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와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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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 - 혜묵
1991년 01월 107호
“우리는 현재 글로벌 경제시대에 살고 있다. 이는 유럽이 EC에 통합되었듯이 전 세계는 앞으로 하나의 경제권으로 통합될 것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UR협상은 넘어야 하는 하나의 단계일 뿐이다. 따라서 언론은 시야를 넓혀 글로벌해져야 한다.”
이 글은 파리에서의 UR협상을 앞두고 국내언론의 초점이 온통 그 문제에 쏠려 있을 즈음 어떤 시사 주간지에 실렸던 논평의 한 부분이다. 이 논평은 위에 인용한 것과 같은 ‘합리적인(?)’ 기준을 근거로 UR반대의 시류에 편승하고 있는 기존언론의 태도를 강한 톤으로 비판하고 있었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UR을 심정적으로 반대하고 있는, 반대해야 할 이유가 있는 몹쓸 것으로 단정하게 된 까닭을 기존언론의 탓으로 돌리면서 기존언론이 어설픈 경제정의에 휩쓸려 문제의 본질은 놓친 채 단순히 농업문제에만 집착함으로써 국가와 민족의 전체적인 방향을 오도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어쨌거나 UR의 파도는 이미 우리를 뒤덮어오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이에 대처하는 태도를 둘러싼 찬 반논쟁은 더욱 치열해 가는 것 같다. 한정된 정보, 해석된 사실들에만 의존해야 하는 문외한들이 그러한 논쟁의 심오한 뒷사정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는 불가능하겠지만, 새삼스레 또한 거칠고 어설퍼 보이는 논평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시작하는 까닭은, 단지 서로 다른 입장들이 분명히 다른 근거와 논리를 전제하고 분명히 다른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입장들이 공통적으로 국가, 민족의 이념을 끝을 맺는 것이 재미있어 보였기 때문이다(논평한 글의 논지는 그 논지의 타당성이나 일관성 여부와는 상관없이 기존의 민족주의적 반대론의 논지와는 명백히 달라 보인다. 그런데도 그 논지 또한 그리고 또한 당연히 국가·민족의 이익을 지향하고 있다). 이런 곳에서 항상 ‘진짜’를 둘러싼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게 된다.
어떤 신문은 국제적으로 우리나라가 아시아에서 가장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나라 중의 하나로 지목받고 있으며, 이러한 성향은 외국자본의 투자조건에 마이너스 요인이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헌법 전문에도 새져 있듯 확실히 남한정부는 민족주의세력의 정통성을 잇고 있으며, 그래서인지 오늘날에도 민족이라는 깃발만 내걸면 무엇인가 대단한 일을 하는구나 싶을 만큼 그 말은 보편적인 권위를 누리고 있다. 그권세가 강한 만큼, 민족이라는 말올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여, 이제는 국가나 민족이라는 말만 들어도 도대체 그러니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왜 그런것에 새삼스레 민족이 들러붙어야 하는 것인지(예를 들어 ‘유신과 민족중흥’ 따위의 극단적인 예로부터 민족문학 ·민족불교·민족민중운동 풍의 벗진 예에까지) 혼란스러운 지경이 되고 말았다.
같은 시기, 같은 곳에서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기구 가맹 22개국을 포함한 유럽 34개국의 정상들은 ‘유럽안보협력회의(CSCE)’를 갖고 ‘하나의 유럽’을 위한 ‘파리현장’을 채택했다. 지난 40여 년간 이념과 체제를 걸고 무력으로 맞서왔던 구질서를 해체시키고, 새로운 유럽의 새로운 질서를 위해 그들은 냉전의 종식과 통합과 화해의 유럽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리고 우리의 언론들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EC로의 통합, 공산권의 경제파탄과 사회주의체제 붕괴’라는 해석 아래 이 선언을 또한 열심으로 보도했다. 이것은 마치 언론이 이제 ‘어설픈 경제정의에 휩쓸렸던’ 오점을 씻고, ‘글로벌한 경제시대의 합리적인 기준’ 으로 개종하기라도 한 듯한 태도로 보였다. 확실히 세계가 변하긴 변하는 모양이다. 어쨌거나 또한 재미있는 사실은 고르바초프의 신사고와 동구의 변혁으로 가속화된 통합의 분위기 속에서 민족통일이라는 가장 행복한 결과를 이끌어낸 콜 총리가 그 회의석상에서 민족주의를 경계하는 연설을 했다는 점이다.
“과거 지향적인 민족주의 감정이 냉전기간 동안 지속되어 온 동서진영간의 적대감을 대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 민족간의 갈등으로 CSCE의 틀 안에서 우리가 도출해낸 소수민족과 인권에 대한 큰 진전이 파괴되어서는 안된다.”
사실 저간의 보도는 동서간의 경제격차, 소련이나 유고 같은 다민족국가의 민족분쟁, 대규모의 인구이동에 따른 혼란, 소수민족의 반발 따위의 우려를 광범위하게 담고 있었다.
온갖 화려한 수식어로 치장되는, 냉전종식과 통일 유럽의 환상적인 선언장에서 가장 큰 민족적 승리를 쟁취한 사람들이 경계하는 민족주의는 또 어떤 것인가 그것은 왜 과거지향의 분열주의라 비난받으며, 명화와 진보를 보장해 준다는 CSCE의 새로운 틀과 맞서는가, 그러한 세세한 속사정 역시 문외한으로서는 시시콜콜히 따져볼 수 없겠지만, 그 같은 우려들은 무엇보다도 선언문이 내건 환상적 미래에도 불구하고 CSCE의 틀이 새로운 유럽을 하나의 질서로 묶어줄 충분한 구심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우려에서 비롯하는 것 같다. 하나의 세계와 그 세계를 구성하는 민족들, 국가들간의 모순관계와 이를 둘러싼 논쟁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양극으로 갈라져 대립해 온 두 세계는 각기 그러한 모순들을 해결해 가는 독자적인 체제를 발전시켜 왔다. 한 세계의 존립은, 각기 다른 욕구를 가진 이민족, 구성국가들의 이해가 그 세계가 설정한 하나의 목표를 향해 균형을 유지할 때야 가능하다.
그런데, 이제 그러한 균형을 외적으로 강제해 오던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기구라는 안보체제마저 부정하고, 이를 통합하는 ‘하나의 유럽’을 위한 새로운 안보협력기구를 선언했다. 균형을 유지하던 구심력이 약해지면 중심을 향해 억제되었던 각각의 부분적인 욕구들이 자연스레 분출하기 마련이다. 서명국들이 ‘각 개별국가들의 안전이 CSCE에 참가하는 모든 국가들의 안전과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선언문에 서명을 했다 하더라도, 그 선언이 기득권을 모두 인정하는 현상태 그대로의 통합을 전제로 하는 마당에 그 연결의 끈이 구질서의 안배에 따라 유보되어 온 약소민족들의 욕구를 안전하게 묶어 놓기는 어려울 것이다.
과거의 질서를 위해 유보했던 민족문제를 이제 또 다시 새로운 질서, 하나의 세계를 위해 유보해야 한다면, 이러한 세계의 변화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 것인가, 콜 총리는 통일유럽의 명분을 내걸고 이러한 욕구들을 신질서를 위협하는 민족주의로 경고했지만, 그렇다면 왜 독일민족의 통일은 ‘과거 지향적 민족주의’의 비판에서 제외되어야 하며, 예를 들어 발트 3국의 독립주장은 민족간의 갈등을 유발하고 신질서를 위협하는 경고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강대국의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우선적으로 반영하는 신질서 내에서, 강대국의 이익은 통합된 세계를 향한 신사고로 표현되고, 약소국의 이익은 ‘과거지향의 민족주의’로 매도당하는 것은 아닌가. 새로운 세계를 향한 새로운 민족문제는 어떻게 귀결이 지어질 것인가.
유럽이 이처럼 통합의 신질서를 위해 민족주의를 경고하고 있는데 반해, 서두에서 인용한 논평은 저 유럽통합의(그것도 EC의 주도적인) 경향을 세계사의 대세로 단정짓고 그러한 대세를 전제로 민족의 이익을 도출해내고 있다.(전자가 양극체재의 공동화에서 비롯되는 민족문제를 통일유럽의 명분으로 묶어내려는 노력인데 반해, 후자는 통합된 하나의 세계에서 민족의 문제로 되돌아오는 반대의 경향을 갖는다) 똑같은 민족이라는 말이 정반대의 방향, 정반대의 목표를 위해 사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 논조는 동일하게 새로 운 세계 속에 통합되는 민족의 위상을 다루고 있다.
다만 전자가 유럽질서의 재편과정 속에서의 민족주의를 다루는 반면, 후자는 강대국의 제국주의적 침략행위에 맞서는 구질서의 민족주의를 다루고 있을 뿐이다. 과거의 세계와 새로운 세계, 새로운 세계를 위한 민족과 민족을 위한 새로운 세계는 세계와 민족이라는 묵은 문제를 둘러싸고 변화무쌍한 변주독을 올리고 있다. 명백히 달라 보이는 이해관계를 위해, 명백히 다른 입장을 표방하고 있으면서도 그들 모두 가사 용하는 용어와 논리는 흡사하다. 찬란한 명분과 그럴듯한 이념들은, 그것들이 갖는 권위를 빌미로, 자신을 감추는 너울이 되고, 자신들의 입장을 강화하고 목표를 쟁취해 내는 무기로서 사용될 뿐이다.
서울올림픽의 깃발이었던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라는 표어가 새삼 생각이 난다. 또 얼마 전에 어떤 노동조합이 내걸었던 ‘하나는 모두를 위하여, 모두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표현도 기억이 난다. 나는 그런 표현들이 구체적으로(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어떤 의도로 씌어졌는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그런 말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조차 그런 말들의 의미를 이해하고 동일하게 사용하는지 의심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말들을 이해할 필요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환상으로 간주하게 된다. 또한 극소수의 훈련 받은 전문가들 외에는 포착하기 어려운 세계사의 흐름이니, 민족이니 하는 말들을 회롱함으로써 UR이나 파리선언 같은 구체적 현실을 해결하거나 설명 할 수 있는 길이 열리리라고 생각지도 않는다. 다만 우리 일상의 주변 어디에나 널부러져 있는 오염되고 혼란스런 명분들을 되씹어 봄으로써,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의 무게를 체감해 보려는 것일 뿐이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열린 우리 근대사에 있어 민족주의는 언제나 가장 중요한 이념으로 여겨졌고, 이에 따른 세계와 민족의 여러 도식들은 우리민족이 안고 있는 고통과 모순을 해결해 줄 이념형식의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그러한 민족주의 역사가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시작된 만큼이나, 그 이념형식 또한 외부로부터 받아들여진 사조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이해나 해석, 그리고 그의 적용에 무리가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주변정세와 내부정세의 사소한 변화에도 상승작용을 일으켜 똑같은 용어와 틀을 놓고서도 숱한 분열과 시행착오를 거듭해 왔다. 민족주의는 오늘날에도 분명 매우 유력한 이념들 중의 하나이며, 이를 둘러싼 논쟁과 혼란 또한 계속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과거의 이념들이 빚어내는 혼란들을 있는 그대로 심각하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정통성이니 진짜 논쟁 따위의 불필요한 꼬리를 달고 다닐 수밖에 없는 그런 오염된 이념들을 벗어버리고 우리 역사와 사회의 모순에서 새로 시작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