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茶를 만난 그 이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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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백도현
2001년 03월 229호
‘오래 된 두통을 말끔히 씻어낸 맑은 기분’ 이것이 내가 차를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이었다.
이것은 감미롭다거나 향그럽다거나 하는 정도의 표현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서설瑞雪에 핀 소나무의 눈꽃 같은 아름다움이었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경지境地가 있는 것 같았다.
차와의 만남은 남들보다는 전통문화에 대해서 제법 안다고 자부해 왔던 내게 ‘그 정도 알고 있는 것은 평범한 소시민의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사건이었다.
처음 차 한 잔을 맛본 이후 전혀 다른 세계를 실감한 나는 차에 푸욱 빠져들었다.
출근하면 버릇처럼 눌러대던 자동판매기의 커피는 독약이란 생각이 들었고 그것을 마시고 즐거워하는 동료들이 때로는 가여워 보이기까지도 했다.
귀동냥으로 얻은 초의 선사草衣禪師의 《다신전茶神傳》을 외우고 거기에 쓰여 있는 대로 차를 마시려고 노력했다.
차를 마심으로써 새로이 관심을 갖게 된 것이 너무 많았다. 이렇게 중요하고 또 그윽한 즐거움이 있는 것을 나이 서른이 훨씬 넘도록 모르고 살았다는 게 억울하기도 하였다.
차와의 만남이 그 어느 누구를 만난 것보다 잊고 살고 있는 우리의 전통문화와 다시 만날 수 있게 해 준 인연이었다.
“이 세상에 참으로 갖고 싶은 것은 문화文化입니다.” 이 말은 백범 김구선생이 하신 말이다.
요즘 문화란 말은 많은 곳에 붙여서 쓰고 있다. 예를 들면 침실 문화, 음주 문화, 화장실 문화 심지어는 놀음판의 놀음 문화까지 붙이지 않는 곳이 없다.
이 모든 게 문화이기는 하지만 이런 것이 김구 선생이 소원하신 정말 갖고 싶은 문화는 아닐 것이다.
많은 우리의 전통 문화들이 소멸되어가고 자주국가로서 자신의 문화를 버리고 외래 문화에 물들어 가는 것이 안타까우셨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문화”란 말을 여기저기 붙여서 다용도로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문화 진흥에 대해서는 그리 적극적이지 못하다.
우리 나라 지방자치단체에서 한 해에 “문화제”라는 명목으로 치러지는 행사가 수도 없이 많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실소를 금할 길이 없다.
문화제가 문화의 진흥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형식적인 일과성 행사에 대부분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지위가 높은 몇몇 사람에게 보여 주기 위한 ‘그들만의 잔치’를 하다보니 일반인의 참여가 잘 이뤄지지 않고 동원된 ‘박수부대’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렇게 하고도 행사 진행에 실수만 없으면 ‘훌륭한 문화제’라고 자평自評을 하고 만족해 하는 현실이다. 박제된 전시성문화에 그치는 실정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조그만 시市이다. 이 곳은 예부터 오석烏石, 청석靑石이 많아 상석? 비석? 벼루 등 석공예가 발달한 고장이다. 새로이 도시를 팽창시키면서 넓은 도로 양편에 녹지공간을 만들어 놓은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녹지공간에 설치해 놓은 석조물이 온통 왜색 일색倭色一色이다.
부여의 정림사지 석탑이나, 성주사지의 석탑 등 우리 고유의 탑이 즐비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따르지 못한 채 일본의 탑 양식을, 그것도 어설프게 본을 따 설치해 놓고 있어 ‘석공예의 고장’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지경이다. 여기에 또 한 가지 문제는 이것을 보고 제대로 지적해 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제작한 석공이나 늘 바라보며 사는 주민이나 모두가 ‘자신의 것’을 모르는 무지의 결과이다.
이러한 문제가 이 곳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고 우리나라 전역에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니 얼마나 큰 전통 문화의 위기인지 짐작이 되지 않을 정도이다.
‘다반사茶飯事’란 말을 자주 쓰면서 차를 모르고 살아 왔으니 나 역시 근거 없는 잔소리만 늘어놓으면서 살아온 게 아닌가.
어쨌거나 차를 만남으로써 우리의 전통문화의 일편이나마 다시 생각하고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최근 들어 차를 마시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차에 대한 효능이 과학적으로 분석되고 입증되면서 건강을 증진시키려는 목적으로 마시는 경우도 많아졌다.
중국에서는 황제에게 차를 진상하였다. 황제는 늘 차와 함께 했으니 이는 정신과 육신을 맑고 튼튼하게 함으로써 올바른 정치를 펼 수 있는 밑거름이기도 했다.
차를 마시는 일은 단순히 차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도道를 깨우치는데 목적이 있다.
“다도茶道”라 하는 이유는 차를 통해서 선禪을 수행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선승禪僧과 다인茶人은 동심同心이라 했다.
차를 마시는 일은 자칫 유희로 여길 수 있고, 대부분 취미에 그치지만 조금만 능숙해지면 달인을 자처하는 미궁에 빠져들기도 한다.
사치스런 다실茶室이나 조잡한 다기, 예禮를 어지럽히는 근거 없는 다례茶禮를 일삼는 다인들(물론 나도 그 중에 속할지 모르지만)도 많은 것 같다. 그리고 사물을 즐기는 사람은 많고 마음을 수행하는 사람은 적다. 하지만 진정한 다인이라면 기물이 귀중한 것이나 고가인 것, 호사스러운 것에서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것에서 아름다움의 신비神秘를 꿰뚫어 볼 줄 아는 혜안慧眼을 갖도록 노력해야 하고, 선禪을 수행하는 것 같은 지극한 정성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단원의 초명시원도에서도 말하듯이 가장 단순하면서도 질박한 아름다움이 바로 선계仙界가 아닐까.
마음이 어지러우면 손 안의 다완茶碗은 한낱 물 대접에 불과할 것이고, 가지런히 정돈되고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다완으로서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허례허식을 버리는 것이야말로 도와 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마음을 공양供養하는 것임을 생각해 볼 때 부처님께서도 차향茶香보다는 불자佛子들의 마음의 향기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차를 만나 잃었던 큰 행복 하나를 찾을 수 있었고, 다인을 만나게 되니 가엾은 인생人生에 벗을 삼을 수 있었고, 무지몽매한 사바사계에 휘둘려 사는 이 미련한 중생에게 불자의 문을 열어 주었으니 다른 어떤 인연因緣보다도 차는 스승임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