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스님께서는 평소에 너그러우시고 자비하시지만 때가 결제중이고 또한 정전에 몰두하시기 위하여 최근에는 일체 내외부(內外部)의 법문과 방문객을 만나는 일마저 허락하시지 않으시며 묵언정진하신다는 소문 때문에 과연 「해인」지 대담에 응해주실지 은근히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스님과의 대담을 위해 두 번이나 왔었던 간절함 때문인지 대담이 허락되었고, 예의 맑은 웃음과 차로써 찾아간 일행을 맞아주셨다.
스님의 출가에 대해서는 이미 알려진 대로 전(全) 집안이 출가를 하신 것으로 너무나 유명하다.
출가동기겸 전 가족 출가사(史)를 여쭙자 스님은 마치 아득한 기억을 더듬으시듯이
“그게 벌써 반세기도 넘은 일이 되었구만. 그때 우리 친가와 외가 식구들을 통틀어 40여 명, 머슴까지 합하면 50여 명이 한꺼번에 ‘몰중’이 되었지.”라고 답하시며 웃으신다.
스님께서 태어난 곳은 충남 공주군 우성면 동래리 운천(雲川) 마을이다. 한 집에서 다섯 형제가 함께 살 정도로 다복한 집안이었다.
집안이 처음으로 불교와 인연이 맺어진 젓은 이곳에서 최초로 서양식 솜틀공장을 세워 큰 돈을 번 외증조 할머니와 한 비구니 스님과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어느날 한 동승냥이 지나다가 할머니에게 세상일에 너무 연연하면 나중에 업(業)이 된다고 말했지. 그래서 할머니는 어떻게 하면 업을 짓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어. 그랬더니 일체 문밖 출입을 삼가고 즐거움도 남에제 자랑해서는 안된다고 하셨어. 그 말을 남기고 비구니 스님은 바랑과 삿갓을 마루에 놔둔 채 홀연히 사라졌다네. 할머니는 그로부터 스님 말씀대로 바깥 출입을 끊고, 바량과 삿갓을 대청 마루 위에 걸어 놓고 하루에도 수백번씩 염불을 했지. 할머니가 95세로 세상을 뜨자 장례는 칠일장으로 치루어졌는데 밤만 되면 할머니 몸에서 방광(放光)이 비춰 온 집안을 대낮같이 밝혀주었지. 이런 기적 같은 일을 지켜본 외할아버지가 불교에 귀의하여 수덕사에서 참선을 하였고, 아버지를 따라 절에 다니던 큰 외삼촌이 마침내 출가를 감행했어.
큰 외삼촌은 처자를 둔 채 금강산을 거쳐 해인사 백련암으로 들어가 첫번째로 스님이 된 셈이야. 그 뒤를 이어 둘째, 셋째, 넷째 삼촌이 식구들을 이끌고 함께 잇달아 출가하는 바람에 외가는 멸문(滅門)이 되었어. 어떤 삼촌은 처자를 책임지라고 출가한 형제를 설득하러 갔다가 되려 설득을 당해서 그 길로 스님이 되기도 했어.
특히 주인의 재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머슴들조차 자기보다 많이 배우고 똑똑한 주인들이 재산을 버리고 절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절이 별천지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여 식구들을 거느리고 산으로 들어가 중이 된 경우도 있었어. 집안이 이렇게 되자 혼자 남은 어머니마저 속가해 오래 붙잡아 두지 못했지. 공주사범을 첫회로 졸업한 뒤 일본 고동사법학교를 보내달라고 졸라대던 큰누나가 어느날 증발해 버렸어. 얼마 후 금강산 소인(消印)이 찍힌 펀지 한 장이 사진과 함께 날아왔는데 사전 속의 누나는 삭발한 채 염주를 들고 있었어.
큰누나와 입산을 시작으로 맨 먼저 어머니가 문경 대승사로 출가를 했고, 마음이 여렸던 아버지는 2년 뒤 입산을 권유하는 어머니의 편지 한 장을 받고 나를 포함한 삼남매를 데리고 출가를 결행했지. 이로써 우리 집안은 완전히 종적을 감춘 셈이야”
이렇게 스님 집안이 차례로 출가하게 된 것은 이생의 인연만으론 부족하다고 말씀하신다. 또 스님께서 태어난 마을 뒷산에 승무산(僧舞山)이 있는 것과도 어떤 연관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고 하신다.
스님의 집안이 출가한 내력은 억지로 된 게 아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자연스럽게 인연을 따라 이어진 것이다.
일타스님께서 입산하신 것은 1942년 열네 살 되던 해이다. 통도사에 있는 보광중학교를 다니면서 대강사이신 윤고경(尹古鏡)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계율을 배우고 이듬해 1943년 수계(受械)를 했다.
“이 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열여덟 살이었어. 그해 은사스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사십구일이 지난 후 통도사에서 송광사까지 칠일을 걸어서 효봉(曉輝)스님을 찾아 뵙고 삼일암(三日魔)선원에서 수선(修輝)을 했지. 효봉스님께서 해인사의 ‘가야총림’ 조실로 가신 뒤, 다시 통도사로 돌아가 승가대학에 입학하여 1949년에 졸업을 했는데 그 이듬해 사변이 터졌어.
승가대학올 졸업하고 나니 학문을 더 하고 싶은 생각이 일더구만. 대학에 가서 문학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게 일어났어.
1954년 어느 봄날, 「능엄경」을 읽다가 갑자기 내면의 소리를 들었어. 대학에 가겠다는 마음은 결국 사람 노릇 하겠다는 미련 때문이란 것을 알았지. 그 순간 사람노릇 할 생각일량 집어치우고 도 닦는 중노릇만 하기로 결심을 굳혔지.”
이런 일이 있은 후 스님께서는 긴 수행과정 속에서 인간적인 갈등과 속세에 대한 번민을 떨쳐버리기 위해 연비를 감행하게 된다.
“이럴까 저럴까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던 바로 그 해 ’54년에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에 갔어. 「능엄경」에 ‘삼매(三妹) 를 닦고자 하여 여래의 형상 앞에서 소신(燒身) 연비(然臂) 연지(然뺀旨)를 한다면 이 사람은 옛 빚을 일시에 갚아 끝내는 사람이라 하리라’는 부분을 접하고는 기도를 하고 연비를 실행했어. 이로써 온갖 망상을 깨끗이 씻고 수행에 전력하는 대전기(大轉機)가 된 것이야.”
연비. 스스로 불에 제 살을 태우고 뼈를 태움으로써 적멸의 상태에 들어가고 거기서 비로서 자유로워지는 장엄한 구도의식(求道儀式)이다.
일타스님의 오른손 네 손가락은 모두 이 연비의식에 의해 없어지고 뭉퉁그래진 형상만 남아 처절했던 구도의 순간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그 후 스님께서는 태백산 도솔임에 들어가 혼자서 만 5년을 누더기 한 벌로 수행에 진력, 한치의 회의도 가져보지 않을 만큼 청정한 세계에 도달할 수 있었다.
스님께서는 당시의 열락(脫樂)을 이렇게 회상하신다.
“55년에 태백산에 들어가 60년까지 외적인 인연을 일체 단절하고 산 속에서만 살았으니 나의 확실한 심중은 그 만 5년동안의 정진 속에서 싹트고 열매 맺었다고 할 수 있지. 부처님의 모든 말씀이 진실로 내게로 다가왔어. 내 생애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시간은 스물 일곱에서 서른 두세 살까지의 도솔암 시절이었다고 믿어. 참으로 법열(法悅)로 가득찬 시간이었다고 생각하지.”
도솔암에서 내려오신 후 스님께서는 한때 불교정회운동의 차원에서 비상종회가 구성 되었을때 15인으로 구성된 비상종회의원으로 활약하기도 했지만 이 일 외에는 별다른 직(職)을 맡아본 적이 없다고 하시면서 자그마한
일화 한 토막을 들려주셨다.“어느 해인가 나를 해인사 주지를 시킨다기에 밤새 도망을 친 일이 있어. 공부하러고 산 속에 들어온 사람을 보고 주지를 하라고 해서 달아날 ‘주(走)’자에 갈 ‘지(之)’자의 ‘주지(走之)’를 방에 써 놓고 달아난 적이 있어. 수행하는 사람은 수행을 전부로 알고 그것을 생명처럼 여겨야 해.”
그래서 스님께서는 일등 중노릇은 무상발심(無常發心)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신다.
스님 행적 가운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세계여행이다. 부처님의 나라 인도는 물론이고 아시아와 유럽, 북미, 남미, 최근에는 중국 등 48개국을 여행하시면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시기도 했다.
스님께서 하시는 여행담은 너무나 재미있었지만 지면관계상 다 설을 수가 없어 안타깝다.
그동안 스님 스스로 일생을 뒤돌아볼 때 율사로서 법사로서 선사로서의 삶을 살아오셨지만 늘 은사스님이셨던 고경스님의 교훈을 잃어버리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다.
“아무리 천하의 불전(佛典)을 다 알고 팔만대장경을 다 의리(意理)로 해석한다고 해도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를 당해서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임종때 말씀하셨는데 이제 남은 생은 율사, 법사로서의 삶보다는 선수행에 전념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스님께 한 세상 살아가는 데 후회가 따르지 않는 만족한 삶을 살아가는 지혜가 무엇인지를 여쭈었더니,
“생명은 본래 청정한 것이기 때문에 먼지만 닦아내면 본래 모습을 찾을 수 있지. 본래 모습이 드러날 때까지 부지런히 노력해야 하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은 가장 정확하고 바른 길잡이가 될 것이야.
사람은 세계 속에 놓인 주체자이지만 결국은 모든 문제가 자기와 상황과의 관계, 자기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고 확대되고 열매 맺기 때문에 좋은 인연을 맺어야 해. 선인(善因) 선과(善果)로 엮어지는 생애, 그것이 곧 진실로 자아를 찾는 구도자적 삶이라고 할 수 있지. 사람이 지니는 성격에 따라 단순한 삶의 모습을 그리는 사람, 다양한 모습이 되고자하는 사람, 모두가 각기 개성 있는 모습을 지니지만 분명한 것은 철저하고 확실한 자아를 찾아 성숙시키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인생의 문제라고 생각해.” 라고 일러 주신다.
스님께서는 크고 작은 파도가 모두 고요해지면 바다 위에 우주의 만 가지 모습이 그대로 그림자로 찍히듯이 일상에서 평정한 마음을 가져야 세상을 관조(廳원)할 수 있다고 강조하셨다.
스님과의 대담을 마치고 나오니 이미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캄캄한 밤이었다. 겨울밤 하늘에는 보석을 뿌려놓은 듯 별빛만이 가득했다. 제각기 자신의 삶을 비추고 있는 별을 보면서 내 별은 어떤 빛으로 떠 있는지 먼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