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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 이야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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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 산책 - 재연 2001년 03월 229호
자기보다 더 소중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 내게 좋은 것은 남에게도 좋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남들도 싫어한다. 그래서 내가 소중한 만큼 남도 소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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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젖먹이 동물은 제 어미 혹은 누군가의 젖을 먹고 자란다. 그러나 인간 말고는 다 자란 뒤에도 소, 말, 낙타, 심지어 염소 따위의 젖을 빼앗아 먹는 짐승은 없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젖먹이다. 늙어서도 젖을 먹는 주제에 교활하기 짝이 없다. 피부색깔이 다른 인간을 싸잡아 멸시하고 착취하는가 하면, 자기들과 다른 방향에서 세상과 인간을 바라본다는 이유로 동족을 잡아 가두고, 으르렁거리고, 끝내 피를 뿌린다. 인간은 가장 왕성한 식욕과 무서운 파괴력을 가진 동물이다. 인간이 먹지 못하는 것, 부술 수 없는 게 무엇인가? 지구상에 우리 인간과 비슷한 생물이 하나만 더 있었더라면 이 세상은 이미 오래 전에 끝장을 보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평생 애써 모은 재산을 보지도 듣지도 못한 사람에게 통째로 내놓는 변종이 있는가 하면, 종종 생면부지의 타인을 구하기 위해 제 목숨을 던지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남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어쩌면, 그래서 성스러운(비인간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가장 인간적인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선행이란 어떤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이런 의문은 언제 어디서나 있게 마련이다. 가장 좋은 예로 상응부 아함에 말리까 Mallik라는 이름의 짧은 경(Samyutta, I, Mallik sutta)을 들 수 있다. 말리까는 코살라 국왕 파세나디의 왕비다. 난간에 기대 서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파세나디가 말리까 부인에게 물었다.
“당신 자신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있겠소?”
파세나디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언가 묻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내게 당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고 말해 주기를 기대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말리까의 대답은 의외로 썰렁했다. 대개 진실은 미지근하고 덤덤한 것이다.
“제 자신보다 더 소중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대왕께서는 어떠신가요?” 시큰둥해진 왕이 한참 동안 생각해보고 나서 말했다.
“말리까, 나 역시 나 자신보다 더 소중한 사람은 없는 것 같구려!” 왕은 그 길로 부처님을 찾아가 그 이야기를 고했다. 저간의 정황을 헤아리신 세존께서 게송으로 답했다.

이 세상 어디에도
나보다 기꺼운 것은 없어라
그토록 소중한 것 남들 또한 그럴지니
제 자신을 아끼는 사람
남 해치지 않으리

위 게송은 Udn(無問自說經, 47)에 다시 나온다. 여기 “자신”이라고 옮겨진 단어가 원문에서는 ‘att’ 곧 ‘아뜨만’이다. 아마도 온 불교 역사를 통틀어 이만큼 많은 논란과 시비를 불러온 용어는 없을 것이다. ‘att’는 보통 ‘자아’ 혹은 ‘영혼’으로 번역되었는데, 이 경전의 영역본에는 ‘Soul’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앞뒤 문맥으로 보아 여기에 ‘영혼’이라는 말은 어색하고 맞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물론 우리말 ‘자신’이라는 단어에는 목숨, 자존심, 명예 등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같은 상응부 아함(Samyutta, I, Nandana)에 똑같은 용례가 있는데,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이 세존께 말한다.

아들처럼 사랑스러운 것 없고
소 떼 같은 보물은 없어라
태양에 견줄 빛은 없느니
물 가운데 바다가 으뜸


여기에 세존께서 게송으로 반박한다.

제 자신처럼 소중한 것 없고
곡식 같은 보물은 없어라
지혜에 버금갈 빛은 없느니
물 가운데 빗물이 으뜸

앞에 인용한 경문에서 ‘자신’이 남(他人)에 대한 대어로 쓰였듯이, 이 경에서도 아들에 대한 대어로 ‘자신’이라는 단어가 쓰인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영역에서는 ‘the inner self’라고 옮겼다. ‘자기 자신’이라고 하면 될 ‘att’를 굳이 ‘영혼’ 혹은 ‘영적인 자아’라고 쓴 사람들의 속셈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 사람들은 아마 쉽고 간단한 말을 쓰는 것은 부처님과 경전의 권위를 해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부처님의 법문은 무언가 고차원적이고 심오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오해의 소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떻게 보아도 여기에 영혼 따위의 용어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파세나디 역시 그렇게 이해했던 것임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만약 그가, 20세기의 유럽 학자들처럼, 인간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이 영혼이라거나 영적인 자아라고 생각했다면 부처님을 찾아가 물어보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로 하여금 부처님께 그런 질문을 하도록 한 것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이해가 과연 옳은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참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남을 해쳐서는 안 된다. 그에게도 자신은 가장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은 그것 자체로 완벽한 의미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힌두교도들이 최고의 성서로 떠받드는 바가왓기타(VI, 32)에도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오, 아르주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세상 만사를 자기 자신에 비추고 거기 동일성을 보는 자 그를 일러 완벽한 요기(yogi)라고 하리라!

철저한 힌두교도이며 20세기 최고의 바라문 학자 라다크리쉬난 Radhakrishnan도 이 게송에서 문제가 되는 ‘아뜨만tman’을 자기 자신(his own self)라고 번역한 바 있지만, 사람들은 ‘아뜨만’이라는 용어에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 같다. 그래서 이 단어가 나오면 먼저, 대문자 ‘S’로 시작되는 ‘Soul’ 즉, ‘영혼’이라고 써 놓고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연히 어려운 건 싫다. 쉽게 말하자: 인간에게 ‘자기 자신’처럼 소중한 것은 없다. 내게 좋은 것은 남에게도 좋고,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남들도 싫어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남에게 해 주고, 내가 싫어하는 것 남에게 시키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