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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해사 백흥암 육문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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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김영옥 1997년 05월 183호
아우성치는 듯한 빛깔로 사람 질리게 만드는 영산홍도, 단아한 모양새에도 불구하고 어리무던하게만 느껴지는 철쭉도 두루 탐탁치 않거니와, 봄에는 역시 진달래라야 했다. 영동 할미강새암에 견뎌 낼까 싶게 보드라운 꽃잎이지만 뜻밖에 야무져 보이고, 그 처연한 빛깔로 보는 이의 가슴을 찢어 놓는 이것들은 햇살이 비끼는 소나무 그늘 아래 자주 피어 더욱 은근하더니, 어느 때부터 이 꽃무리 바라보는 심사가 편치 않아졌다.
진달래는 헐벗은 땅 가운데서도 산성 토양을 좋아한다니, 꽃보기가 쉬워졌고, 그것도 띄엄띄엄 다소곳이 피는 양태가 아니라 무리져 피어 있기 십상인 이즈음 형편의 속사정이 그런 것이었나, 가슴이 덜컥 내려앉게 되었기 때문이다.
경북 영천 팔용산의 동쪽 자락에 자리한 백홍암은 농사철에 때 맞춰 내리시는 비 속에서 고요하였다. 은해사 언저리의 솔숲 또한 기개가 가당찮아 보는 눈을 청신하게 하더니, 본사에서 백홍암까지의 오 리 산길은 따뜻한 빗발 뿐 인적이 드물었다.
아직은 살아 있는 땅인가. 진달래 무리마저 없이 물오른 나무 둥치들 뿐이었다. 산길 끝에서 문득 모습을 나타낸 백흥암은 등 뒤로 대숲만 둘러쳐 놓은 채 단청커녕 수묵칠도 올리지 않은 알몸이었다. 백지사란 뚜렷한 이름이 있었던 백흥암은 신라 경문왕 때 혜철 국사가 창건한 절이다. 조선조 때는 인조의 태를 수호하는 사찰로서, 본사인 은해사의 창건 원찰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극락전 건물은 영조 때 중건된 것으로서, 아마타삼존불을 떠받드는 수미단은 사실적이고 화려한 목조 새김으로 보불로 지정되어 있다. 세칸 팔작집이 단출한 극락전이나, 그 안에 모셔진 삼존불 또한 수미단의 격에 어울리는 것이려니와, 동서 좌우로 바트게 거느리고 있는 요사채 또한 관심을 끄는 것은 그에 걸린 추사 만년의 여섯 폭 주련 글씨 때문이다. “십홀방장”이란 현판이 걸린 서쪽 요사채의 이 주련들은 소식이 쓴 시를 내용으로 삼고 있다. “내가 유마 거사의 방장실을 둘러보니/능히 구백만 보살을 받을 수 있겠네/삼만이천 사자좌를/모두 다 받아도 비좁지 않아/능히 한 발우 밥을 나누어서도/시방의 무량 대중 배 불리리라.”
당우에 단청을 올리는 것은 부처님을 장엄하는 뜻에서 그러기도 하지만, 습기를 막아 니무의 부식을 막고, 벌레가 꾀지 않게 하려는 실용적인 목적도 아우른다. 그러나 단청도 길어야 이삼백 년 갈 뿐이니 흐르는 세월에는 도리 없을 것이다.
단청으로 부처님 장엄하는 꼴도 점점 수상해져 갈 뿐이니 그 시속이 육문스님은 마뜩치 않고, “나름의 방식”으로 떠받드는 극락전에 어울리도록 개축하고 신축한 열 채쯤의 다른 당우도 모두 단청을 올리지 않았다. 네 해 전에 서까래와 대들보를 제외한 목재는 모두 우리 소나무를 써서 새로 지은 설선당은 해가 나면 아직도 송진이 훌러나와 손발이 닿을 때마다 곤혹스럽다.
그러나 그는 그 송진이 자연스러운 옷이 되어 나무를 보호해 줄 것이라고 했다.

산은 절로 높고 구름은 스스로 흐르는데
한가한 구름에 잠시 나를 살어 보네.

바람이 부는 대로 맡길 일이지
이디로 흐르든 상관할 것 없네

십육 년 전인 81년도, 육문스님 나이 서른넷일 적에, 제방선원을 물과 구름으로 떠돌다가 이 곳에 언뜻 들러 하룻밤을 묵었다. 해우소 바닥에서 똥을 주워먹는 고양이와 마주치게 돼어 피차 놀라 그 다음날 새벽에 걸망을 지고 도망치듯 떠났었다.
그러나 인사도 못 여쭈고 떠니온 것이 뒤늦게 생각나서 다시 찾아 뵈온 부처님은 그에게 눈물을 보이셨다. 극락전, 방장실, 심검당, 명부전, 나한전 등이 있었으나 시늉 뿐, 그 무렵 백흥사는 폐사나 다름이 없었는데, 개금이 떨어져 얼룩덜룩 해진 부처님 얼굴이 그에게 눈물로 읽힌 것이다. 십 년 불사 길이 하도 고되어, 이제 그만 나 떠날랍니다, 싶을 때마다 부처님은 눈물을 보이셨다. “백흥암 앉은 터가 글쎄, 스님, 한 천 평은 되겠지요?”
십육 년째 이 곳에 좌중하여, 이제는 고향이 수덕사에서 은해사 백흥암으로 바뀔 지경인데도, 절 평수도 몰라 마주앉은 객승에게 어림해 달라고 청한다. 이런 황당한 노릇이 있는가.
다 지어 놓은 절에 나비처럼 곱게 날아들어 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극락전을 해체 복원하는 일만 해도, 실측하는 기간만 한 달이 걸렸다. 복원 불사란 신축의 몇 곱절 되는 비용과 품이 드는 일이었다. 극락전 앞의 두 당우도 본기둥의 중간중간에 새 나무로 쐐기를 해 박아 땜질을 하는 등, 옛 모습 고대로 지키려 한 그의 성심이 엿보인다.
이즈막까지도 잠이 없고, 공양간 무시로 드나들며 채공 노릇을 하려 들어 주지의 격을 스스로 낮추는가 하면, 몇 천 평이나 되는 밭의 울력뿐 아니라, 봄이면 나물 캐는 일에까지 손을 가만히 놓아 두는 법이 없는 것이 그의 천성이다. 그 천성으로 절 앞까지 이어지는 길 닦기에도 돌을 손수 등짐으로 져나르고, 파기와로 빗살무늬를 해 박은 일은 토벽 쌓는 일까지 거들어, 도량 안팎으로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다. 그러나 필요하면 용처 밝히고 돈 타내 갈 뿐, 안살림은 모두 젊은 스님들에게 일임해 두고 산다.
그가 주지 소임을 맡으면서 이 곳으로 함께 온 대중이 열댓쯤 되니, 찬거리는 지급한다 하더라도 쌀 장만하는 일도 녹록치 않았다. 선도도 없고 아는 데는 절 뿐이라, 인연 닿는 절마다 쌀 빌러가는 일은 온전히 그의 차지였다. 그러나 극락전 부처님의 명조冥助 또한 없지 않았으니, 간밤 꿈에, 빈 발우를 들어 보이시며 배가 고프다고 하소하시는 백흥암 부처님을 뵈었다고 생면 부지의 처사 한 사람이 쌀 여덟 가마를 싣고 온 적도 있었다.
‘불사는 불가사의한 것’이라는 뜻이라고 그는 말했다. 먹을 양식조차 곤궁한 가운데 단계적으로 일을 치러나가니, 십 년 불사를 원만히 이룬것은 부처님 법을 의지해서 바르게 살았더니 자연으로 이루어진 일이더라 했다. 선방 시절까지 남하고 시비 한번 붙는 일 없이 살았던 그가, “팔공산 호랑이”라는 별호를 얻게 된 것은 그 간의 어려움이 어떠했을지를 역으로 짐작케 하는 일이다.
자그마한 몸매에 얼굴 또한 고우나, 또렷한 입 그의 성정을 짐작하게 할 만하니, 머트로운 짓이나 경우에 어긋나는 꼴은 절대로 그냥 보아넘기지 못하고, 나서야 할 자리에서는 몸을 사리지 않는다. 대통령의 여동생이라고 찾아온 이에게 “권불십년이요, 화무십일홍이니, 뒷날 후회하는 일없이 하라”고 좋은 마음으로 일러줬다가 졸경을 치를 뻔했으며, 10. 27 법난 때 절에 들이닥쳐 수선을 피웠던 무리의 우두머리가 도무지 말을 삼갈 줄 모르는 그의 담대함에 놀라 뒷날 다시 찾아와 머리를 조아렸다는 이야기도 었으나, 이마도 가장 든든한 뒷배경은 부처님이었을 터였다. 법난 이후 석 달을 미행하고 다녔다는 기관원에게 그는 “고맙다”고 했다. 살아온 길이 여법하면서도 청정하여 거리낄 바가 없었으나 알아 주는 이 없었는데, 그 모습 다 확인했을 터이니 고마운 일이라는 뜻이었다.
지금도 종회의원으로서 지주 서울 드나들어야 할 형편이지만, 상경할 때에는 수원서부터 머리가 아파오고, 개인적으로 혼연히 지내는 비구스님들과도 공적으로는 얼굴 붉힐 일 허다한 것도 그를 곤혹스럽게 한다.
그러나 지난번 개혁 불사 때에도 비구니 스님들의 참종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큰 몫을 했거니와, 비구니 스님들의 신망 속에 아직도 더 애 쓸 일 남아 있어 어깨가 무겁다. 백흥암이 고운 토담벽에도 불구하고 겉보기부터 단단해 보임은 십오 년 넘도록 굳게 잠긴 보화루 빗장때문일 것이다. 아니다.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문경의 봉암사와 더불어 흔치 않은, 아니, 상시로 문을 잠가 속진을 스스로 단속하고 있는 유일한 비구니 수행처이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도 스물네 살 될 때부터 십 년이 넘게 동화사 양진암, 내원사, 해인사 삼선암 등 제방 선원에서 한 철도 거르지 않고 수행을 하던 몸이었다. 안거 때뿐만이 아니라, 내원사에서 머물 때는 산철 결제까지 도모했으니, 그 일은 아마 비구니 최초의 산철 결제였을 터였다.
이 곳으로 올 때도 좌복을 걷는다는 생각이 없었으므로, 처음 몇 년 동안은 그의 마음을 안 도반들이 죽비를 들려 입승을 시켜 놓았으나, 때거리도 없는 가난한 절 살림을 꾸려야 할 그에게는 지나친 일이었다.
그러나 좌복 위에 앉지 못하는 그 아쉬움이 이 곳을 온전히 공부할 수행처로 만드려는 그의 각오로 이어졌다. 부모에게 큰 빚 지고 중되었으나, 문 잠가 놓고 가난하게 살지언정, 잘 먹고 잘 입는 편안한 수행은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정신의 자유로움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닐 터였다. 사는 규모를 적정히 잡아 넘치지 않게 하는 한편으로 엄격한 자기 수행이 뒤따른 뒤에라야 비로소 귀하게 얻어지는 것일 터였다.
백흥암으로 출가하여 행자로 지내려면 각오가 남달라야 하니, 세 해 동안 허락 없이 바깥 출입을 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몇 번을 덧대 기운 헌옷에, 찍어 다른 양말과 행전 차림으로 스스로를 단속하면서 초발심을 지키게 된다. 그들은 곧 절문 앞에 성처럼 쌓아 놓은 나무로 불을 때 이십 분 만에 밥을 지으면서도 어려운 기색이 없을 만해진다. 또한 이 곳에 함께 온 그의 도반들은 깨진 기와 사이로 빗물이 흘러내리는 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좌복 위에 앉았다. 산철에도 결제가 끊어진 적이 없거니와, 오늘도 명부전에서는 한 스님이 사분정근으로 하루 아홉 시간씩의 삼 년 기도 중이었다. 비구니 스님들 오롯이 모여 사시는 도량 두 귀통이 든든히 지켜 주는 호동이와 청룡이, “쑥이 삼밭 속에서 자라니, 받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곧게 커 나가는 대중”과 함께 살면서 쓸쓸하지 않겄다. 쓸쓸하지 않은 뿐이겠는가. 하루 종일, 사철 내 독경 소리 듣고, 조성으로 서슬 프른 납자들 옷깃 스치는 일만으로도 내생에는 필히 축생은 여의것다.
지금 백흥암에는 대중이 결제 때는 마흔이 넘고, 산철에도 서른이 넘는다. 일 거드는 처사와 보살도 일곱이나 된다. 어려운 시절, 문도 활작 열어서 오는 신도 늘리고, 기도나 재도 슬며시 이끌어 살림 보탤 법도 했던만, 이도저도 아니었다. 이층 누각 문 굳게 걸어 잠가 놓고, 신도가 아니면 명자名字에 상관없이 오는 손도 따돌린다. 멀리까지 오실 것 뭐 있습니까. 서울 사람은 서울서, 부산사람은 부산서 재 지내도 되지요, 그리 말한다. 삼월과 칠월 두번 말고는 기도도 잘 안받는다. 두두물물이 부처님 안계신 데 없고, 절에서 올리는 기도는 스님 공덕만 쌓게 할뿐이니, 대비주 삼백독씩 하면서 집에서 직접 기도하라 이른다.
법문도 잘해주지 않는다. 한해에 많아야 두어 번 할까. 부처님 말씀을 두세시간씩 일러줘봐야 도랑 건너다 잊어 버릴터임을 익히 알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법당서 천배씩, 삼천배씩 절을 하게 하고. 두세 시간씩, 기도하게 한다. 어려운 노릇이니 그것이 제게 보배가 되고, 열심히 기도하는 가운데 스스로 정리가 되게 한다. 이렇게 방을 치고 살아도 영천과 대구 지방 사람들이 주를 이루는 신도가 꽤 된다. 초파인 날에 달 등으로 연등과 백등을 마련하되, 시주액에 따라 크기 달라지는 법이 없고, 적어나마 신심으로 시주하는 할머니들 등을 부처님 코 앞에 앞세워 달아 주니, 그 스님 믿는 마음이 더욱 돈독해지는 진자 신도들이다.
서른쯤 되는 상좌들 가운데 공부하는 스님이 절반이 넘거니와, 세속으로 나가서 포교하는 문제를 들고 나오는 이에게는 맵게 이른다. 경전만 돌돌 외어 전할 일이 아니라, 수행과 정진에 힘쓰면 그 끝에 저절로 얻어지는 바가 필연 있을 터이니, 그 여법한 행과 산소리야말로 상대방의 심금을 자연스레 울리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의 포교 방식이고 중노릇하는 방식이다.

열일곱 출가하기 전까지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부친의 영향으로 통감까지 읽은 탓인가. 그는 글이 밝다. 요즈음도 조사 어록과 채근담 따위를 즐겨 읽는다. 바느질 솜씨가 맵짜고, 붓글씨와 그림 솜씨도 어지간하여 이즈음에도 주위에서 자주 그림을 청하건만, 모자라는 솜씨 가진 이가 저지르는 처사라고 스스로 부끄러이 여긴다. 모두가 부질없는 객짓이다.
어느 날 맞닥뜨린 어린 조카의 죽음에 깊이 상심되어, 죽음을 여의지 못하는 사람사는 길에 깊이 골몰하다가 스님 한 분 만났다.
“스님, 극락 가보셨소? 푸르고 푸른하늘 어디서 극락 찾으실랴오.”
“이놈아, 니가 유서에서 읽은 대로, 네 마음 안에 극락이 있다는 것이 바로 불교의 가르침이다.”
부친이 명소에 주력하시던 아미타불이 그의 불전佛田이 되어 주었을 터였다. 금강경도 선가귀감도 글자로만 읽히어, 전강스님에게 화두를 타서 제방 선원을 떠돌았다. 그러나 공부가 여의치 않으면 그는 자주 화장막에 들르곤 했다. 손수 파 옮긴 묘가 예순 기가 넘고, 서른살 되기 전부터 염도 곧잘 했다. 그러고는 확인하곤 했다. 겉으로 보이는 형상의 끝은 이렇듯 텅 빈 것이다. 그 노릇 확인하고 배우기 힘을 쓰니, 새는 텅 비어 있어야 날 수 있음을 아는 까닭이다. 口

글/김 영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