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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내를 듣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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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이상해 2001년 03월 229호
중국 원림의 이름들은 유.불.선을 구별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담아내는 높은 정신과 눈?코?입?귀 등의경계를 뛰어넘는 마음의 경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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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초 중국 강남의 소주蘇州와 항주杭州를 10일 일정으로 다녀왔다. 그 곳의 원림과 옛 건축을 보기 위한 기행이었다. 소주와 항주는 중국사람들이 “하늘에는 천당, 땅에는 소주와 항주”라고 할 정도로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이라고 자랑하는 곳이다. 《동방견문록》을 남긴 마르코 폴로까지도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며 극찬한 곳이다. 기후가 좋고, 물산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자연환경이 아름다워 일찍부터 지식인, 문인들과 예술인들이 이 곳에서 중국문화를 꽃피웠기 때문이다.

이 일대에는 오대, 송대부터 사가원림私家園林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지금 소주에만 해도 창랑정滄浪亭, 졸정원拙政園, 환수산장環秀山莊, 유원留園, 망사원網師園 등 유명한 원림들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소주의 원림들은 그 예술적 가치가 인정되어 최근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지식인, 문인들이 조성한 사가원림에는 그들의 자연관과 세계관이 잘 나타나 있다. 이들이 사람들이 사는 성시城市 안에 살림집을 짓고 자연을 끌어들인 원림을 조영한 것은 현실세계에서 구하기 힘든 이상세계를 만들어 은둔하며 살려는 의도가 강하게 깔려 있다. 따라서, 이러한 원림과 건축에는 번잡한 장식이나 화려함이 없고, 대신에 그들이 추구한 소박한 아취雅趣와 야취野趣가 듬뿍 담겨 있다. 이 곳 원림들에는 이러한 높은 품격과 천연적인 아름다움이 도처에 배어 있어 방문객들이 그 분위기에 쉽게 휘어잡힌다.

원림 속을 거닐면서 그러한 것을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림의 명칭이나 원림 안에 있는 건물들에 걸린 편액의 글 내용에도 그러한 내음이 묻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그 몇 가지 예들이다.

창랑정의 ‘창랑’은 맹자에 나오는 유명한 말인 “창랑의 물이 맑거든 나의 갓끈을 빨 것이요,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나의 발을 씻겠노라.”에서 이름을 지어 유유 자족하며 은일하는 원주園主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졸정원은 “뜰에 물 주고 채소나 심는 것을 정사政事로 삼는 원림”에서 원주의 소박한 마음을 원림 구성과 경영에 나타내고 있고, 망사원은 그 이름에서 원주가 스스로 어부에 비유하며 물고기를 잡으며 숨어 사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원림들의 편액에는 원주의 이러한 마음이 더욱더 다양하고 풍부하게 나타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바람이 대숲 사이로 부니 마치 긴 피리(笛)를 부는 듯하고, 졸졸 흐르는 물소리는 금琴을 타는 소리 같도다” “달빛 맞으며 호미로 몸소 농사를 짓네” “덕을 세움에 법도, 원칙이 있도다” “어디를 가나 법도가 있고, 무슨 일을 하든 절도가 있네” “매화 몇 떨기를 보니 계절이 바뀌었음을 알겠구나” “정자가 잔잔히 흐르는 물가에 자리잡고 있으니 그 곳의 아취가 무궁하도다. 빈 방에 향기 그윽한 난초가 있으니 그 사람됨이 청아하도다” “물 위에 핀 붉은 연꽃이 야트막한 못에 가득하고, 밝은 초승달 빛이 반쪽 정자에 부는 바람에 서늘하도다” “짤막한 배에 물고기를 가득 싣고 달빛 아래 배 저어 가고, 자그마한 집이 맑고 잔잔한 물가에 있으니 꽃이 피는 것을 감상하겠도다” “내 마음이 맑은 물과 같음을 모두 알거늘, 어찌 내가 물고기가 누리는 즐거움을 모른다 하리요” “밝은 달이 높이 뜨니 하늘은 물 같고 거울 같으며, 불도들은 불법들을 전하는도다” 등이다.

이러한 글들은 고전이나 경전에서 인용한 것도 있고, 원림 주변의 경상景象에 맞게 지은 것도 있는데, 유?불?선을 구별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담는 높은 정신과 마음의 경지를 나타내고 있다. 이 모두는 소주 원림을 조영한 문인 사대부들의 마음의 경계를 보여 주는 본보기가 된다.

이렇게 산수를 기본으로 해서 조영된 원림 속의 무궁무진한 정경에는 원주가 나타내려는 의경意境이 깔려 있고, 많은 것이 압축되어 있다. 사람을 취하게 하는 선율이 있고, 유한함 속에서 얻는 무한함이 있다. 흰 벽에 떨어진 나무의 그림자는 현실과 꿈 사이에 교차하는 공간으로 작용하여 허실虛實간의 현상과 본질이 둘이 아닌 세계임을 깨닫게도 한다.

그 중에서도 건물의 이름을 ‘문묘향실聞妙香室’과 같은 것으로 지은 것은 가히 압권이다. “지극한 향내를 듣는 방”이라니, 대단한 경지다. 오감五感의 경계를 뛰어넘는 도인이나 선승의 세계를 읽게 만든다.

이러한 자랑스러운 고장인 소주, 항주는 고려高麗와도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 당唐 무종武宗과 후주後周 세종世宗의 훼불시에도 이 곳 남방의 항주에 도읍지를 둔 오월국吳越國은 불교를 장려한다. 이 시기 항주 서호西湖 부근에는 크고 작은 불사들이 많이 건립된다.

오월국의 충의왕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 중국 국내에서는 이미 구하기 힘든 천태종의 교적敎籍을 구하자, 고려 광종이 960년에 체관諦觀을 중국에 보내 천태교적을 전한 것이 계기가 되어 항주를 중심으로 해서 이 일대에 천태종이 크게 부흥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항주는 대각국사 의천이 다녀간 곳이기도 하다. 문헌에 의하면, 의천은 1085년 4월 8일 황해도 풍덕을 출발하여 그 해 5월 2일 중국 산동반도 남쪽에 위치한 밀주密州의 판교진板橋鎭에 도착한다. 그 후 의천은 변경을 거쳐 8월 초 항주에 도착하여 이듬해 2월에 변경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 후 다시 4월에 항주, 명주明州를 거쳐 6월 18일 고려로 귀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전체 여정을 보면, 의천은 남송에 머무는 14개월 동안 긴 시간을 항주에서 보낸 것으로 나타난다.

의천은 항주의 대중상부사大中祥符寺와 혜인사惠因寺에서 고승 정원淨源으로부터 화엄학 강설을 들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의천은 귀국 후 균여의 화엄학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고, 오월국 이래 이 지방에서 번성하던 천태종 승려들과 접촉한 것이 귀국 후 천태종을 창립하는 발판이 되었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다.

의천은 귀국 후에 혜인사에 지원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혜인사 이름은 「혜인고려화엄교사惠因高麗華嚴敎寺」로 바뀌었고, 사람들은 고려사高麗寺로 불렀다고 한다. 이 이름은 1757년 법운사法雲寺로 바뀔 때까지 사용되었다. 이 인연으로 20세기 초에는 상해 일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이 절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곳으로 기행을 온 것을 기회로 옛 고려사를 한 번 들러보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항주 시내에서 영은사靈隱寺로 가는 길 중간쯤 되는 어느 곳에 위치하였다고 하는데 찾지 못하였다. 옛 고려사가 없어진 것이다. 20세기 초까지 있었던 절이 언제 어떤 계기로 없어지게 되었는지, 건물이 사라지고 남은 초석과 주변 지리 조건이라도 살펴보려고 했는데, 못내 궁금증을 풀지 못한 채 후일을 기약하고 귀국하였다. 옛 고려사의 향내를 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국을 다녀간 우리 나라 고승들의 행적을 정리하여 그 향내를 후일 듣게 하는 일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며 폭설이 내리기 전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