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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신망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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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여로 - 정찬주 1991년 01월 107호
퇴근 10분 전이었다. 선재는 화장실에서 머리를 빗다 말고 흠칫 놀랐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낯설어 보였다.
“저게 내 얼굴이 아닌데·” 이게 아닌데.”길쭉한 얼굴은 핏기가 없고 문지르면 금새라도 허연 비늘이 일어날 것처럼, 푸석푸석했다. 거기에다 눈두덩이는 바람이 들어간 듯 부풀어 있었고, 코끝은 종기가 솟아나려는 듯 불그스름했다. 영락없이 주독에 찌든 얼굴이다,
그렇다고 망년회 자리를 피할 수도 없었다. 특히나 고향친구들의 망년회 자리는 전혀 빠질 도리가 없었다. 망년회를 알리는 인사장부터 선재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 바람재국민학교 55회 동창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한 해를 결산하는 연말이 다가왔습니다. 오늘의 결실을 위해서 여러분 모두 힘껏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셨겠지요.
각박한 현실과 겨울의 혹독한 추위에도 불구하고 결실의 보람으로 활짝 웃고 있는 동창들의 얼굴이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때 그 시절로 되돌아가 천진무구한 추억의 시간을 함께 갖지 않으시렵니까? 부디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주시기 바랍니다.
동창 회장 소팔기 올림
선재는 가슴이 부풀지 않을 수 없었다. 가구점 점원으로 고생하다 ‘고전미’가구회사의 사장이 된 소팔기도 만나보고 싶고, 주먹계에서 손을 씻고 지금은 시내 어느 카바레에서 지배인을 하고 있다는 김웅식이도 그리웠다.
“그래, 다른 모임은 다 빠져도 오늘 모임은 그랄 수 없지.”선재는 어제밤 아내와 대판 싸웠던 사실을 잊고는 비뚤어진 넥타이를 바로 잡았다. 하긴 신경질을 부리는 아내에게 선재는 할 말이 없을 만도 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며칠째나 밤 12시가 넘어 귀가를 했던 것이다.
술집겸 식당인 우미회관에는 어느새 동창들이 먼저와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회장인 소팔기도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입구에서 동창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녀석은 언제봐도 순박하고 인상이 좋았다. 선재는 소팔기의 손을 잡고 힘차게 흔들었다.
“반갑다.”
“어서 와. 인사장 돌렸느데도 여남은 명이야. 하긴 우리 동창들 중에는 농사 짖는 친구가 대부분이지.\"
“승려가 된 조계헌이도 있지. 꼭 나오라고 했는데 불참이야.”
저녁식사보다는 술이 먼저 돌았다. 선재는 동창들이 따라 주는 대로 소주와 맥주를 가리지 않고 훌쩍훌쩍 마셨다. 술이 몇 잔 돌아가자, 동창들마다 옛날 버릇이 튀어나왔다. 먼저 노상 싸움질만 했던 김웅식이 옆자리의 손님에게 시비를 걸었다.
“거 조용히 좀 합시다. 여기가 방송국 노래자랑 하는 데도 아니고 가라오케도 아니잖수.”
“뭘 모기만한 소리 가지고 그러슈. 당신 목소리가 더 시끄럽구만.”
“이 자식이 날 뭘로 보고 이래 !”
김웅식이 예상했던 대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소팔기가 수환 좋게 김웅식의 성깔을 누그러뜨리는 한편 상대편에게 사과를 했다. 선재도 어린시절부터 자신의 말을 잘 들었던 김웅식의 거칠고 커다란 손을 잡아당겼다.
“이 천하의 김웅식, 성질 다 죽었지.”
“그럼 그럼, 이젠 죽이고 살아야지. 어디 카바레야? 거기서 지배인 일 본다면서. 출세 한 번 빠르다 빨라. 우린 아직도 평사원이야.\"
“이 자식아 어디 그게 출세냐. 명함 찍을 때 아무렇게나 찍으면 되는 거지. 명함 만드는 데 돈 몇 푼 드냐?”
“역시 넌 시원시원해서 좋아. 하하.”
그제야 김웅식도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좋아 2차는 우리 카바레에 가서 한 잔 하자구. 내가 사지.”
모두가 대찬성이었다. 사실 카바레가 어떤 곳인지 호기심이 당기기도 했다.
김웅식이 전화를 하자, 잠시 후 중형택시가 다섯 대나 번개같이 달려왔다. 택시비는 김웅식이 소팔기에게 양보했다.
“좋아, 이번 택시비는 네놈에게 기회를 주겠다.”
체면유지비라고 치더라도 역시 동창들의 모임이니까 이해타산 없는 이런 언쟁도 들어볼 수 있었다. 선재는 정말로 흐뭇했다. 비록 삼십대 초반이라고는 하지만 녀석들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면 그때 그 시절의 장난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카바레 안은 어두컴컴했다. 옆자리의 사람이 그림자처럼 어렴풋이 보일 만큼만 밝았다. 선재는 테이블 옆의 소파에 앉았다가 김웅식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들이 주로 여길 찾는 거냐?\"
“쑥맥 같은 놈. 속이 허한 여자들이 불나비처럼 덤벼 드는 곳이야”
“불나비 같은 여자라니…”
선재는 문득 언젠가 보았던 신문기사가 떠올랐다. 주부들이 시장바구니를 들고서 무허가 춤 교습소를 출입했다가 적발된 기사였다.
“춤도 마약 같은 거야 알콜 중독보다 더 지독하지.”
그러나 소팔기는 궁정적인 면을 거들었다.
“야, 춤 출지 모르니까 오도 가도 못하는 뚝빼기 같더라. 사업상 사교춤 정도는 배워두어야겠더라.”
아닌게 아니라 소팔기는 술을 몇 잔씩 마실 때마다 꼭 무대로 나갔다가 돌아오곤 했다. 선재는 오줌이 마려웠다. 친구들한테 화장실을 묻기도 뭐해서 홀안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녔다. 어느새 선재는 무대 앞까지 다가섰다. 머리 위에서는 번쩍거리는 조명등이 사람들의 혼을 빼앗기라도 할 듯 빙빙 어지럽게 돌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웨이터가 선재의 팔을 낚아채면서 소리쳤다.
“춤 추시려고 나오셨군요, 선생님. 제가 파트너를 소개해 올리겠습니다. 선생님.”
“이, 이거 놓고 얘기하지.”
그러나 웨이터는 선재의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17번, 17번 하고 큰소리를 칠 뿐이었다. 음악도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사랑의 기로에 서서 슬픔을 갖지 말아요 어차피 헤어져야 할… ’
이윽고 17번의 여자가 무대 안쪽에서 달려나왔다. 새빨간 입술만 유난히 돋보였다. 순간, 선재는 졸도를 할 뻔했다. 선재를 향해서 웃고 있는 여자는 아무리 깎아준다 해도 오십대의 아주머니였다.
“아이고 저 아주머니가 내 파트너라니 !”
선재는 동굴의 입구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출입구를 향해서 줄행랑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