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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근자에 종교의 현실참여 문제가 간간이 논의되기도 한다. 어떤 명사는 공개 방송에 나와서 신부 목사 스님을 점잖게 나무라며 그 좋은 성당, 교회, 절간을 놔두고 왜 길바닥에 나와서 기도를 드리고 염불을 외느냐 개탄했다. 지난 6월, 7월, 민주화 촉구 대행진 때, 거리에 나가 민주화를 촉구하는 기도회나 불교대회를 개최한 일에 대한 비판인 듯하다.
간혹 순수성이란 말을 오용하는 경우가 많다. 문학의 순수성이나 종교의 순수성 따위가 그것이며, 마치 그것이 인생이나 현실과 무관한 것처럼 주장하는 것을 본다. 문학이 인간과 사회를 탐구하는 것이고 종교가 유한한 인생을 좀더 높은 차원에서 영생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현실과 인생을 떠나서 어떻게 논의되고 탐구될 수 있겠는가?
참여(engagement)란 따지고 보면 현실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는 존재 그 자체요 성실성의 발로일 뿐 그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 생명체가 아닌 것, 의식이나 정신적 활동이 없는 것이 참여하지는 않는다. 삶의 현장인 어떤 상황에 대처하여 내가 참답게 살고자 하는 것이 참여가 아닌가. 그런데, 사람들은 참여 자체를 하나의 불순한 목적으로보고 현실로부터 도피(decagement)하려 한다. 그것은 성실성이나 진실성을 포기한 것이며, 현실에 대한 외면이다. 참여는 단순한 관심이 아니라 적극적 대처 자세로서, 부조리나 부당한 것에 대한 저항, 고발, 증언, 비판, 투쟁을 지닌다. 그것은 자기 생명을 담보로 하여 열렬히 살아가고자 하는 참된 의식인 것이다. 현실을 포용하지 않고 방기하거나 방관하는 곳에서 어떻게 진실한 삶이 추구되겠는가?
참여는 인생 자체의 존재론적 당위성이지,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존재하는 한 참여할 수밖에 없는 목적이며 곧 수단인 것이다. 그러기에 싸르트르는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하였고 까뮈는 ‘저항하라, 고로 존재한다’ 하였다. 이것은 유심이냐 유물이냐 보다 더 절박한 현실인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는 말도 ‘존재와 무’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한 싸르트르 계통의 실존주의와 일맥 상통하는 존재론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투쟁하며 존재한다. 생명의 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존재 자체가 무목적이거나 선 그 자체는 아니다. 돌멩이 하나가 존재하는 데도 목적이 있다 하였다. 그러나, 돌멩이 자체는 의지가 없는 것이니까 그의 존재는 인격적 존재인 인간과는 다르다. 인간의 의지에 의하여 그 돌멩이는 쓰임이 달라진다. 즉자(卽者)와 대자(對者)의 원리로 구분하는 것이 그것이리라. 돌멩이는 인간에 의하여 쓰여지지 않으면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도 있고, 이마를 까는 무기 따위가 될 수도 있고, 집을 짓는 재료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 현실에 참여한다는 진의가 있다. 문학인, 승려, 신부, 목사, 학생 들이 성당, 사찰, 교실을 버리고 길거리에 나와 기도 아닌 민주화 대행진이라는 적극적 참여를 시도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불경을 외며 또는 성경을 읽으며 오랜 세월 수양에 정진하여 진리를 추구했다면, 반드시 현실로 돌아와 실천윤리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고 자기 수양에만 그친다면 대승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할 것이다. 이대승의 경지가 바로 참여가 아닌가.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논한 유교의 경우도 마찬가지 논리이다. 수신과 평천하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동시적인 것이다. 수신은 평생을 하는 것인데 그 수신이 끝나고 평천하한다면 언제 사회에 참여화겠는가. 개인의 구원이나 삶이 바로 사회의 구원이요 삶이다. 개인과 사회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같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동체적 삶인 것이다.
종교든 문학이든 그것이 존재해야 한다면 무엇 때문이라는 목적이 있을 것이다. 종교를 위한 종교냐, 문학을 위한 문학이냐, 아니면 인생을 위한 종교냐, 문학이냐 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물음에 도달하게 된다. 문학이 문학을 위하여 있어야 순수하다는 것은 하나의 궤변이다. 문학의 본질이 인생의 탐구라면 당연히 문학은 인생을 위하여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을 위한 문학이나 ‘인생을 위한 문학’이나 마찬가지 말이다. ‘무엇을 위하여’를 불순하게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결벽증이며 인생에 대한 자신갑의 결핍이다.
우리는 동굴 속의 자아탐구로부터 현실로 돌아와 허공이나 관념이 아닌 부처와 예수를 민중 속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기에 유불선(儒佛仙) 3교의 요체를 뽑아 만든 인내천(人乃天)이나 사인여천(事人如天)은 한층 더 현실적인 사상이며 민중사상임을 알 수 있다. 민중 속에서 바로 부처를 보교 하느님을 본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핵심인 인권사상과 통하고, 종교를 영혼 추구의 내세적 피안사상으로부터 적극적 현실의식으로 대처한 셈이다. 해방신학이니 민중신학이니 하는 제 3세계의 새로운 종교적 변혁은 바로 종교가 삶의 에네르기요 투쟁 그 자체임을 암시한다.
많은 성현들이 민(民)을 하늘로 비유했고, 민중 존중 시성을 폈다. 동양에서도 천즉민(天卽民)이요, 민즉천(民卽天)이라 하였다. 그러나, 사람이 하늘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하여서는 그와 같은 관념만으론 안 된다. 그 관념을 실천할 수 있는 현실적 제도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정치라는 것이다. 민을 하늘로 여기는 정치 제도,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가 아닌가.
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 이는 곧 민이 하느님이 되는 입장인 것이다. 공자도 민을 하늘같이 여기라 수없이 말해 왔고 마르크스도 노동자 농민이 주체라고, 다시말해 하느님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공자는 관념이었고 마르크스는 제도였다. 이 제도는 현실이고 정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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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나라는 모든 분야가 묵정밭이 되어 있다. 42년, 아니 그보다 앞서 100년 500년 이 땅위에는 진정한 민중시상이 실현되지 못하였다. 정치, 경제, 교육, 종교, 문화 모든 부면에 비민중화, 즉 비민주화 현상이 미만해 있다. 그 묵정밭을 갈고 새로운 씨앗을 뿌려야 할 때다.
‘6.29 민주화선언’은 그 자체로서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실천가능성’을 위한 제도 장치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상당한 사람들이 ‘선언자’가 마치 ‘시혜자’처럼 민주주의를 가져다 줄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본질적으로 싸움을 어렵게 만든, 핵심이 흐려진 투쟁임을 감지케 한다.
지금 우리 민족 앞에 놓여 있는 중요 과제는 세 가지가 있다. 자주독립노선, 민족통일노선, 민주복지회외 길이 그것이다. 자주독립은 4강의 틈바구니에서 외세 문제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일인즉 반미 문제도 여기에 포함된다. 민족통일노선은 이 땅의 모든 불행의 근원이 분단에 있다면, 그 분단이 극복되지 않고선, 근본적으로 민주화도 복지국가도 건설될 수 없다는 현실에 도달한다. 안보 논리가 바로 그것을 배경으로 등장하여 모든 것에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선 모든 것에 선행되어야 할 것이 통일인지 모른다. 이 통일과 무관하거나 연결되지 않는 일체의 것은 민족의 객이요, 역사의 반동인 것이다. 민주화와 복지국가 건설은 앞의 2항이 해결될 때 저절로 이룩되는 최후요 최고의 진리다.
지금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민주화 방안에 이 세 가지 민족적 과제가 얼마나 다루어지고 있는가? 이 세 가지 핵심을 제쳐놓는다면, 아무리 천언만사를 늘어놓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본질을 호도시키는 것일 따름이요, 결코 민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진정한 운동이 아니다.
그 옛날 어머니께서 묵정밭을 일구어 씨앗을 심고 알뜰히 가꾸었듯, 우리 모두 잡초 무성한 현실을 갈아엎고 거기에 진정한 민주의 씨앗을 심자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