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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약구급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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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고려대장경 - 이윤수 1997년 05월 183호
“우리나라에서 많이 나는 약재를 자세하게 적어서 지식이 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수 있고 누구나 병을 고칠 수 있도록 해야한다” 「동의보감」중에서

한의학의 명저를 꼽으라면 누구나 허준의 「동의보감」을 주저하지 않고 이야기할 것이다. 유배지에서조차 무려 십오년 동안 실증적 사고로 한글 전문의 민족의학서적 스물다섯 권을 집필했던 허준. 치료 도중 병을 얻어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그의 민족의학에 대한 한량없는 사랑과 애민정신이 「동의보감」 안에 고스란히 녹아있지 않던가.
그렇다면 동양의학사에 빛나는 보석 같은 책 「동의보감」이 생겨나기 이 전에 이 땅에 민족의학은 언제부터 비롯된 것일까, 또한 어떤 성과물들이 쌓이고 쌓여서 「동의보감」이란 정수를 탄생시킨 것일까.
한의학의 기본이 마치 중국의 영향 아래서 이루어진듯 인식되고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일연스님의 「삼국유사」에 단군신화편에 실린 내용 가운데에 ‘곰이 사람으로 변하기 위해 쑥과 마늘을 먹었다’ 는 사연을 전문가들은 이 나라의 고유하고도 독지적인 의약 발달의 시초로 지적하고 있다.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이 대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약을 먹어 사람의 몸을 이뤘다.” 중국본초학의 고전인 「신농본초경」에도 실리지 않았던 쑥과 마늘이, 그것도 중국에서는 6세기 이후에 등장하는 쑥과 마늘을 우리는 이미 단군 건국시기에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의 약이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발전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의학이 독자적으로 발전된 것은 6, 7세기경 삼국시대이다. 이 무렵, 이미 전래의 침술을 계승한 신라가 652년에 침 사백 개를 중국으로 수출했으며 경주에서는 692년에 의술을 가르치는 전문학교에서 계통적인 의학교육이 시작된 바 있다. 백제 성왕때에는 일본에서 의약사와 채약사를 초빙해 가기도 했다. 의사와 약사가 분리돼 있었음은 그만큼 이 분야의 전문화가 이루어졌다는 성과인 것이다. 9세기에 이르러서는 한국산 의약이 중국과 일본의 의학서적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민족의학의 발전 속에 탄생한 위대한 명저가 있다. 고려다운 독자적인 처방을 담은「향약구급방」이 그것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의학서적이며「동의보감」보다 그 내용에 있어서도 앞서가는 의학백과사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민족의약학의 체계를 확립한 이 책을 계기로 조선조 이후 수많은 향약 의학서들이 줄을 잇게 되었다.
향약이란 중국에서 수입되는 약을 당재, 또는 당약이라고 부른 것에 대한 이 땅 우리의 약재라는 의미이다. 범패에 대비되는 우리 노래라는 의미로 향가라 이름지어 불렀던 선조들이 약재에 있어서도 우리의 독자적이며 자주적인 약재라는 당당함을 나타낸 이름인 것이다.

다시 쓰는 고려대장경에서 어째 뜬금없는 「향약구급방」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을 경판 한장한장에 담아냈던 고려대장경과 「향약구급방」이 대체 어떤 인연이 있기에?
다큐멘터리 고려대장경을 제작하면서 우리는 대장도감에 관한 기록 가운데에 아주 놀라운 한구절을 발견했다. 대장경을 조성하던 기구인 대장도감에서 처음으로 간행한 책자가 그 어떤 경전이 아니라 바로 「향약구급방」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구절을 짧은 시간 동안에 규명하는 것이 불가능해 프로그램에서 이 문제를 덮어야했던 제작진에게는 내내 화두와도 같은 대목이었다.
바로 「향약구급방」이 어떤 내용으로 이루어진 의학 백과사전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세 권 한 책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각 항목에 병명에 해당하는 여러 종류의 치료 방법이 열거돼 있다. 순전히 이땅에서 나는 식물 이름만이 정리돼 있는데 이들 약초의 이름은 민간에서 흔히 불리는 이름이 속명으로 주해돼 있기도 하다. 부록인 향약목 초부 아래에는 향약 백팔십여 종에 대한 속명과 약의 맛, 약의 독, 채집 방법을 알기 쉽게 정리해 두기도 했다. 약을 먹는 방법도 오늘날 약사가 조제하듯 식전, 식후, 공복으로 구분돼 있으며, 약과 함께 먹어선 안될 음식에 대한 금기와 약을 지어 먹는 방법, 먹을 약의 양까지 상세하게 기록돼 있어 누가 언제라도 탈어 나면 쉽게 활용할수 있도록 편집되어 있다. 가령 약을 먹을 때 찬 것, 날 것, 기름진 것은 먹지 말라든지, 같은 이름의 약초도 서로 그 실물이 다른 것이 있으며 약초가 나는 지방에 따라 약초의 성질이 서로 차이가 있음을 밝혀놓고 있어 당대에 그 효능에 정확한 지식을 지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고려 고종 23년인 1236년, 대장도감에서 처음 간행된 책자 「향약구급방」. 왜 대장도감에선 향약구급방을 대장경 제작에 앞서 가장 먼저 간행했던 것일까. 몽고와 전쟁을 치르면서 대장경을 조성하던 무렵에 이땅에서 나는 약재가 왜 강조돼야 했던 것이며 하필이면 왜 대장도감에서 이 책을 간행해야 했던 것일까. 향약구급방 안에 담긴 내용을 추정해 보건대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고려대장경 조성에 참여한 사람들이 무려 몇이던가.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어 한면에선 아름드리 나무를 베고 제련하며 경판을 만들고, 한면에선 종이를 만들고 사경을 하고, 또 한편에선 경을 새기는 일들이 펼쳐졌을 것이다. 그 무수한 사람들어 일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예기치 못할 안전사고들이 일어났을 것인가 그 같은 기록은 어느 곳에도 한줄 전해오지 않지만 각수가 킬에 손을 베기도 했을 것이며, 나무를 베고 찌고 말리는 과정에서 또 얼마나 많이 다쳐야 했을지…. 많은 사람이 모여 일하다 보면 식중독과 같은 일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향약구급방」에 실린 ‘쇠붙이에 찔린 상처, 떨어져 생긴 골절, 동상’과 같은 행목들이야말로 불사의 현장에서 갑작스레 생긴 사고에 대한 처방으로는 더없이 절실한 것들이 아니었을까.
이를 인식했기에 대장도감이 세워지자마자 경판 제작에 앞서 참여한 수많은 인명의 건강을 돌보기 위한 「향약구급방」을 먼저 제작한 것이 아니었을까. 행여라도 생겨날 불상사에 대처하기 위한 준비가 실질적인 「향약구급방」의 간행임을 수기스님을 비롯하여 대장경 조성을 주도한 고려인들은 예측했을 것이다. 그런 뜻에서 제작하여 인쇄한 책자는 오직 보시의 정신으로 불사에 참여한 이웃들에게 널리 전해졌을 것이고, 고려대장경이 조성되는 긴 세월 동안 마치 살아있는 의사처럼, 곁에 있는 약사여래처럼 그렇게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와함께 만연하는 전염병이나 전쟁의 고통속에 처한 가난한 민중을 위한 자비심이 대장도감의 첫번째 간행물로 채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계속되는 전쟁과 흉년에 굶주림을 이기지 못한 백성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했던 현실과 관련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흔히 생겨날수 있는 갖가지 위급상황이나 질병에 대처하기 위한 시대적인 요구가 아니었겠는가 하는 점이다. 가령 두메 산골에서 독버섯을 잘못 먹고 병이 났을 때 손쉽게 집 부근의 약초를 구해 환자를 구할수 있게 한 배려인 것이다. 더구나 의사를 쉽게 부를 수 없는 곳에 사는 백성들에게 마치 집집마다 약사여래를 모시듯 그렇게 배포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 어느 곳에도 「향약구급방」이 왜 대장도감에서 처음으로 간행되었는지, 편자는 누구인지 기록돼 있지는 않다. 「향약구급방」마저 이 나라에 전하지 않는다. 14l7년에 다시 간행된 「향약구급방」 한 부만이 일본 궁내청 서능부 자료질에 비장돼 있을 뿐이다. 또한 조선조에 간행된 「향약집성방」에 그 내용이 일부가 전해질 뿐이다.
문득 오늘날 대자대비의 종교 불교는 병들어 고통받는 중생을 위해 과연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새삼 아프게 돌아보게 된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