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대 대통령선거를 몇 달 앞둔 92년 7월, 의현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은 특정 정치인을 찬양하는 자신의 발언으로 사과문을 발표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이 온다고 하신 위대한 정치가” 운운한 것이 발언의 요지였다. 세 김씨 가운데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꼽히던 김영삼씨를 두고 한 말이었다. 중앙승가대 학인 1백여 명이 총무원 청사 앞으로 몰려와 의현 총무원장에게 발언을 취소하고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불교와 정치와 관련되어 이름이 거론되는 또 다른 스님은 성철 스님이다. 정치인들이 찾아와도 3천배를 해야 만나 주었고, 만나서도 지극히 당연한 한마디 말씀으로 돌려보냈다. 다시 성철 스님과 의현 스님의 일화가 회자되는 시기가 왔다.
민주당은 지난 2월 13일 열린 당4역회의(대표, 정책위의장, 사무총장, 원내총무) 에서 비상설특위로 있는 종교특위를 상설특위로 격상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민주당은 현재 여성, 인권, 농어민, 외교안보 등 8개 특위를 두고 있는데, 종교문제를 다룰 위원회를 상설특위로 한다는 것의 무게를 짐작케 한다. 내년 지방선거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일찌감치 조직 강화에 나선 것이라는 분석이다. 민주당의 한 불교인사는 “종교계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감안한 조치”라며 종교 특위 상설화의 속뜻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한나라당도 지난 1월 19일 조계종 총무원장 정대 스님이 이회창 총재를 비판한 발언 이후 종교를 염두에 둔 움직임에 속도를 내고 있다. 정대 스님의 발언에 대해 당내에서는 불교계를 너무 의식하지 않은 결과로 보는 이도 있는 터인데, 두 사람의 만남을 통해 소원함을 털어버려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다고 한다. 일부 언론에는 두 사람의 만남을 기정사실로 다루기도 했는데, 불교를 멀리해서 이득될 것이 없다는 한나라당의 속내를 간접적으로 드러낸 기사로 읽힌다.
이에 앞서 민주당은 당내 신행단체인 연등회를 통해 불교를 관리(?)해 왔다. 어지간한 불교행사에는 연등회 소속 의원 한두 명이 꼭 얼굴을 내밀었다. 농지법?전통사찰보존법?자연공원법 등 불교계가 개정을 원하는 법들의 개정에도 힘 을 기울였고, 불교계로부터 잘 하고 있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한나라당은 최근까지 당내에 기구를 두지 않았는데, 정대 스님의 발언 이후에는 ‘전통문화 진흥’ 등의 정책적인 지원에 관심을 기울이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97년 대선 투표 열흘을 앞두고 한나라당의 ‘파계승 탈’ 사건이 터졌다. 김대중 후보와 이인제 후보를 비판하는 가정방송용 소형인쇄물에 민속탈을 그려 놓고 ‘파계승 탈’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를 비롯한 불교단체가 일제히 규탄에 나섰는데, 이 사건으로 불교계에서는 이회창 후보의 표 가운데 최소 10만 표는 날아갔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파계승 탈’ 같은 자극적인 사건이, 그것도 투표일에 임박해서 터졌으니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정치 현장에서 뛰는 사람들의 발달된 감각으로 보는 불교와 정치의 관계는 어 떤가. (불교=표로 보는 시각이라는 것을 참고하고 들어야 할 말이다.) “총선 때는 불교표의 향배가 당락을 좌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선의 경우는 판이하게 다르다. 불교표는 다른 종교에 비해 결집력이 강한 편이다. 불교표를 잡는 후보가 승리한다.” 이 말을 한 정치인은 지금 내년 대선 후보로 거론되는 한 정치인의 보좌역을 맡고 있다.
우리나라의 종교가 정치적 태도와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주장이 있지만,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종교사회학자들은 정치적 견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종교, 출신 지역, 직업, 사회계층, 교육, 연령, 성별 등 많은 요인들이 정치적 선택에 영향을 준다고 보고 있다. 종교가 영향을 미친다고 해도 여러 요인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우리나라처럼 지역감정이 드센 곳에서는 종교에 따른 선택은 더 적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90년대 이후 몇 차례의 대통령선거를 경험하며 후보의 종교에 따라 정치적 선택을 달리했음을 느끼고 있다. 92년 대선 당시 김영삼 후보는 “집권하면 청와대에 찬송가 소리가 울려 퍼지게 하겠다”는 말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이회창씨의 ‘파계승 탈’ 사건이 불교계의 큰 반발을 불러온 것도 그가 천주교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지역감정에 미치지는 못하겠지만, 종교감정의 파장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집권 기간 동안 불교계는 비판적 입장을 취했는데, 94년 조계사 사태 때는 당시 내무장관의 사퇴와 김영삼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김 전 대통령은 또 취임 초기 국방부 내 중앙교회를 방문해 예배를 보며 예불과 미사에 참여하려는 불교와 천주교 신도들을 경호를 이유로 차단해 사과요구에 처하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상황은, 사안 자체가 불교신도의 분노를 가져오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가 개신교의 장로라는 직분을 가지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김영삼씨와 이회창씨의 경우는 종교감정이정치적 선택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려 주는 사례이다.
문제는 불교지도자들의 태도이다. 불교지도자(스님)라 하더라도 영향력은 예전처럼 크지 않다. 다원화된 사회의 특징이다. 물론 대면 횟수가 많은 신도들의 경우 스님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지만, 정치적인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 영향력의 진폭이 그리 크지 않다. 그럼에도 불교지도자가 특정 정치세력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태도를 취할 경우 교단은 정치적인 이유로 통합력을 상실할 수도 있다. 불교지도자의 영향력은 조직장악 력이나 물리적 힘이 아닌 도덕적 우월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도덕적 우월성의 확보 없이 드러내는 정치 편향성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을 불러들일 수도 있다. 다음의 조사 결과는 불교지도자를 포함한 종교지도자들의 사회적 신뢰도가 얼마나 추락했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이다. 이를 보면 불교지도자들이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먼저 갤럽조사연구소가 98년에 조사한 ‘한국인의 종교 실태와 종교 의식에 대한 조사’의 일부분이다. 우리 국민들은 종교단체가 참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교세 확장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보고 있다. 불교인의 75.5%, 개신교인 64.8%, 천주교인 79.9%, 무종교인의 86.5%가 그렇다고 응답했다. 삶의 의미에 대한 해답도 주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불교인 60.0%, 개신교인 51.4%, 천주교인 57.8%, 무종교인 68.7%) 최근 서울시립대 반부패행정시스템연구소의 조은경 선임연구원의 조사 내용도 갤럽의 조사 결과와 궤를 같이한다. 기업인 10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기관별 부패인지도를 묻는 설문에 응답자의 51.8%의 사람들이 종교단체를 꼽았다. 청와대(45.3%) 한국은행(44.5%) 시민단체(35.1%)보다 더 부패하다고 보는 이번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다. 두 기관의 조사 결과는 종교단체의 신뢰도가 추락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하나의 예이다. 따라서 불교지도자들은 불교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세속의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기보다는 도덕성의 확보를 통한 귀의처로서의 역할에 더 충실해야 한다. 백 번을 양보해서, 정치라는 것이 자원과 권력의 분배를 규정하고 결정하는 행위이므로 불교도 무관심할 수 없는 일이라며, 정치에 관여하고 싶다면 경전의 가르침을 한번은 곱씹어 봐야 할 것이다.
불교의 정치론은 《화엄경》 《정법염처경》 《보행왕정론》 등 여러 경론에 설해져 있으며, 자비정신의 실현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요즘 말로 하면 인권, 환경, 약자에 대한 배려 등 보편적 가치의 추구이다. 다음은 《화엄경》에 나타난 정치지도자의 덕목인데, 현실의 정치를 대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삼을 만하다.
“금지하고 억압해야 할 자를 금지하고, 통제해야 할 자를 통제하고, 죄를 범한 자를 처벌한다. 논쟁하는 자들의 논쟁을 그치게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안심시키며, 오만한 자들의 기를 꺾는다. 살생을 금지시키고, 주지 않는 것을 갖지 않게 한다. 남의 여인을 탐하지 않고, 식언을 하지 않게 하며, 이간질하지 않고 험악한 말을 하지 않도록 한다. 비열한 말을 하지 않게 하며, 탐욕을 멀리하고 분노를 멀리하며, 사악한 견해를 버리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