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천불천탑千佛千塔의 성지 운주사(상)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성보여화 - 정영호 2001년 03월 229호
- 눈 속의 다탑봉多塔峰 -

필자가 이 곳을 처음 찾은 것은 6?25동란 중 서울 수복 직후 겨울철이었다. 화순읍내의 기차역에서 걷기 시작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능주에서 도암으로 가는 들판과 골짜기 여기 저기에 크고 작은 지석묘支石墓가 가득하였던 일이다. 그 때의 기억은 큰 지석묘의 뚜껑돌 위에 건축물이 있었고, 군데군데에 무리를 지었는데 그 수효가 수백 기에 이르렀던 것 같다. 인적도 드물어 가는 길이 확실한지, 또는 얼마나 더 가야 운주사에 도착할 수 있는지 물어 볼 수도 없어 무작정 길을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 허허벌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루함을 덜어 준 것은 길 양쪽에 흩어져 있는 지석묘들 덕분이었다. 몇 시간을 걸었는지 마을이 나타났다. 그 곳에서 노인 한 분을 만났는데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운주사가 있는 곳을 물었으나 알아듣지 못하길래 ‘천불천탑’, ‘도선국사 전설’ 등을 이야기하니 그제서야 ‘저 고개를 넘으면 보일 것’이라는 대답을 해 주었다.

대초리大草里 고갯마루에서 운주사 골짜기를 내려다보니 하얀 눈 속에서도 석탑과 석불이 가득히 골짜기를 메우고 있었다. 가히 천불천탑의 성지라 하겠다. 이렇듯 신기한 석탑/석불군群의 건조는 역시 도선국사道詵國師의 신통력 설화가 나올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되었다. 3칸 건물 한 채에 부처님 한 분을 모시고 노장 스님이 혼자서 기거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작은 건물이 곧 법당이고 승방, 요사채였다. 당시로써는 이 스님으로부터 석탑과 석불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었다. 물론 관련자료의 수집 청취는 더더욱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눈 속에서 여기 저기 산재한 석탑과 석불의 사진 촬영에 만족해야만 했다.

운주사는 전라남도 도암면 대초리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많은 석탑과 석불이 건조되어 있는 것은 현재의 운주사 대웅전과 요사채 등 부속건물들이 있는 대초리뿐만 아니다. 남쪽으로 길게 드리운 골짜기 가운데 평지와 좌?우 산비탈까지 포함하여 그 범위가 용강리까지 뻗쳐 있어 상당히 넓다. 그러므로 1985년 4월 15일 이 곳 유적을 국가에서 사적 제312호 「화순운주사지일원和順雲住寺地一圓」으로 지정할 때 그 범위를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용강리까지로 한 것이다. 497,090㎡ 넓이에는 국유 및 사유지까지 포함되어 있다.

1980년대에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이 곳에 대한 본격적인 학술조사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지표 및 발굴조사 보고서를 간행하여 운주사에 대한 연구 결과와 많은 자료를 학계에 제공하였다.

「운주사」라면 천불천탑의 성지요, 바로 석탑과 석불을 일컫게 된다. 그러므로 이 곳에서의 가장 핵심은 석탑과 석불인 것이다. 그러므로 「운주사의 불적」은 일반적으로 「다탑봉의 천불천탑」이라 불리고 있으니 이는 신라의 도선국사가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만들어 세웠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별칭인 것이다. 다탑봉이라 일컫는 이 곳 천불산千佛山 골짜기에 현재 운주사가 있다. 이 절의 남쪽 좁은 골짜기에 군데군데 경작지가 있으며 사방 주위에는 암석이 노출되어 있다. 석탑들은 이 산골짝의 평지와 암석 위에 건립되어 있다. 그리고 석불은 암석 하부가 우묵하게 잘리어져 자연적인 불감형佛龕形을 이루고 있는 곳에 몇 구씩을 안치하고 있으며 간혹 산기슭 평지에도 봉안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곳 다탑봉의 석탑과 석불에 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0 〈능성산천불우綾城山川佛宇〉편에 「천불산千佛山 재현서在縣西 이십오리二十五里」, 「운주사雲住寺 재천불산在千佛山 사지좌우산배寺地左右山背 석불석탑石佛石塔 각일천우유석실各一千又有石室 이석불상배이좌二石佛相背而座」라고 되어 있고 능주읍지 등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의 기록이 보인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보면 이 곳 운주사의 불적은 오래 전부터 주목되어 왔었음을 알 수 있다. 1941년도의 조사집계로는 석탑이 22기이고 석불이 71구였다. 그런데 1980년도 조사에서는 석탑이 18기로 4기가 줄었고 석불이 70구로 1구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석불의 경우는 완전한 형태만을 조사한 것으로 머리부분과 동체부분만이 남아 있는 것까지 합치면 100구가 훨씬 넘었다. 이들 석탑과 석불의 건립, 조성시기는 대체로 고려 중엽 이후로 추정된다. 석탑들이 건립되어 있는 위치와 석불들의 안치장소 등은 당시의 신앙적 배경을 생각해야 할 것이며, 각기의 건조양식과 수법 또한 당시 고려라는 시대성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천불천탑에서 가장 주목을 끌었던 것은 불감佛龕이었다. 원형다층석탑의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곳이 원위치로 추정된다. 지대석 위에 여러 개의 판석으로 조립하여 기단면석을 구성하고 그 위에 넓적한 갑석을 놓아 장방형의 감실을 만들고 있다. 불감의 구성은 여러 개의 판석으로 좌?우 벽을 만들고 앞? 뒤 면에는 좌?우에만 판석 1매씩을 세워 막음하고 중간은 통하도록 시설하고 있다. 지붕은 팔작의 형태인데 정상에는 두툼한 용마루가 직선형으로 마련되어 있고 그 좌우에는 「치미형」이 모각되어 있다. 낙수면은 정상부에서는 다소 급경사를 보이나 중간쯤에서는 완만해졌다. 전각은 얇고 네 귀퉁이 전각에는 반전등의 표현이 없다.

이렇듯 석재로써 거대한 불감을 조성한 것은 그 유례가 없다. 따라서 이 불감은 건축적으로도 주목되는 작품이라 하겠다. 이 불감은 원래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 현재도 이 감실 내에는 앞뒤에 개설되어 있는 실내에 각기 1구씩의 석불좌상이 배치되어 있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중략) 우유석실又有石室 이석불상배이좌二石佛相背而座」라 한 것이 바로 이 감실 안의 석불 2구를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

남향한 불상은 결가부좌한 거대한 좌상인데 상호는 평면적이나 목에는 삼도가 돌려져 있어 사실적인 면이 보인다. 뒤편의 북향한 불상도 결가부좌한 거대한 좌상인데 의문衣文은 도식적이며 동체는 평면적이다.

이 2구의 불상은 물론, 불감도 고려시대의 조성으로 추정된다. 비록 각부의 치석이 세련되지는 못하였으나 이러한 유례가 없으므로 불교미술 연구에 귀중한 자료들이라 하겠다. 이 불감은 「운주사석조불감」이란 명칭으로 1984년 11월 30일 보물 제797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