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등 앞의 디딤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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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의 소리 - 원영
1991년 01월 107호
새해가 시작되었다. 새해에는 새 마음가짐이 필요하고, 새 마용은 곧 생각하는 방식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새 사고방식의 한 예로 컴퓨터의 용어를 인용해 보고자 한다. 컴퓨터에서는 그 몸체와 프린트하는 기계등의 구조물을 하드웨어라 하고, 사용하는 갖가지 방식을 소프트웨어라고 한다. 이는 각각 구조와 기능을 가리키는 말이며, 불교에서 쓰는 말로는 체(體)와 용(用)으로써 나타낼 수 있다.
이렇게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둘로 나누어서 생각하는 방식은 우리 생활의 여러 면에 적용해 볼 수 있는데 이를 사원생활에 적용해 생각해 보자. 법당을 비롯하여 강당이나 관음전 둥의 건물이라든지 범종이나 법고 둥은 모두 하드웨어에 속하고, 그 속에서의 일상생활이나 특히 예불하는 의식 둥은 소프트웨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절의 여러 시설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법당 구조를 보면 몇 종류의 하드웨어를 볼 수 있다. 즉 석굴암과 같은 하드웨어, 통도사의 금강계단 같은 하드웨어, 법주사의 미륵불전 같은 하드웨어들이 있고, 해인사의 대적 광전 같은 것은 가장 보편적인 하드웨어이다.
일반적인 주택의 하드웨어가 참으로 다양한 것을 생각해 보면 절의 법당에 대한 하드웨어도 오늘의 이 시대가 만들어내는 뭔가가 없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특히 근년에는 천불의 부처님을 모시는 천불전(千佛嚴)이나 혹은 삼천불전 또는 만불전 둥이 건립되는 것을 볼 때 이런 생각은 더욱 간절하다. 오늘의 하드웨어를 찾아보자.
절에서 살아가는 스님들의 일상생활인 소프트웨어 중에서 공양하는 방식, 즉 바루공양은 아주 독특한 소프트웨어라고 여겨진다. 이보다도 더욱 중요한 소프트웨어로는 법당에서의 예불의식이다. 절의 모든 생활은 이것과 관련되어서 웅직이고 있으니 모든 소프트웨어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출가하면 행자시절부터 염불의식을 외우고 익히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일상에 사용하는 염불의 소프트웨어는 「천수경」이나 「108참회경」을 비롯한 몇 개에 불과하다. 그런 중에 장례의식의 소프트웨어는 잘 정리되어 있는 편이다. 스님되는 절차인 수계의식의 소프트웨어는 참으로 미비점이 많은데 아마 긴 역사 속에서 많은 것이 묻혀버리고 전해지지 못한 때문이니라.
법당이라는 하드웨어에서 예식이라는 소프트웨어를 잘 조화시킴으로써 우리는 불교의 새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진정한 그 어떤 것은 이 두 가지, 즉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뛰어넘는 곳에 있음을 발견한다.
지리산에 실상사(實相寺)라는 절이 있다. 신라 말기 9산선문(輝門) 가운데 하나인데 지금도 가장 많은 국보급 유물들이 남아있다. 이 실상사 마당에 있는 투 개의 석탑 한 가운데에 석등이 하나 있다. 높이가 약 5m되는 꽤 높은 것인데 이 석등 앞에 모양의 디딤돌이 놓여 있다. 이것이야말로 신라인의 사유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거의 비슷한 크기의 법주사 석등(약4m)이나 화엄사 석등(약 64m) 둥에서는 이 디딤돌을 볼 수 없다. 특히 보존을 잘 하기로 유명한 일본의 동대사(東大寺) 대불전(大佛嚴) 앞에 있는 금동등롱(약 46m)의 경우에도 이런 디딤돌은 놓여 있지 않다. 석등이라는 하드웨어만을 본다면 이 디딤돌은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러나 불을 붙인다는 소프트웨어와 관련해 보면 이것은 참으로 유용하다. 이것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관계를 새롭게 해주는 것이므로 석등 앞의 이 디딤돌은 참으로 깊은 의미를 갖는다고 여겨진다.
우리의 조상인 신라 사람들은 저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살았음을 우리의 역사는 또 저렇게 전해주고 있다.
이제 우리는 한 해를 새로이 맞이한다. 이 해에는 더욱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해 보자. 그리하여 나날이 새로워 지고, 다달이 새로워지는 한 해가 되고 새로운 불교를 만들어 보자.
올해에는 새 방식으로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