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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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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지안 1991년 01월 107호
보드가야 대탑 법당 안에서 새벽예불을 하였다. 이역만리 이곳까지 와서 예불을 드리니 실로 감개가 무량하다. 각국에서 온 스님 몇 분과 신자들이 좁은 대리석 바닥에 앉아 부지런히 입을 움직이며 염송을 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 일행 네 사람이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 우리 식으로 목청을 돋구어 창불을 하면서 예불을 하였다. 새로운 신심이 솟는 것 같았다.
아직 완전히 어둠이 걷허지 않은 이른 새벽에 탑주위의 난간 사이로 깔린 대리석 바닥에는 아마 철야 정진을 한 듯 여러 사람들이 절을 하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사람의 키만큼 되는 길다란 널판자를 땅에 놓고 그 널판지 위에 그 널판자 위에 전신을 엎드려 사지를 죽 뻗는다. 손바닥에는 칠판 지우개 같은 것을 끼고 팔을 죽밀었다 당겨 일어섰다 다시 엎드린다. 이른바 남방식오체투지다.
보드가야의 아침은 정말 성스럽다. 수많은 순례자와 참배객들이 탑을 중심으로 사면으로 통해진 통로를 걸으며 탑을 돌고 있다.
이윽고 넓은 뜰에 웅장하게 솟은 탑의 꼭대기에 아침 햇살이 비치어 온다.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아름다움이 온 경내를 꽉 채운다. 불교 제1의 성지, 부처님이 성도를 하신 보드가야 보리대탑의 전경은 이렇게 참배객을 설레이게 하였다.
대탑 뒤에 바로 보리수가 있다. 우람한 둥치에 사방으로 가지가 뻗어 그늘을 드리우는 면적이 꽤 넓다. 부처님아 깨달음을 이룬 바로 이 나무 밑의 금강보좌를 둘러싸고 티벳 승려들이 와서 독경을 하고 있다.
탑을 중심으로 한 이곳 경내에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후 일 주일씩 자리를 옮겨가며 머문 일곱 장소마다 안내판이 서 있다. 남쪽으로 큰 못이 있고 그 못 가운데에도 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부처님이 실제 목욕을 하던 곳이 그 너머에 있었는데 아마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고자 가까운 곳에 인공으로 못을 판 모양이다. 못에는 붉은 홍련이 아침 햇살에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부처님 당시로부터 3대째로 자라 있다는 보리수 아래서 나는 잠시 부처님 성도의 장면을 연상해 보았다. 동트는 새벽의 샛별을 보고 무상정각을 얻었다는 성도기(成道記)를 생각하면서 여러 가지 감회에 젖어 있었다.

2
인류 역사상 가장 탁월한 고등종교로 창시된 불교는 부천미의 성도에서 비롯되었다. 오랜 세월의 수도 끝에 정각을 이루어 새로운 차원의 정신세계를 경험한 석가의 위업은 인간의 삶의 본질을 밝혀놓은 최상의 인간승리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뿌리치고 왕자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출가 고행을 시작하여 드라마틱한 생애를 연출한 고타마의 인생여정은 한마다로 범부의 입장에서 볼 때는 파격적인 모순이었다. 범부 적에 세상사에 순응하기보다는 남다른 의미 추구를 총하여 인순 세습적인 룰을 무시하고 스스로 각고의 세월을 살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에게 주어진 생애의 삶을 자기적인 태도로 살아간다. 하지만 그 살아가는 생활의 경향은 창조적인 자기 것이 아닌 도시적인 모방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이리하여 세속에 동화되는 형태 속에서 나름대로 그 가치를 부여하여 다분히 일률적인 방식의 틀을 만들어 놓고 있다. 그리하여 곧잘 타성에 젖은 고정관념 속에서 자기 생활을 스스로 저울질하는 것이다.
나는 죽고 운명 속에서 유한한 시간을 가지고 천사량 만사량하다가 풀 끝의 이슬처럼 사라지고마는 무상한 인생살이. 아무도 그 운명의 굴레에 감히 도전하는 자가 없었다. 오직 석가모니의 생애에서 우리는 그 위대한 도전을 보게 되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에서 볼 때 고타마가 출가한 것은 석가모니가 되기 위한 위대한 포기였다. 버림으로써 얻어지는 것, 그것은 집착을 끊음으로써 얻어지는 대자유의 성취다. 석가모니가 인간의 괴로운 실상을 직시하고 이고득락의 길을 추구해 간 것은 삶의 질적인 창조를 시도한 남다른 노력으로 유한상의 현상에서 전개되는 상대적 모순과 불완전을 극복하여 절대세계에서 펼쳐지는 영원성과 무한성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가 성취한 정각의 세계를 중생들에게 보여주고자 이타의 길로 나서 교화를 시작한 것이 불교가 되엇으므로 부처님의 성도가 불교의 참생명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은 참생명으로의 희귀하며 새로운 인격을 탄생시키는 소생이다. 생명 실상의 세계는 영원무궁하며 절대무비이므로 이에의 환귀는 곧 영원한 생명 법신의 당체에 계합되는 것으로써 인연의 사상(事相)에서 벗어나 시공을 초월해 버리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무한생명을 파악한다.
도를 이루었다는 것은 어느 한 개인의 역사이기 이전에 세상에 진리의 불빛을 밝혔다는 더 숭고한 뜻이 있다. 캄캄한 어둠 속에 해가 떠오른 것과 같으며 어두운 밤길을 걷는 나그네에게 횃불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야말로 한 개인의 사사로운 것이 아니지 않는가. 때문에 석가가 성도한 것은 필연적인 불교의 창시이며 인류문화의 새로운 장을 연 것이 된다.
물론 인과(因果)의 관게속에서 연기적인 설명을 할 수도 있다. 가령 출가가 인이라면(여기서의 출가는 정신적 출가의 의미가 더 강조된다)성도는 과가 되며, 성도가 인이라면 성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중생제도가 과가 된다. 종교로서의 불교가 과라면 부처님의 수도의 결과로 성도를 한 것이 다시 인류의 문화사를 향하여 여러 가지 파생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위대한 원인이 되었다는 점을 중시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 성도의 의의가 더욱 깊어지며 한 인물을 통해서 시대의 역사를 조명하는 어떤 동기를 찾아내는 것이다.

3
불교는 자가과 각타를 성취하녀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공덕을 완성함을 목표로 한다. 우선 애가 깨닫고 또 남을 깨닫게 도와주어 생활의 도덕과 윤리를 동체대비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무명이라는 미흑과 무지의 상태를 벗어나 참 생명의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지혜와 자비가 충만한 부처의 세계로 전향하여 살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깨달은 정신이 필요하며 또 깨달으려는 정선이 필요한 것이다. 깨달은 마음과 깨달음을 위해 노력하는 마음, 이미 완성된 자와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자의 가장 좋은 모범을 부처님이 실천수범하여 보여주었다는 것이 부처님 성도의 또 하나의 의의다. 흔히 부처님을 길을 안내하는 길잡이(導師)에 비유하듯이 방향을 잃어버린 윤회자에게 헤맴을 멈추고 바른 길로 들어서도록 인도하는 자이다. 이 인도자의 역할이 중생구제의 대비원력으로 나타나며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부각되는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의 대행역을 보살(보다사트바)이라는 이상적 상으로 등장시키고 있지만 인간이 인간다운 완성속에서 가장 원만한 삶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부처요 보살인 것이다. 이 원만한 삶의 모습, 완성된 인격의 소유에서 참생명의 절대가치를 찾아내며 인간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열반경」에 설하기를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였다. 모든 생명체가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인간의 삶이 지향하는 가장 이상적인 세계가 불성의 세계임을 알게 된다.
불성의 세계는 삶의 가치가 극대화되어 상대적 차별에서 오는 불만과 모든 모순이 극복된 자유와 평화의 세계다. 비본질적인 마찰과 갈등 ·대립과 투쟁은 삶의 본질을 어기는 망령된 업행일 따름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불완전하게 살고 있는 중생의 생활이 깨달음을 동진 탓이며 업고에 눌리는 생활 역시 불성을 계발하지 못한 탓이다. 불성의 세계는 업고(業苦)에서 해방된 세계며 자타가 없는 무아의 세계요 무분별의 세계로, 여기서는 어떤 이념의 대립이나 투쟁도 존재하지 않는다. 열반과 해탈이라는 불교의 전용어가 이를 말해주는 것이다.
이 불성의 이상세계 곧 불국토는 인간의 가장 고차원적인 정신혁명의 세계로 깨달음을 통하여 들어가는 세계다.
오늘날 다원화되어가는 사회의 채반 문화현상 속에서 뒤엉키어 난무하는 인간의 오염된 의식 때문에 삶의 질이 저하되며 몰가치환 야비한 습성으로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불성의 세계로 전향시켜야 한다. 불교로 말하면번뇌와 망상 속에 빠져 자아를 상실한 인간군중에게 진정한 자기정체(identity)를 회복하도록 하여야 한다. 부처님 성도의 가르침이 바로 이것이며 바른 뜻에 의하여 참다운 가치추구를 인간의 도의에 맞게 행해 가야 하는 것이다.
‘잠 못 이루는 사람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나그네에게는 갈 길이 더 멀며 어리석은 자에게는 윤회의 길은 더더욱 멀다.’ 「법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