 주는 사건으로서, 그 전말을 오지영(吳知泳)의 동학사(東學史)에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전라도 무장현 선운사(禪雲寺) 도솔암의 남쪽으로 수십보 되는 곳에 오십여장(丈)이나 되는 층암절벽이 있고, 그 절벽 바위에는 앞쪽으로 큰 불상이 하나 새겨져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그 석불은 거금(距今) 삼천년 전의 금당선사(黔堂禪師)의 진상(眞像)이라고 하며, 그 석불의 배꼽 속에는 신기한 비결(秘訣)이 들어 있다고 하는데, 그 비결이 나오는 날은 한양(漢陽)이 다 된다는 말이 자자하였다 …어느날 손 화중(孫和中)의 접중(接中)에서는 선운사 석불 비결의 이야기가 나왔다…청죽(靑竹) 수백개와 고색(藁索)수천줌을 구해 부적을 만들어 그 석불의 전면에 안치하고 석불의 배꼽을 도끼로 부수어 그 안에 있는 것을 꺼내었다. 그것을 꺼내기 전에 그 절 중들의 방해를 막기 위하여 미리부터 수십명의 중들을 결박하여 두었는데 그 일이 다 끝나자 중들은 튀어나가 무장(茂長) 관청에 고발하였다. ‘어젯밤에 동학군들이 중을 결박짓고 석불을 깨뜨려 그 속에 있는 것을 도적질하여 갔다’고 하였다. 그날로 무장현감 조 경호(趙敬鎬)는 장교·차사를 다발하여 각지에 있는 동학군을 모조리 잡아들이라 하였다. 그리해서 수백명이 잡혔는데 그 가운데 괴수로는 강 경중(姜敬重), 오 지영(吳知泳), 고 영숙(高永叔) 세 사람이 지목되었다. 무장수(茂長倅)는 여러날을 두고 취초를 하였는데, 첫째 문제가 비결책을 들이라는 것과 손 화중(孫和中) 및 그밖의 주모자 두령들이 있는 곳을 대라한 것이었다…그러나 소위 비결이라고 하는 것은 손 화중이 가지고 어디로인지 가버렸으며 여러 두령들도 어디로 도망했는지 알 수 없다고 하여, 수십일 동안 형벌을 받다가 관은 취초한 것을 전라감사에게 보고하여 강 경중, 오 지영, 고 영숙 삼인은 모두 강도겸 역적죄로 사형에 처하였고 남은 백여명은 엄장을 때리어 방송(放送)하였다… 며칠이 지나 어느날 저녁에 옥졸이 들어오며 죄수 삼인의 묶은 것을 모두 벗기더니 의관을 갖추어 나가자고 한다…옥문 밖을 썩 나서 보니 수천명의 사람들이 혹은 등롱(燈籠)을 들고 혹은 햇불을 들고 관문대로의 좌우에 갈라서서 앞길을 인도한다. 오리정(五里享) 밖에 나와 한 도인의 집에 좌를 정하고 앉게 되었는데 우리 형님 두 분과 각 두령이며 촌에 있는 도인들이며 읍에 있는 도인들이 차례 차례로 나와 그동안 고생한 일을 다 말한 후에 어찌되어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를 물은즉 형님이 말씀하되 들은즉, 무장현감 조 경호가 무엇보다도 비결을 찾는다 하기에 우리는 중들과 의논하여 불경책 한권을 홍보에 싸가지고 수천명이 떠들고 들어오며 예리(禮吏)에게 통지하여 무장수로 하여금 사모관복으로 저영(祇迎)하라 하였다. 그리고 이 고을 오리정에 당도하니 무장읍에서는 장리가 되는 몇사람들이 관에 아뢰기를 동학군 수천명이 고을을 함성(陷城)하고 관리들을 죽인다고 말 올리므로 자외방송(自外放送)이 된 것이라 하였다.
그동안 경과로 말하면 선운사 중들도 모두 도인이 되고 무장읍 아전들도 장교·차사 할 것 없이 모두 도인이 되었다고 한다.
손화중포의 동학도들이 미륵불의 배꼽을 깨뜨리고 비결을 꺼냈다는 사실은, 실제의 행동에 의하지 않고 초월적인 힘인 메시아 미륵이 출현하여 평등한 이상사회를 실현시켜 준다는, 행동성이 결여된 미륵신앙의 공상적인 측면을 부정하고 행동성을 부여하는 과정에서 미륵신앙과 동학이 혁명적인 합일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손화중포(장성이 그중심인)는 전라도 일원을 압도하는 동학의 포였으며 이 선운사 미륵불 배꼽의 비결습독사건으로 그가 이씨왕권에 대신하여 새로운 왕조의 주인이 되리라는 믿음이 팽만해 갔다고 생각된다. 그것을 뮤텔(Mitel) 문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동학도들은 이제 천명이 그들에게 돌아왔다면서 계룡산에 개국하고 360개 문무대신을 수명택정(受命擇定)했다 하면서 임진년(1892) 8월 무장 선운사에서 통학도 300여명을 모아놓고 선멸왜행(先滅倭洋)한 뒤에 나라 안의 대소이민(大小李閔)을 진멸할 것이며 진인(眞人) 정씨(鄭氏)가 해도(海島)에서 나온다.
필자가 근년에 손 화중 씨의 막내 며느리와 손자를 만나 대담한 자료에 의하면 “김 성수 씨의 누이 중 한 분이 손 화중의 첫째 며느리로서 ‘장성댁’이라 불리운다”고 증언한 사실이 있다. 전라도 지주들이 새로운 왕조에서의 그들의 보명을 위하여 딸을 손 화중의 며느리로 주고 있는 점은 당시의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증언하여 주는 것이다.
수천명 민중의 횃불시위로 오 지영 등 3인이 방면되는 사실에서도, 미륵신앙과 혁명적 만남을 통한 동학의 새로운 변신을 우리는 분명히 느낄 수 있으며, 미륵신앙자들이 이동학의 실천성과 만남으로써 순조년간 외국의 큰 배와 대포로 새로운 이상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던 환상을 극복하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었음을 미루어 볼 수 있다.
끝으로 전 봉준 장군도 손 화중포의 한 사람이었음을 밝힌다. 또한 그들에 의해 이미 선멸왜양(先滅倭洋)의 구호가 제창된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하게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