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주사 강주 철운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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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이연정
2001년 03월 229호
생각보다 작은 방이었다. 그래도 풍광이 좋아 문을 열면 앞으로는 눈 덮인 수정봉이 마주하고, 뒤로는 관음봉의 장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전 스님이 터를 아주 잘 잡아놓았어.” 원래 강주 스님 방은 따로 있단다. 그런데 전 강주 스님이 이 곳을 처소로 삼아왔던 터라 그대로 사용하게 된 것이라는데,스님은 썩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다. 청산에 사는 것에 더해 문만 열면 청산을 마주하게 되니 예가 바로 극락이라 이른다.
久在塵勞中 오랫동안 진로 가운데 있다보면 昧却本來事 본래사를 잊는다.
今朝收萬行 오늘 아침에 만행을 거두고 速還靑山來 빨리 청산으로 돌아오너라.
이는 문수보살이 보현보살에게 준 게송으로, 일타 스님께 받아 좌우명처럼 늘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말씀이다.
동국대 재학시절이었다. 겨울방학 때 도반과 함께 해인사 지족암에서 일타 스님에게 《금강경》과 《원각경》을 배운 적이 있다. 중간에 도반이 그만두는 바람에 스님 시봉을 하면서 혼자서 아침에 한 시간 정도 경전을 배웠는데, 학교에서는 경전강의를 들을 수 없었기에 경과의 인연은 일타 스님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일타 스님께서도 무척 흡족해 하셨다는데 방학이 끝나고 서울에 올라간다고 말씀드리자 스님께서 써 주신 것이 바로 이 게송이었다. ‘저잣거리에 나가 돌아다니다 보면 출가한 본분을 잊어 버리기 쉬우므로 학교를 마치면 빨리 청산으로 들어와 살아라. 그 속이 수행자가 살아야 할 곳이다.’라는 말을 일타 스님은 하신 것이라고 철운 스님은 이해하고 있다. 그 영향일 것이다. 스님은 언제 어디서건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청산임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포교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어느 날 지금 대구에서 포교를 열심히 하고 있는 우학 스님에게 물은 적이 있다. “스님은 보현보살의 10대원 가운데 뭐가 제일 좋소.” 그러자 도반 스님은 ‘수순중생원隨順衆生願’이라 했다. 중생 따라 포교하는 게 가장 좋다는 말이다. 그러자 스님은 “나는 ‘상수불학원常隨佛學願’을 꼽았다. 부처님 말씀 따라 배우는 것이 제일 좋을 것 같았다.
동대를 졸업하자마자 해인사 강원으로 향했다. 그 때 스님은 이미 비구계를 받은 상태로 대학까지 졸업하고 강원에 들어가는 것은 흔치 않은 경우였다. 스님의 세수 올해로 갓마흔. 현재 16개 강원의 강주 스님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적다. 물론 법랍은 뒤지지 않아 22년. 일찍 불가에 입문했다. 숙세의 인연이 깊었는지, 불교집안에다 절(강원도 삼화사) 근처에 살아 늘 스님을 보게 되고 종소리를 들으며 살았다. 어느 날 어머니 손을 잡고 절에 갔는데 그 절 스님이 “나랑 같이 살래?”하자 서슴없이 그러겠노라고 했고, 그 때부터 스님의 절집 생활은 시작됐다. 그 때 나이가 열네 살이었다. 절에 와 몇 달이 지나 은사 스님이 승복을 지어와 ‘입으라’ 하시면서 이름도 지어 주셨다. 그 이름이 바로 철운撤雲이다. ‘거둘 철撤 구름 운雲’ 구름을 거둔다는 의미다. 그러면서 “넌 총명하고 진실하니 커서 강사가 되거라.” 하신 말씀을 듣고 무척 좋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가르쳐 주면 뭐든 잘 외웠다고 한다. 그 덕에 주변 스님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여름이 되면 은사 스님은 49일 동안 깊은 산속 바위 아래 토굴에 들어가 공부를 했다. 그러면 동자승 철운은 사흘에 한 번씩 물과 음식 나르기를 거르지 않았다. 어느 해인가 토굴생활을 끝내고 나오신 은사 스님 하시는 말씀 “너는 시봉을 잘했으니 공덕이 많이 쌓였을 거다. 그게 사는 데 도움이 많이 될 게야.” 하셨는데 그 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스님에게도 갈등의 시기는 있었다. 공부를 하고 싶은 생각에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나오고 대학입학 수능을 봤는데 성적이 과히 나쁘지 않았다. 당시 ‘법대’냐 ‘선학과’냐를 놓고 한동안 고민을 했다는데 결국 선학과를 결정하면서 출가자로서의 길을 비로소 확실히 선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동대를 졸업하고 강원까지 졸업하고서는 한 2년 서울의 포교당에서 부전승 노릇을 하며 영어, 일어를 공부했다. 스님은 우스갯소리로 한때 ‘콜승’이었단다. 그러면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것이냐 대학원을 갈 것이냐를 놓고 또 한번 갈등하기도 했는데 결국 근본불교를 공부하겠다는 생각으로 미얀마행을 택했다. 미얀마의 한 사원에서 수계를 받고 1년간 수행을 했는데 무리한 수행으로 몸이 많이 축났다. 미얀마에서는 수계를 받자마자 3개월간 계율을 가르친다. 아침에 일어나 죽을 먹고 바로 한 시간 탁발을 나간다. 하루에 여섯 시간 앉고 여섯 시간 걷는다. 오후 불식이라 12시 이후에는 차도 마실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차는 못 마셔도 물과 콜라, 사이다, 주스는 된다는 점이다. 하루에 한끼를 먹다보니 그 한끼를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그러나 한국에 돌아와 세끼를 먹다보니 소화를 못 시켜 위장병이 생겨 고생을 했다고 한다. 스님이 미얀마에서 가장 감명받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스님과 신도의 신뢰관계. “미얀마에서는 아침마다 탁발을 나가는데 아무리 비가 와도 스님이 신도집을 가고, 신도는 공양물을 해 들고 나온다는 것이야.
신도는 생각해. 비가 이리 많이 오는데 내가 스님을 대접하지 않으면 누가 공양을 하겠나. 그리고 스님 역시 내가 안 가면 신도는 밥을 해 놓고 기다리다가 얼마나 허망하겠나라고 생각하는거지. 그러면서 알게 됐지, 미얀마 불교의 원동력은 스님과 신도간의 신뢰라는 것을.” 스님은 신뢰를 강조한다. 스님과 신도 사이에도, 학인과 강사 사이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일 것이라고. 젊기 때문에 우려가 있었을 수도 있으나 그럼에도 법주사 강원의 강주 소임을 맞게 될 수 있었던 것도 신뢰의 소산이라 여기고 있다.
실상 학인들 가운데는 강주 스님보다 나이 많은 학인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통솔하는 데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학인들은 어느 때보다 수행자로서의 자세를 유지하려 애쓰고 있다고 한다. “특별히 노력한 것은 아닌데 자연스레 정화가 되는 것 같아요. 지켜야 할 율에 벗어나는 사람은 스스로 도태되는 분위기예요. 지금 법주사 강원이.” 지금까지 신뢰의 경계를 벗어난 적이 없는 강주 스님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게 마련이듯. 스님은 율을 어겨본 기억이 없다.
늦게 출가한 사람들이야 술, 담배에 익숙해 그것을 끊지 못해 징계를 받는 경우가 있지만, 철운 스님은 아예 입에 대보지를 않았기 때문에 애쓸 필요조차 없었다. 그래도 스님도 사람인지라 호기심이 발동할 수도 있지만 스님은 아니었다. 왜? 스님은 그런 것을 해선 안되니까.
여자에 대한 관심이 없을 수 없는 사춘기 때, 삼화사에는 수련대회 오거나 소풍 오는 또래의 아이들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스님은 그 때마다 뒷산으로 올라가 아이들이 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 비로소 절로 돌아오곤 했다 한다.
왜? 수행자니까. 소위 말해 스님은 모범생이었다.
요즘 속가 아이들이라면 아마 숙맥이라 표현하지 않을까 싶다. 스님 표현을 빌리면 자신은 산 지키는 굽은 나무다.
“자기 그릇에 맞춰 사는 거지. 나는 산 지키는 것이 내 역량에 맞으니까. 옛말에 굽은 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똑바르면 누가 일찌감치 찍어가지만 구부러져서 쓸모없게 보이니까 산을 지키고 있는거라. 그러나 산으로 봐서는 산 지키는 나무가 소중한 거지.” 주변에서는 은근히 스님에게 거는 기대가 있다.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 안주하고 타성에 젖겠지만 젊으니까 새롭고 개혁적으로 뭔가 달라지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철운 스님은 오히려 거기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 스님은 결코 무리를 하며 일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한때 학인들 사이에서 논란이 됐던 시험에 대해서도 스님은 아직 그것을 평가의 수단으로 사용하기에 무리가 따른다는 생각이다. 스님이 맡고 있는 반의 과목이 끝나면 시험을 치긴 하는데 점수를 매기지는 않는다.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뿐이다. 그러다 보니 학인들이 오히려 시험을 반긴다. 스스로 정리가 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강원을 옮기려면 공부하던 곳에서 전학증을 끊어가야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잘된 조치 같다고 말한다. 일단 학인들의 소재가 파악될 수 있고, 전에는 한철 끝나면 가는지 오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스님 가겠습니다.’하고 인사 정도 하는 것으로도 수확은 얻었다고 본다. 통제가 된다는 말이다.
스님은 개혁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원칙적이다.
“내가 할 일은 강당을 사중의 들러리가 아닌 수행공간으로 만들어 주는 일이라고 봐요. 행주좌와 어묵동정 속에서 수행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 어떤 사람들은 강당의 이상을 높이 가지려고도 해. 그 곳을 나오면 주지 할 자격이 돼야 한다든가, 포교사 자격이 주어진다든가, 행정능력이 갖추어져야 한다든가 하는.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아, 강당은 수행자의 기본자세를 갖추는 기초단계로 봐. 졸업하고 포교사가 되든, 선방으로 가든 각자 갈 길을 가는 것이지, 이 안에서 다방면의 전문가로 키우는 것은 무리가 있지. 강당은 수행자의 기본자세를 갖추는 공간으로 충분해. 그리고 생활자체가 수행이 돼야지. 예불드리고 발우공양하고 종치고, 울력하고 이런 생활이 수행이고 그것이 공부지.” 스님은 ‘학인’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출가했으면 수행자라 부르고 항상 수행자임을 각인시킨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적응을 하지 못하고 왔다갔다 하는가 하면, 결국 마을로 다시 나가 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스님은 강당에 재미를 느끼도록 일주일에 하루는 재미있고 기대되는 과목을 신설할 계획이다. 수행자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붓글씨라든지, 찬불가를 한다든지 하는.
“수행자집단이긴 하지만 재미도 있어야겠다 싶어요.” 적응을 못하고 속가로 돌아가는 출가자를 보는 것이 가장 가슴 아프다고 스님은 말한다. 그래서 철운 스님은 학인 스님들에게 ‘속가로 돌아가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어려서 스님에게 제일 겁나고 싫었던 말이 바로 ‘잘못하면 집으로 쫓아 버린다.’는 엄포.
“최치원 선생의 시 중에 이런 것이 있어요. 道不遠人 人遠道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으나 사람이 도를 멀리하네.
山不離俗 俗離山 산은 속을 떠나지 않으나,속은 산을 떠나네.
산은 속을 떠나는 법이 없지요.
속이 산을 떠날 뿐. 무슨 연유로 들어왔건 산은 늘 그대로 그 자리에서 받아들입니다.” 해가 벌써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려 한다. 이제 속인은 산을 벗어나야 할 시간이 왔다. 급히 인사를 하고 왔던 길을 따라 산을 나서며 잠시 고개를 돌려 뒤돌아보니, 산을 지키는 굽은 나무를 자처하는 철운 스님은 내 왔을 때 맞아 주던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꼿꼿이 서 계신다. 속은 비록 산을 떠났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