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여주 고달사지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이혜경 1997년 05월 183호
여주 읍내에서 남한강을 건너 고달사터로 가는 길. 사방은 야트막한 산들, 사람을 누르지 않고 가만히 보듬는 그만그만한 구릉들이다. 강이 흐르고 벌판이 펼쳐지고, 나직한 산들이 감싼곳 여주는 고려말 학자인 이색이 말한대로 “들은 평평하고 산은 멀다.” 그 평평한 들에 난 길, 곳곳에 도자기 전시 판매장이 보인다. 질박한 옹기 항아리, 칫잔이며 자잘한 생활용품들… 언제 누구의 소용에 닿을지 모르는 채 봄볕에 반짝이는 저 도자기들도 언젠가는 흙속에 파묻힐 것이다. 흙과 물과 공기와 불, 그리고 사람의 공력이 들어서 이루어진 도자기들. 날름이는 불길 앞에 겁먹었을 흙의 기억도 흙속에 묻히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그 도자기 조각을 집어든 사람은 흙먼지 털어내며, 그들에게는 까마득한 옛 시대일 20세기 말을 그려볼지도 모른다.
북내면에 접어들 무렵, 막움트는 봄빛으로 한유롭던 먼산이며 들판은 아연 긴장한다. 아스팔트도 로가 드르륵 떤다. 군부대가 작전수행중이다. 탱크의 무한궤도가 구를 때마다 포장도로가, 그 아래의 흙이 떤다. 전투기인가 하늘에서 쌔액,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난다. 엇갈리는 탱크 두 대가 길을 막고, 검댕을 칠한 군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지도를 본다. 길은 그렇게 막혔다 트이고 다시 막혔다 트인다. 그 길 끝, 나직한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어귀에 들어선 작은 마을이 먼저 보인다. 흙벽집이 남은 오래된 마을의 축사에선 젖소들이 꿈실거리고, 길갓집에서 나온 개와 그 집으로 들어가는 고양이는 무심하게 비껴 제 갈길을 간다. 거기, 사적 제382호 고달사터임을 가리키는 작은 비석 하나가 보이고,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혜목산慧目山 고달사高達寺 옛 절터는 좁다란 논 모서리를 먹어든 석불좌로 열린다.

고달원高違院이라고도 불리던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되었으나 누가 창건했는지는 밝혀진 바없다. 경문왕 때 원감국사 현욱이 머무르고 교화활동을 함으로써 고달사의 역사가 확실해진다. 현욱스님은 선문 구산의 하나인 봉림산문을 연 진경 심희의 스승이니, 고달사는 원감 현욱, 진경 심희, 원종 찬유로 이어지는 봉림산문의 장이 된다.
현욱스님은 원성왕 3년(787)에 태어났다. 어렸을 적부터 불사공양하는 놀이를 즐겨, 모래로 놀이를 할 때면 탑을 쌓거나 모래 우물을 만들어 물을 길어 놓고 방생한다고 하였다. 출가한 뒤 스물한 살에 구족계를 받고 서른일곱살에 중국으로 유학하여 마조의 문인 장경 회휘에게서 법을 이어받는다. 쉰살 되던 해 귀국하여 실상사 등지에서 머무르다가 경문왕의 청으로 혜목산 고달사로 옮겨 여생을 보낸다. 혜목산에 오래 머물렀던 까닭에 ‘혜목산 화상’ 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 제자인 진경 섬희는 고달사에서 현욱스님에게 출가했다. 스승이 입적한 뒤 설악산 탁산사에서 머무르다가 뒷날 김해 서쪽에 복림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쪽으로 옮긴다. 그 곳에서 작은 절을 고쳐 봉림사를 세우고 봉림산문을 연다. 심희스님의 속성은 김씨로서 김유신의 후예이니, 봉림산문을 여는 데 가야계 김씨들의 역할이 큰 것도 이 때문이다. 문하에 제자를 오백여 명 두었는데, 법맥을 이은 이는 지금도 고달사 곳곳에 그 지취를 남긴 원종 찬유다.
찬유스님은 열세살 때 출가해서 상주 공산 삼랑사에서 심희스님의 제자인 융제스님에게 삭발했다. 융제스님은 찬유스님이 법기가 될 인물임을 알아보고 “지금 혜목산에서 교화하고 있는 심희 화상은 한 부처가 출현한 것이니 그리로 가서 섬기라”며 심희스님에게 보낸다. 혜목신에서 광주 송계선원으로 옮겨 머무르던 심희스님을 찾아가 “백운이 천 리나 만 리에 있을지라도 언제나 한결 같은 구름인 것이고, 명월이 앞의 개울 뒤쪽의 개울에 비치고 있을지라도 또 다른 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것을 알고 인식하는 것은 오로지 마음과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법문을 전해받고 스물한살에 삼각산 장의사에서 구족계를 받는다.
진성왕 4년(890)에 상선을 타고 중국에 유학한 찬유스님은 서천 동성현의 투자산 대동 선사 밑에서 수학한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려 할 때 대동선사는 친유스님에게 말한다. 멀리 가지도 말고 가까이 가지도 말라.” 찬유스님이 대답한다. “원근에 머무르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습니다.” 이로써 인가받고 고려에 돌아온 찬유스님은 상주 삼랑사에 머무르다가 나중에 혜목산 고달사로 옮긴다.
찬유스님이 고달사로 옮기자 법을 묻는 이들이 모여들어 큰 선림을 이루고, 봉림산문은 인맥을 따라 혜목산으로 옮겨간다. 고려 태조, 2대 혜종, 3대 정종이 찬유스님에게「스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4대 광종은 국사로 모시니, 혜목산서쪽의 국사령이라는 고개 이름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찬유스님은 세수 아흔살 되던 해(958)에 “만법은 모두 공한 것이니 나도 이제 가려고 한다. 일심을 근본으로 삼고 너희들은 부지런히 정진하도록 하라. 마음이 생기면 법도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면 법도 없어지나니, 어진 마음이 곧 부처라. 어찌 다른 종자가 있으랴. 여래의 정법을 잘 수호하고 펼치도록 하라”한 말씀을 남기고 좌탈, 입적한다. 광종은 시호를 원종대사, 탑호를 혜진이라 내린다. 찬유스님이 입적한 열일곱 해 뒤, 한림학사 김정언이 비명을 짓고 내의승지 장단설이 글씨를 쓰고 이정순이 새겨 탑비를 완성하였다.
찬유스님이 입적한 뒤에도 고달사의 명맥은 이어진다. 광종 22년(971), 대궐 안 원화전原和殿에서 대장경을 개독한 뒤, 광종은 도봉원, 희양원과 더불어 고달원을 잘 보존하고 대대로 전해지도록 하라는 조칙을 내린다. “국내 사원 중에서 오직 이 세 곳만은 전통을 지켜서 문하의 제자들이 상속으로 주지하여 대대로 단절되지 않도록 할 것이니라. 이 규정을 꼭 지키도록 하라.” 삼원三院 또는 삼대 부동사원不動寺院으로 일컬어지는 세 절은 왕실의 각별한 비호를 받게 된다.
이렇듯 번성하던 고달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나옹스님이 입적(1376)한 뒤에 무학스님이 이 절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아, 그 때까지는 절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고달사가 기록에 마지막으로 남은 건 고려말 대학자 한수(1338-1384)의 시에서다. 한수는 글과 글씨에 뛰어나 신륵사 나옹스님 비석, 노국대장공주의 비문, 회암사 지공대사탑비 등에 글씨를 남겼는데 “이십 년 전이 꿈이런가/옛 친구는 반이나 황천객/고달사를 찾으니/원통은 큰 복천에 연유인가/산은 병풍같이 절간을 두르고/외로운 비석은 하늘에 기대었네/웃으며 지낸 하루 돌아갈길 잊었으니/부처님께 묘법을 듣는 듯”이라는 시를 남겼다. 이로 미루어 이 시가 쓰였을 1380년경까지는 절이 남아 있었던 걸로 보인다.
육백여 년 전의 가람은 흔적 없다. 마을에서 산으로 올라가는 야트막한 경사가 진 땅은 곳곳이 사람이 일군 논밭으로 변했다. 겨우내 눈과 바람에 하얗게 바랜 지난해의 옥수수대가 뽑히지 않은 밭자락이거나 수초가 연두빛으로 돋아나는 습지거나 그루터기만 남은 논, 거기, 탑비며 부도가 드문드문 흩어져 있고 그 사이사이, 막 꽃피우려는 집중 으로 단단하게 오므린 꽃망울을 단 산수유나무가 환하다.
절터에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게 보물 제8호인 석불좌이다. 불상은 간데없고 균멸이 생긴 지대석과 꽃잎 무늬 선명한 상하대석, 안상 무늬가 담백한 중대석만 남았다. 서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보물 제6호인 원종대사 혜진탑비를 감싼 철책이 보인다. 파괴된 비신은 보물 제282호 쌍사지석 등과 같이 경복궁에 옮겨져 보관중이고, 귀부와 이수만 남았다. 부릅뜬 눈으로 서쪽을 바라보는 귀부는 힘있다. 서쪽으로 달려가는 중인지 바람을 맞은 것처럼 귀 뒤로 갈기가 뻗쳤다. 등판의 귀갑 무늬는 세월의 침식에도 아직 골이 깊다. 거기서 산 쪽으로 몇발짝 더 올라가면 이와 비슷하나 좀 더 작고 아담한 거북 한 마리, 둥에 구름이며 연꽃 문양을 없고 있다. 비신도 없어졌을 뿐더러 머리도 잘린 이 거북이. 누구의 비를 떠받치던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절터 동편 산기슭, 다랑이 논 위쪽의 아늑한 빈터에 세워진 탑이 보물 제7호, 원종대사혜진탑어다. 977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높이 2.5미터로, 네 조각이 한패로 짜인 지대석 위에 거북이 탑을 이고 있는 모양이다. 귀부를 중심으로 네 마리의 용이 명랑한 구름 속에 꿈틀거린다. 이 탑에서 산등성이에 난 돌계단을 일흔 개쯤 오르면 산등성이가 되똑하게 두드러진 곳, 국보 제4호 고달사지 부도가 서 있다. 일쩔에는 원감국사 현욱의 부도라고도 하나 확실히 밝혀진 바 없고, 원종대사혜진탑비보다 앞선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원종대사혜진탑비와 같은 팔각원당형이다. 중대석에 거북과 용, 구름이, 팔각형 탑신에는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옥개석의 귀꽃은 높이 치솟아, 위에서 내려다보면 타오르는 춧불 심지 같기도 하고, 하늘을 향한 사무치는 마음으로 한껏 치켜든 고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옆의 산길, 또 다른 유물이 있나 오르다 보면 길은 여느 산길일 뿐인데, 오랫동안 손대지 않은 흔적이 역력한 묵은 무덤 하나가 소롯가에 오롯이 남았다. 일흔살이 넘은 스님은 부도 뒤편의 어느 지점에 산 채로 장사를 지냈다는 전설을 그 무덤이 떠올린다. 평생 도를 닦았으나 육신의 저묾은 여김 없어서, 늙고, 힘없는 몸으로 숲에 온전히 혼자 남겨졌을 목숨, 그 경지에서 무엇을 보았을지, 아무말도 전하지 않은 채 나무는 묵묵하고 바람은 스산하다.

절터에서 내다보이는 벌판에 선 야트막한 언덕은 신털이봉이다. 시주 나갔던 스님들이 저물 무렵 절로 돌아오는 길목에 쉬던 곳이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절이 저만큼 바라보이는 그 곳에서 스님들이 다리를 쉬면서 신에 붙은 먼지를 털어냈는데, 그 먼지가 쌓이고 쌓여 이룬 봉우리라고 전설은 전한다. 한때 절 살림 규모를 말해 주는 언덕이다.
다리를 쉬면서 털어낸 게 하루의 먼지며 피곤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걷는 동안 신발에 들러붙은 흙먼지처럼, 시정을 돌아다니는 동안 돋아난 마음의 잔뿌리 쳐내리려 한숨돌리던 곳이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청정한 마음으로 산문을 들어서기 위해 마음 간추리던 곳이 아니었을까. “어진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씀 받잡고도 어진 마음에 이르는 길 찾지 못한 후세의 중생들이, 시정에서 묻힌 마음의 먼지 털어내려 찾는 옛 절터처럼.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