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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겁에 걸친 인연의 고리 화성유품(化成兪品)제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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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이야기 - 이원섭 1991년 01월 107호
ㄹ.삼승과 법화경
마침내 십육 왕자와 범천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통지승불은 법을 설하신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법이 었던가.
“곧 삼전십이행(三轉十二行)의 법문을 설하시니, ...이르되 이는 고(苦), 이는 고의 집(集), 이는 고의 멸(澈), 아는 고를 멸하는 도(道)라 함이요 또 십이 인연을 자세히 설하시니, 무명(無明)에 말미암아 행(行)이 생기고, 행에 말미암아 식(識)이 생기고, ....생(生)에 말미암아 노사(老死)와 우비(憂悲) ·고뇌(苦惱) 있는지라.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하고.....생이 멸하면 노사와 우비고뇌 멸한다 함이라.”
이런 법이 세 번 ·네 번 반복해 설해짐에 따라 무수한 성문·연각이 나타나기에 이르렀는데 십육 왕자가 다시 아뇩다라삼막삼보리의 법을 설해 주시도록 요청함에 응하사, \'이만겁(二萬劫) 지나서야 사부중 가운데서 대승경 설하시니’, 그것이 「법화경」이었다 한다.
삼전십이행이란 사제의 도리를 설하심에 세 가지 단계(三聊)의 방법을 쓰심을 이르니, 시전(示幕)은 ‘이는 고다. 이는 집이다. 이는 멸이다. 이는 도다’하여 그 하나하나를 설해 보이시는 일이요, 권전(勸轉)은 ‘고는 끊어야 한다. 집을 알아야 한다. 멸은 실현되어야 한다. 도는 닦아야 한다’하여 그 수행을 권하시는 일이요 증전(證禮)은 ‘고를 스스로 끊었다. 집을 스스로 알았다. 멸을 스스로 실현했다. 도를 스스로 닦았다’하여 부처님 자신이 증명하시는 일이니, 행자에 있어서는 당위(當薦)가 된다. 그리고 십이인연을 ‘무명에 말미암아 행이 생기고, 행에 말미암아 식이 생기고.....’라 보아감이 이르는 바 순관(順觀)이요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하고....’라는 따위로 관찰함이 역관(遭觀)인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부처님 일대의 셜법을 언급할 때마다, 「법화경」은 으레히 ‘성문을 위해서는 사제를 설하시며, 연각을 위해서는 십이인연을 설하시며, 보살을 위해서는 육바라밀을 설하시며, 그런 뒤에 「법화경」을 설하셨다’고 한 것과는 달리, 사제 십이인연에 이어 바로 「법화경」을 설하신것처럼 되어 있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여기에 시사함이 있는 것은, 사제 ·섭이인연을 설하사고 나서 십육 왕자의 청을 받아들이사 ‘이만 겁 지나서야 사부중 가운데서 대승경을 설하시니, 이름이 묘법연화요 보살을 가르치는 법이며 부처님네 호념하시는 바라’는 말씀이다. 어째서 간격이 이만 겁이나 벌어졌는가 이만 억 겁 동안 교화를 중지하신 것으로 볼 일이 아닌 바에는, 이 사이에 방동시 ·반야시에 해당하는 법문, 곧 방편의 대승(權大乘)이 설해졌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대통지승불의 경우도, ‘성문에게는 사제를 설하시며, 연각에게는 십이인연을 설하시며, 보살에게는 육바라밀을 설하시며, 그런 뒤에 「법화경」을 설하신다’는 부처님들의 원칙은,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지켜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서로 다른 이름을 지닌 이 사제 ·십이인연 ·육바라밀 ·「법화경」이 어떤 관계에 있는냐 하는 점이다. 곧 이것들은 전혀 다른 별개의 법인가, 아니면 어떤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가치에 있어 깊고 얕은 차이가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검토되어야 한다. 본디 우리의 생존을 고라고 단정함이 고제며, 번뇌(惑)와 그것에 바탕한 행위(業)가 모여서 고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 집제며, 이런 투철한 인식 밑에서 고가 없어진 경지(열반)에 이르기 위해 팔정도(八正道)에 의해 수행하는 것이 멸제 ·도제라 할 때, 섭이인연은 이것과 어떻게 관련되는가. ‘무명에 말미암아행이 생기고, 행에 말미암아 식이 생기고,....생에 말미암아 노사가 생긴다’는 것은 바로 집제에 의해 고제가 전개되는 과정 바로 그것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를 부연하여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하고,....생이 멸하면 노사가 멸한다’는 것이 멸제임도 확실하니, 연각은 성문보다 근기가 뛰어났으므로 도제는 생략해 멸제에 포함시킨 것뿐이다. 이리하여 사제와 십이인연이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육바라밀은 어떤가. 육바라밀은 내용이 팔정도와 동일하므로 바로 도제에 해당하니, 대승에서는 고제 ·집제 ·멸제를 도제 속에 포함시켜 주로 도제에 역점을 둔 것이라 여겨진다. 연각을 상대하실 때에 멸제를 내세워 도제를 생략하신 것과는 정반대의 태도로도 보여지나 연각은 열반의 추구라는 자리(自利)에 기울어져 있기에 멸제가 중요시되고, 보살은 보다 이타(利他)를 목표로 하는 처지이기에 도제에 해당하는 육바라밀에 조준이 맞추어지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부처님은 언제나 하나의 사제를 설해 오신 것이 되고, 하나의 십이인연 하나의 육바라말만 설해 오셨다는 말도 된다. 이리하여 사제 ·십이인연 ·육바라밀은 기실 하나의 법이었으나, 받아들이는 쪽의 근기의 차이 때문에, 다른 법처럼 인식되어 왔으니 그것이 삼승이었고, 그것들이 하나의 법(일승)임을 일깨우고 나선 것이 「법화경」이므로, 「법화경」과 삼승 사이에는 어떤 차별도 없는 것이 되고 만다.

口. 대통결연(大通結緣)
이상과 같이 먼저 삼승을 설하시고 뒤에 일승을 설하심(先三後一)은 모든 부처님에게 공통하는 현상이거니와, 대통지승불과 관련해서는 소위 대통결연이라는 것이 설해졌다. 그러면 대통결연이란 무엇인가, 대통지승불 밑에서 「법화경」과의 인연이 맺어진 사실을 이르니, 이것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경에서,
“이 경 설하실 때, 십육 보살사미들이 다 이를 믿어 받아들이며, 성문 중에도 믿어 이해하는 자 적잖았으되.....”
라 했듯, 대통지승불이 설하시는 자리에서 「법화경」에 대해 신해(信解)의 마음을 일으킨 사람들이니, 여기에는 십육 왕자와 많은 성문이 포함된다. 또 하나는 「법화경」을 설해 마치시고 대통지승불께서 삼매에 들어 계시던 긴 기간에 십육 사미(섭육 왕자)가, “각기 법좌(法座) 올라 그들도 팔만 사천 겹 동안 사부중 위해 「법화경」 자세히 설하여 밝힘으로써, 하나 하나의 사미마다 육백만 억 나유타 항하사의 중생을 다 건져서 보이고 가르치고 이익 주고 기쁘게 해 아뇩다라삼막삼보리심 일으키게 하였느니라.”
하심과 같이 십육 왕자의 복강(覆講)에 의해 믿음을 얻은 사람들이다. 복강이란 스승에게서 들은 법을 제자가 반복해 타인에게 설해 줌을 이른다.
따라서 대통지승불이 설법하실 때 신심을 일으킨 사람이 당장에 불도를 성취하지 못한 바에는 복강하는 십육 왕자의 교화 대상으로 넘어 왔다고 보아야 하겠는데, 복강 이전에 신심을 일으켰건 그 후에 일으켰건, 한 번 심어진 「법화경」의 씨는 그들을 각기 세세생생 십육 왕자와 함께 나서 「법화경」의 교화를 받게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십육 왕자는 이제 다 성불하사 「법화경」을 설·하고 계시니, 그 마지막 왕자가 석가모니불 자신이시라는 것이므로, 오늘에 「법화경」을 받드는 사람들은 멀고 먼 아승지겁 이전의 대통지승불 때부터 십육 왕자의 한 분이셨던 석가여래에 의해 「법화경」으로 교화되는 긴 인연을 지닌 것이 된다.
이 같은 길고도 불가사의한 인연을 요약해서 천태대사는 먼먼 과거세에 대통지승붙이나 십육 왕자의 한 분이신 전생의 석가여래에 의해 우리들의 마음에 「법화경」에 대한 신심의 씨가 심어지고(下種), 그 후 세 세생생 석가여래의 교화에 의해 그 신심의 씨가 싹트고 자라나 성숙되었기에(鐵), 마침내 해탈해 성불할 수 있는 것이라하여(得脫), 이를 요약해 종축탈(種熟脫)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러면 영겁에 걸친 인연의 고리가 우리를 묶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겠는가. 절대적 실재(實在)를 진여(眞如)라고 할 때, 진여에 등을 돌리는 곳에 전개되는 것이 현실세계다. 그리하여 진여와는 반대의 방향으로 질주함이 중생의 양상이거니와, 진여는 어딘가에 따로 존재함이 아니라 본성 ·불성으로서 우리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진여로 되돌아가 그것과 하나가 된 사람을 부처님이라 한다면, 대통지승불은 과거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는 본성 ·불성이기도 한 것이니, 「법화경」을 들어 신심을 일으키는 일은 이것의 소재를 안 것에 해당한다.
그러나 마음에 그것이 있음을 알았기로서니, 불성이 어찌 그것만으로 제 모습을 드러내겠는가 그러기에 종·숙·탈의 긴 교화가 필요한 것이어서, 실상의 도리를 대번에 깨닫는 상근(上根)이나 비유로 설하심을 듣고 알아채는 중근(中根)과는 달리, 마음의 자리를 바로 보는 능력이 없는 하근(下根)이기에 길고 낀 인연의 설화가 설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 여겨진다.
이원섭선생은 혜화전문학교 불교과를 졸업한 불교학자이며 시인이다 1948년에 「시」로 문당에 나온 이래 전국 신도회 부회장과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여러 권의 시집과 역서 「현대인의 불교」 「불교대전」 「법화경」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