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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의 성보(聖寶)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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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87년 09월 67호
원령왕사비(元景王師碑)
일주문을 향해 오르다 보면 해인사의 사적비와 함께 많은 비석들이 늘어 서 있는 자리에 묘길상탑이 있고 그 곁에 새로 비각을 지었는데 바로 원경국사 탑비가 있는 곳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천왕문을 지나 해탈문 계단을 오르기 전 왼편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이 비는 본래 해인사에서 약 4km 떨어진 가야면 야천리탑동 반야사지(般若寺址)에 있었는데, 마모가 심해져 가는 것을 안타까이 생각한 스님들이 1961년에 해인사로 옮겨 온 것이다. 이 비석은 상당히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되어 있어서 판독이 어려울 만큼 마모가 심한 편이지만 고려 초기의 불교 문화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이 비석은 비의 머릿돌(碑頭)과 거북받침돌이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비신(碑身)은 안산암(安山巖)으로 되어 있다. 대개의 다른 탑들은 비두와 거북받침돌의 조각이 찬란한 것에 비하여 이 비는 별 특징이 없으며 비신 상부에는 용의 무늬를 그리고 바깥 쪽으로는 당초문(唐草紋)을 조각했다. 이 비는 머릿돌의 길이가 2m 70cm 정도이고 비신의 길이는 2m 30cm이며 넓이는 110cm, 두께는 12m이고, 거북받침돌의 길이는 210cm, 거북머리 부분이 70cm, 폭은 24cm로 비교적 큰 비석임을 알 수 있다.
원경국사는 고려초의 스님으로서 문종 때의 스님( 서기1014-1114)이다. 스님의 자(字)는 자정(子正)이며 속성은 신(申)으로 이천(伊川) 사람이었다. 스님은 어려서 영통사(靈通寺)의 경덕(景德)화상에게 득도(得度)하여 문종 10년 서기 1056년에 비구계를 받았으며 19세 때에 이미 승과에 급제하여 대덕(大德)의 칭호를 받았다. 은사였던 경덕화상이 입적하자 대각국사를 따라 송나라 항주(杭州) 혜인원(惠因院)의 진수(晋水)법사에게서 법을 깨치고 선종(宣宗) 3년 서기 1086년에 귀국했다. 이어 숙종(肅宗) 때에 승통(僧統)이 되고 대각국사가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藍)을 두고 속장경을 이룩할 때에 스님은 교정(校正)을 맡아 일하기도 했다.
그후 예종(睿宗) 9년인 1114년에 왕사가 되고 귀법사(歸法寺)에 있다가 그해 세수 70, 법랍 62세로 입적했다. 이에 시호(諡號)를 원경(元景)이라 하고 반야사에서 다비했음을 알 수 있다.
그후 이 비석은 서기 1125년인 인종 3년에 건립되었으며 비문은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의 형인 김부일(金富佾)이 짓고 당대의 명필 이원부(李元符)가 썼는데, 글씨체는 우세남체(虞世南體)로서 현존하는 우리나라 비석 중 가장 우수한 작품이다. 국내엔 유일한 우세남체의 비석인데, 글씨의 크기는 약2cm로 2600자에 달하는 장문(長文)으로 문장 또한 사육문(四六文)에서 고문체(古文體)로 넘어가는 획기적인 문체이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너무 마모가 심해 절반이상을 판독할 수 없는 것이다. 현재 이 비석은 보물 제128호로 지정 보호를 받고 있는데 제액(題額)은 전서(篆書)로 중시원경왕사비명(贈諡元景王師碑銘)이라고 되어 있다.

가야산의 석불(石佛)
우리나라는 산이 많은 나라이고 산에는 자연 바위와 돌이 많아서 경주 남산을 비롯한 여러 곳에 마애불(磨崖佛)이나 석불을 많이 조성하였다. 특히 신라 사람들은 일찍부터 풍수지리사상과 함께 자연을 신성시하였으며 차가운 돌과 바위에 불심을 불어넣어 불상을 조각함으로써 따뜻한 생명이 피어나게 하였다. 이러한 석조(石彫)문화는 위대한 석굴암을 낳게 하였으며 정주 남산의 불교 유적은 신라 사람들의 신앙생활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중요한 사적이다.
이런 영향과 무관하지 않게 가야산에도 우수한 2구(軀)가 있는데, 하나는 마애불이고 다른 하나는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이다.
마애불은 해인사 북쪽 계곡을 돌아 가야산정으로 가는 길의 중간 지점에 있기 때문에 흔히 중봉부처님이라고 하는데 크고 단단해 보이는 바위를 이용하여 마애입상(磨崖立像)을 조각했다. 돌은 화강석이므로 단단하며 검은 빛이 감도는데 부처님의 모습 또한 아주 당당하여 육중하게 보인다. 더우기 양각으로 새겼으므로 더욱 그런 인상을 남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머리는 소발(素髮)이며 전체의 얼굴은 잘 균형잡혀 있고 입은 다소 두드러지며 큰 귀와 함께 한국의 불상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풍만한 편이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어깨는 넓어 당당하며 힘이 있어 보인다. 좌우 두 손은 잘 조각되어 생동감을 주는데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올려서 엄지와 중지를 맞대었고 왼손은 가슴 부분에 맞대고 있다.
법의(法衣)는 전체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통견(通眉)이며 옷의 모습도 상당히 두터워 보여 질감이 있다. 전체적인 옷 모습이 보편적으로 가사의 모양이라기보다는 장삼과 같은 모습이 보이면서 그 전체의 느낌도 천이 두터워 더욱 육중하게 보인다.
머리 부분의 원광(圓光)은 아무 무늬도 없으며 잘 처리된 넓은 원광은 불상 전체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광배(光背)는 달리 조각하지 않았고 불상을 조각한 그 바위전체가 하나의 광배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불상의 양식이나 조각 수법으로 미루어 신라통일 이후의 불상으로 보이며 전체적으로 잘 조화를 이룬 불상이다. 또한 이 불상은 해인사의 형국‘이 행주형국(行舟形局)이므로 이 중봉의 부처님은 해인사라고 하는 큰 배를 움직이는 도사공(都沙工)으로 조성하였다고 하는데 그 조성도 개산 당시라고 보고 있다. 단오날이나 길일(吉日)에는 꼭 사중에서 기도를 하고 또 외래의 기도객이 끊이지 않는데 기와 조각이 인근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본래는 암자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불상은 높이가 5m이며 어깨 너비는 3.2m나 되는 거대한 입석으로 보물 제222호로 지정되어 있으나 해인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 보호가 소홀한 것이 문제이다.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은 가야산의 상봉에 있다. 이 불상은 현재 보물 제264호로서 상봉 칠불암(七佛庵) 터에 외로이 있는데 관리 상태가 지극히 나빠 목이 절단되었고 어깨와 두 팔부분이 파손되었으며 발부분도 부러져 그 아랫부분이 보일 뿐이다.
불상의 높이는 210cm이며 머리 높이가 60cm, 어깨 너비는 70m의 화강암 불상이다. 머리는 소발(素髮)이며 얼굴과 머리의 전체적인 느낌이 다소 긴 타원형으로 보이는데 마멸이 안타까울 뿐이다. 몸의 부분이 많이 파손되어 석주와 같은 느낌이 들며 오른손은 가슴까지 올린 것으로 보아 여원인(鸒願印)인 듯하고 왼손은 어깨 쪽에서 수직으로 내린 것으로 보아 항마인(降魔印)처럼 보인다. 손이 마모되었기 때문에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전체적인 수법이 통일신라기의 불상임을 짐작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