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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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한승원
1997년 05월 183호
‘오늘 우리에게 오시게 될 부처님은 어디에 계시다가 오시는 것일까. 부처님이 오신다면 어떠한 모습으로 오실까. 오신 다음 우리의 무슨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도록 힘을 써 주시라고 빌어야 할까. 부처님은 과연 우리가 소원한 대로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우리의 몸과 마음에 힘을 실어 주실까’
극락에는 부처님이 계신다고 나는 믿는다. 그 극락을 공간 개념으로 믿지 않고 시간 개념으로 믿는다. 말하자면 하늘 저 끝 어디엔가 살기 좋은 극락이 있고, 땅속의 저 아래 어디엔가 지옥이 있다는 투로 믿지 않는다. 내가 숨쉬고 있는 현재의 이 땅, 이 공간 속에 그 세계가 나와 함께 숨쉬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부처님은 이미 와 계신 것이다. 혼자 와 계신 것이 아니고, 수없이 많은 보살들과 따르던 불제자들과 함께 와 계신다. 나는 그 분의 존재를 수시로 느끼면서 산다. 그 분은 내가 숨쉬고 사는 내 현재의 시공時空, 내 가슴속에 와 계시므로. 그렇다고 나를 접신의 경지에 이른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기 바란다.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부처님이고 관세음보살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웃고 있는 꽃, 노래하며 흐르는 시냇물, 출렁거리는 강과 바다, 떠오르는 해와 달, 반짝거리는 별들, 짖어대고 있는 개, 울고 있는 아기, 지저귀는 새들, 지팡이를 짚으며 걸어가는 노인, 내 집에 찾아와 서류에 도장을 받아가는 이장님, 내 매운탕거리를 대주는 어부 유씨 어른, 나를 읍내로 실어다주는 버스운전수, 내 아내, 어머니, 아들, 친구, 제자, 후배, 내 글들을 읽는 독자들, 내가 먹는 바지락, 매운탕 끓여 먹는 문절이, 회로 먹는 도미, 내 마당의 남새밭에서 뜯어 먹는 시금치들… 그들이 다 부처님이다.
“아. 잘 먹었다. 나같이 잘 먹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 한끼 한끼의 밥을 먹고 나서는 늘 이렇게 탄성을 지르곤 한다. 나로 하여금 그렇게 잘 먹고 살도록 해준 것들은 그분들이다.
“아이고, 당신이 하루 전에 전기밥통에다가 해 놓은 밥, 두 끼나 세 끼 전에 끓여 놓은 문절이 매운탕에다가 신 갓 김치 한 가지, 마당 한쪽의 남새밭에서 뜯어온 시금치 상치 조선무잎… 그것이 얼마나 맛있다고 그러셔요? 누가 들으면 끼마다 진수성찬을 드시는 줄 알겠소.” 오랜만에 온 아내가 이렇게 말을 한다.
나는 내 집안이나 내 마음 속에 두 가지 모습의 부처님이 나와 함께 늘 살기를 희망하곤 한다. 자비로운 얼굴 자비로운 마음을 가진 부처님과 진실로 강한 진실을 무장한 얼굴과 마음을 가진 부처님.
자비로움과 강한 진실은 두 개의 수레바퀴이다. 아니, 그것은 둘일 수 없다. 하나이다.
얼마 전부터 이 땅의 아버지들이 약해졌다고, 무엇이 이 땅의 아버지들을 약하게 만들었느냐고, 그 약한 아버지들에게 용기를 주어야 한다고, 강한 아버지가 있어야 이 사회가 튼튼해진다고 떠들어대고 있다. 퇴직의 공포에 시달리고, 퇴직을 하고 나서 퇴직했다는 말도 못하고 맥없이 고개 숙인 채 배회하는 가엾은 아버지, 불황으로 말미암아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 소외된 채로 거세된 수컷처럼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린 아버지의 왜소해진 존재.
이 땅에 오시는 부처님은 그런 허약한 어른들의 모습으로 오셔서는 안 된다. 기둥노릇, 대들보 노릇을 하는 어른들을 약하게 만들어 놓고 눈물 질금거리며 동정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이다.
정치, 경제가 혼란속에 빠져 있는 이때에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야 할 부처님은 자비로움과 강한 진실을 동시에 가진 어른들의 얼굴이어야 한다. 고생하여 벌어 놓은 외화를 낭비하러 뛰어다니는, 군것질하고 어리광 피우고 떼쓰는 어린이의 모습을 한 어른도 아니어야 헌다. 어지러운 때에는 흔들리는 세상을 버탱길 수 있는 버팀목이 필요하다. 꿋꿋한 진실과 이성으로 무장된 자비로운 마음. 그러한 부처님이 어디에 계시다가 어떠한 모습으로 무슨 일을 하러 오신단 말인가. 부처님은 외부에서 계절풍처럼 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읽은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 내 속에서 그러한 모습을, 강한 진실과 지헤로운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잠들어 있는 그러한 모습 그러한 마음을 깨어나게 해야 한다. 꿋꿋한 진실과 이성으로 무장된 자비로운 마음을.
부처님은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 자신만만하면서도 오만하지 않고 진실되면서 자비로운 나의 모습으로 와야 한다. 내가 주인인 내 몸과 내 세상의 버팀목 노릇을 하는 강한 어른의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