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가비라국에 탄생하시어 29세에 출가하시고 35세에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를 이루셨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날이 섣달 초여드레였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탄생하시고, 성도 하셨으며, 처음 법문 하시고, 열반에 드신 날을 보통 불교의 사대 명절이라고 부릅니다.
부처님의 탄생에서 마지막 열반에까지 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지만 워낙 오랜 옛날의 일이요, 또 인도에서는 기록으로 잘 남기지 않는 습관들 때문에 부처님의 일생에 대한 부분이 잘 알려질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고, 또 전해져 오는 경전의 내용도 많이 다르리라고 추측하는 이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도를 성취하신 일은 한 순간이었고, 그 전에 이 생에 태어나서는 6년을 고행했다고 하는 짧음으로 어떻게 그 많은 공덕을 감출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 전생의 수행에 대해서 다시 첨가한 경우가 있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
「장아함」 대본경에서는 부처님이 탄생하실 국토에는 64가지의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고, 어머니가 되실분은 32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의 탄생에 대한 국토와 여성의 이상상이 열거된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장아함경」의 대본경에는“보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모태에 들어 계실 때, 생각을 오로지 해 어지럽지 않았다. 그 어머니는 오계(五戒)를 받들어 지켜 깨끗한 행은 밝고 신심이 돈독하고 남을 사랑하였다. 모든 착함을 성취하고 즐거워 두려움이 없었다. 그래서 목숨을 마친 뒤에는 도리천에 태어났다. 이것이 과거칠불의 공통된 법이다”고 합니다.
탄생한 뒤에 32상을 갖추었음을 일일이 나열하고 있습니다. 또 대본경에서는 “사문(沙門)이란 모든 은혜와 사랑을 끊고 집을 떠나 도를 닦는 사람인데, 모든 감각기관을 잘 억눌러 다른 바깥 욕망에 물들지 않고 자비스런 마음으로 어떤 생명도 해치지 않는다. 괴로움을 당해도 슬퍼하지 않고 즐거움을 만나도 기뻐하지 않으니 모든 것을 능히 잘 참아 대지(大地)와 같으므로 사문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게송에는,
“깊고 미묘한 법을 가리어
그는 듣자 이내 집을 떠났네.
은혜와 사랑의 감옥을 벗어나
아무런 결박도 있을 수 없네.”
라고 읊었습니다.
그리고 번거로운 일을 떠나 한적한 곳에서 참 도를 구하고자 했습니다. 또
‘중생은 참으로 불쌍하다. 항상 어둠 속에 있으면서 몸은 언제나 위험하고 약하다. 남아 있고 늙음· 병 ·죽음이 있다. 그래서 이 폼은 모든 고통이 모여 있는 곳으로서 여기서 죽어 저기서 나고, 저기 죽어서 여기에 난다. 이 괴로움의 덩어리로 인하여 바퀴처럼 돌아 끝이 없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마땅히 이 괴로웅의 원인을 밝게 알아 남과 늙음과 죽음을 없앨수 있을까.’를 생각하였습니다. 남과 죽음은 무엇을 인연하는지 지혜로써 그 말미암아 오는 곳을 관찰했습니다. 그리하여 십이인연을 역관하기 시작했지요.
“이 세상에 태어난 생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있다. 그러므로 생은 늙음과 죽음의 인연이다. 생은 유(有)를 따라 일어난다. 그러므로 유는 생의 인연이다. 휴는 취를 따라 일어난다. 취는 애를 따라 일어나고, 애는 수를 따라 일어나며, 수는 촉을 따라 일어나고 촉은 육입(六入)을 따라 일어나며, 육입은 명색을 따라 일어나고 명색은 식을 따라 일어나며, 식은 행을 따라 일어나고, 행은 치(癡)를 따라 일어난다. 그것은 곧 치를 인연해서 행이 있고 식 ·명색 ·육입 ·촉·수·애·취·유·생의 순관을 거쳐서 인연함으로 늙음·죽음·병·걱정·근심·슬픔·괴로움·번민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괴로움이 음(陰)이라 한다.
보살은 괴로움의 원인을 깊이 생각할 때 지(智)가 생기고, 눈이 생기고, 깨달음이 생기고, 밝음이 생기고, 통(遇)과 혜(慧)가 생기고, 정(燈)이 생겨나게 된다”고 하여 보살은 이렇듯이 그 말미암아 오는 곳을 관찰하여 멸함으로써 늙음 ·병 ·죽음·걱정 ·슬픔· 괴로움 ·번민을 멸하여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또한 「잡아함경」의 여러 곳에서는 ‘중생을 나게 하는 것은 애욕이 바탕임을 누누히 밝혀서 끊어야 할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잡아함」 제39 마녀경(魔女經)에서는 한적하고 고요한 곳에 들어와 선정에 들어 고요히 생각할 때 악마 파피야스는 “나라와 재물을 버리고 무엇을 구비하려 하는가 만일 마음의 이익을 구한다면 어찌하여 사람들과 친하지 않고 어떻게 구할 수 있겠는가?”하고 유혹하지만, 부처님께서는“이미 큰 재물의 이익을 얻어 마음이 만족하고 편하고 고요하다. 모든 악마를 무찔러 항복 받고 어떠한 욕망에도 집착하지 않노라.” 고 세속의 오욕락을 뿌리칩니다.
부처님께서 납월팔일 성도하신 뒤 악마는 다시 말 합니다.
“고타마여, 만일 스스로 그 안도한 열반길을 알았거든 너 혼자 스스로 무위를 즐겨하라..무엇하러 구태여 남을 교화하려는가”하고 말합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악마의 속박 받지 않는 이, 내게 와서 저 언덕 건너가기 물으면 나는 곧 그에게 바른 대답으로써 그로 하여금 열반을 얻게 한다. 그때에 그는 방일하지 않아서 악마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악마는 애욕과 애념과 애락의 세 딸을 시켜 유혹하지만 흔들리지 않게 되자,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바람의 발을 붙들어 결박하고 허공의 달을 떨어지게 하거나, 손으로 큰 바닷물을 긱거나, 숨길로 히말리야를 움직인다면 화합한 데서 아주 해탈한 사람, 그로 하여금 흔들리게 하리.”
부처님께서는 모든 얘욕을 떠나서 열반의 안온환 경지에 머무름이라고 아함경전은 밝히고 있습니다.
「장아함」의 불설마역경에서는 모든 보살에게도 마사가 있다고 하고 무엇을 마사라고 하는가에 문수보살이 답하기를 “일으키는 업이 있고 하는 일이 있다면 마사가 되고, 만일 받아들이고 빼앗는 데에 뜻을 두어 원한다면 마사가 되고, 애욕과 생각(思想) 집착하고 의식하고 구하여 바란다면 마사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보살아 뜻을 두어 도(道)에 이르려고 한다면, 마음이 보시 ·지계 ·인욕·정진 ·선정 ·지혜에 의착 한다면, 마구니의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보시를 하되 의식하거나, 지계에 망상을 내고 인욕에 받아들이며, 정진에 방탕하고, 선정에 뜻이 집착심을 내고, 지혜에 지나친다면 이런 일이 모두 마사(魔事)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 마음이 한가함을 좋아하되 굳이 관법을 얻으려 하거나 명예와 공덕에 집착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공(空)이나 무상(無相)과 무원(無願)을 수행하여 게으름이 없을지라도 부처님의 말씀에만 주착해서도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 곳에 멈추는 것이 마사가 된다는 것이므로 정진(精進)에 멈추는 것도 올바른 수행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진을 알려고 한다면 평등하게 수행하라고 권합니다. 평등하게 정진한다는 것은 순응하여 받아들임이 없기 때문에 방탕함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사 눈이 받아들임이 없으면 빛을 짓지 않고, 귀가 받아들임이 없으면 소리를 짓지 않고, 코가 받아들임이 없으면 냄새를 짓지 않고, 혀가 받아들임이 없으면 여러 맛을 짓지 않으며 몸이 받아들임을 따르지 않으면 닿음을 짓지 않으며, 뜻이 받아들임이 없으면 모든 법을 짓지 않고 평등한 정진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체 번뇌를 짓지 않고 중생의 애욕과 더러움을 끊는다면 이것을 보살의 평등한 정진이라 하고 삼계에 짓는 바가 없어서 오히려 삼계중생의 모든 번뇌에 뜻이 착란된 환난을 구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보시를 행하되 생각하는 바 없이 사은(四恩)을 행하여 모든 간탐한 이들을 거두어 주며, 계율을 행하되 생각하는 바가 없어 모든 악을 범한 중생을 거두어 주며, 인욕을 행하되 생각하는 바가 없어서 모든 성내는 사람들을 거두어 주며, 정진을 행하되 생각하는 바가 없어서 모든 게으른 이를 거두어 주며, 선정을 행하되 생각하는 바가 없어서 모든 어지러운 뜻을 거두어 주며, 지혜를 행하되 생각하는 바가 없어서 모든 나쁜 지혜를 거두어 준다면 이것을 보살의 평등한 정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공무(空無)의 지혜를 환히 깨치고도 이 마음으로 공하여 없다는 생각을 짓지 않으며, 공에 정진하면서도 모든 소견에 노닐으며, 모든 소견을 죄다 관찰하면서도 소견이 없으며, 모든 삿된 소견을 관찰하면서도 공무를 여의지 않아야 비로소 공을 행함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공이란 곧 모든 소견이 공한 까닭에 모든 법도 공하다는 지혜를 환희 깨우치고도 스스로 큰 체 하지 않는 것이 보살의 평등한 정진이라는 것입니다.
원이 없음(無願)을 행한다는 것은 마음을 따라 나는 것과 바라는 것을 마음에 집착함이 없으며, 그 원과 여러갈래(趣)에 나는 바를 행하지 않아서 \'나\'라는 것을 없애서 평등히 제작되고 끝마치는 생사를 없애는 것이 평등한 정진이라 한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나도 없고 남도 없고 수명도 없고 중생도 없음을 바르게 알며, 훌륭한 방편을 알아 정진하여 일체중생을 개화하며 지혜를 통달하여 일체법에 응하거나 응하지 않음과 청정하고 청정치 않음이 없ㄱ는 경지에 들어가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