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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안 안팎 일을 골고루 익혔던 화방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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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박원자 1997년 05월 183호
내 나이 열입곱, 해방은 되었으나 먹고 살기는 공출이 심하던 일제 때와 마찬가지로 어려웠다. 너나없이 배고프고 헐벗은 시절이었지만 남의 농사를 부치고 살던 내 속가 집은 유달리 가난했다. 어려서부터 잠을 제대로 못자고 늘 병치레를 해 ‘사람구실 못하겠다며 내다 버리라’는 말까지 듣던 약골인데다 먹지도 잘 못했으니 정말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내가 부모님께 그랬다. “이렇게 살다간 아무런 희망도 없고 굶어죽게 생겼으니 나가서 밥이나 실컷 얻어먹겠다. 그러니 죽은 셈치라고.” 그런데 그 무렵이었다. 밤마다 꿈을 꾸는데 늘 똑 같은 내용이었다. 똑같은 산에 도랑이며 돌다리, 그리고 건너편 둔덕에 집여 보이고 아련한 냄새가 나는데, 누군가 그 곳에 서서 오라고 손짓을 하는 것이었다. 똑같은 꿈을 하도 여러 번 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정경을 그대로 그릴 수 있을 정도이다.
집을 나가겠다는 말에 아버지는 묵묵부답이었으나 어머니는 펄펄 뛰며 만류하다 급기야는 나를 따라나섰다. 어린 동생을 업은채 따라나선 어머니와 일거리를 찾아, 그리고 밥이나 실컷 얻어먹으려고 고향인 장단-판문점 근처-에서부터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다 보니 진주까지 갔다. 그리고 거기서 마지막 도착한 곳이 남해 화방사였는데, 그 절을 보니 늘 꿈에 보던 바로 그 곳이었다. 어쩌면 도량이며 둔덕까지, 그리고 아련히 느껴지던 냄새까지 그리도 똑같은지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그 냄새는 잡목을 태우는 냄새였다.
그 곳에 있으니 마치 다시 고향에라도 온 것처럼 그렇게 편했다. 객실에 놓인 불경이 눈에 띄어 들쳐 보니 내용에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열일곱이 되도록 불교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나, 잠깐 훑어보았을 뿐인데도 불경들을 보니 ‘불교가 이렇게 좋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금강경 오가해」의 빼어남이 마음에 오랜 여운으로 남았다.
화방사에서는 지나는 객을 사흘은 잠재우고 먹여 주어도 더 지나면 떠나게 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한문 경판을 줄줄이 읽는 나를 눈여겨 본 스님들이 개인 양식을 내 몫으로 내놓으며 더 머물러도 좋다고 했다. 그 시절 절에서는 자신이 먹을 양식은 저마다 동냥했다.
일곱살이 되던 해부터 집을 떠나올 때까지 한학자인 재당숙에게 어지간한 한문책을 다 익힌 터라 불경을 읽는 데 그리 어려움은 없었다. 속가에서 익힌 한문 실력이 화방사, 아니 불교와 인연을 맺어준 셈이었다. 그 곳 스님들이 출가를 권했으나 그동안 절집과 별 인연도 없었고 불교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던지라 바로 그런 결심을 할수 없어, 처음에는 그보다도 일거리가 있으면 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자리잡는 것을 본 어머니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그 곳에서 한 서너 해 동안 머무르면서, 일을 참 많이도 했다. 출가할 뜻을 아직 내지 않았으니 행자 아닌 행자 노릇을 한 셈이었다. 장작 패고 깨진 기윗장을 골라내고 고치는 일에서부터 담장 고치고 공양준비하는 일까지 절집의 안팎 일을 안 해 본 일이 없이 고루 다 했다. 누가 시켜서라기보다 일할 것이 눈에 띄면 배운다는 생각으로 일을 했다. 밤잠을 안 자고 일을 해도 일을 배우는 즐거움과 할 일이 있는 것이 고마워 고된 줄도 몰랐다.
기실 중노릇하려면 참선이나 경학, 의식, 사무, 공수, 별좌, 조화까지 다 할 수 있어야 하는데, 화방사 시절에 그런 것들을 고루 해본 덕분에, 지금 내가 있는 봉선사 청풍루를 지을 그 때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가 있었다.
그무렵 그 곳 화방사에는 열분 남짓한 스님이 머물고 있었으나, 거개가 대처승이었고 아침 저녁으로 예불 드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경학을 공부하고 참선을 하는 모습은 구경조차 할수 없는 환경이었으나, 시간이 있을 때마다 경을 읽어 그 경전의 심오한 세계가 마음 속으로 차올라 신심으로 자라고 있었다.
그렇게 신심이 솟던 어느해 여름, 시금치 쌈을 먹고 탈이나 혼난 일이 생각난다. 변을 모은통에 물을 섞어 채소밭에 끼얹어 주는, 채소 밭에 거름주고 가꾸는 일 또한 내 몫이었는데, 그 해 여름 얼마나 시금치가 탐스럽고 크게 자랐는지, 게다가 식욕 돋는 한여름이겠다, 날마다 시금치에 된장을 놓아 쌈을 싸먹었다. 모두 채독 염려가 있다고 먹기를 꺼렸으나, ‘신심이 지극하면 채소밭의 벌레도 없어진다’ 는 어느 경전의 말을 믿고 시금치 쌈을 먹고 또 먹었던 것이다. 그러던 끝에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노래지며 숨어 차오르고 걸음조차 걸을 수 없는 게 심상치 않었다.
병원에 가니 십이지장충 때문이라며 약을 주는데, 그 약 먹고 변을 보니… 아마도 경험있는 사람은 더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다음 일을 짐작할 것이다.
그 때 약한 몸이 더 축났으나, 덕분에 그 뒤부터 해마다 회충약을 꼭 챙겨 먹는 버릇을 갖게 되었고, 무엇보다 ‘신심이 아무리 북받치더라도 분에 넘치는 일은 해선 안되겠다’는 교훈을 얻었다.
또 그 무렵. 한 보름 단식을 하며 기도하던 가운데 먼 곳의 일이 선명히 보여 옆사람에게 그런 말을 했더니, “한동안 굶더니 미쳤나 보다”는 소리를 들은 일도 있었다. 그렇게 서너 해를 지내고 있을 때였다. 육지에서 스님들이 와 나를 보고 하는 말이, ‘젊은 사람이 한문 실력이 좋으니 양주 봉선사 웅허스님이 계신 곳으로가 그 분을 은사 스님으로 모시고 중이 되라’고 했다.
그 무렵 절 일이란 절 일은 다하고 있었지만 경전을 읽는 대에는 오히려 그 곳 스님들의 선생노릇을 하던 내 소문을 들었던 모양이다. 바깥스님들의 얘기를 듣고 화방사스님 한분이 “여기서 이렇게 보내게 할 것이 아니라 교단에 한몫을 하도록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며, 나중에 운허스님을 뵈면 그 때, 그 분을 은사로 모시기로 하고, 먼저 화방사에서 머리를 깎을 것을 권했다.
그렇게 절집 사람이 되었다. 은사스님 얼굴 한번 못 뵙고 그 분외 제자가 되어 머리를 깎은 것이다. 그때가 스무살이었는데, 운허스님을 찾아뵈려던 터에 전쟁이 나 버려 찾아뵙지 못하고 있다가 피난지에서 그 분을 뵌 것은 그로부터 서너 해 뒤였다. 스님이 피난을 나와 동래 범어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그 곳으로 찾아가 뵙게 된 것이다. 내게 당신을 은사 스님으로 추천했던 스님들에게서 그동안의 내 사정을 들어 알고 있었던 운허스님은 나를 보자 별 문제 삼지 않고 당신의 제자로 받아들여 주었다.
피난 시절 범어사에 머물던 운허스님의 「능엄경」 강의는 지금도 많은 스님들에 의해 회자되고 있을 만큼 명강의로 유명하다. 교학과 수행에서 단연 일인자였던 운허스님이「능엄경」 강의중 칠판에 ‘「능엄경」을 설하게 된 동기에 대해 쓰라’ 는 과제를 내주었다. 나는 한문으로 답을 써 냈는데, 다음날 저녁 스님이 부르더니, “네가 글을 곧잘 하는구나. 참선하는 사람들은 많으니 너는 앞으로 경학을 붙들고 익히도록 해라. 경학이 불교를 일으킬 것이다” 하였다.
뒷날 은사 스님께서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월운이 내 뒤를 이을 사람이라”는 말씀을 했다고하나, 내겐 이렇다저렇다 일체 말어 없었다. 그래서 과연 내가 잘하고 있는지 어떤지 몰라 답답할 때가 많았다. 그래도 오늘날까지 내가 스승께서 머물다가신 봉선사에 살며 그분의 뜻을 받들어 한평생 경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에 몸담았으니 은사 스님과의 만남은 내게 있어 숙겁의 인연 덕이었으리라.
행자시절, 남들처럼 은사스님 밑에서 보낸 세월은 아니었으나 절집안팎 일을하며 중물을 들였고, 또한 그 곳에서 내 스승 운허스님과 인연이 되었으니 돌이켜보면 좋은 인연시절이었던 것 같다. 요즘 나이 들어 부쩍 화방사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든다. 하던 일 모두 놓아 버리고 그 곳에서 그 옛날 행자시절처럼 장작 패고 담장 고치며 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이제 내가 늙어가고 있는 까닭이 아닐는지.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