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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란 상대적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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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목정배 1991년 01월 107호
자신을 알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많은 사람들이 “내 마음 나도 모른다”고 하면서 하루를 살고 있다.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이 제 마음을 모르고 산다면 자기 삶을 누가 대신 살아주는 것이다. 우리는
한 찰나를 살더라도 제 마음의 행로를 알고 살아야 한다. 마음의 길을 밝힌 사람은 자기 생활을 빛나게 할
것이다. 불교는 마음을 밝게 하는 공부이며, 더 나아가 깨달음을 증득하는 종교이다.
불교의 발생은 고대인도 가바라국에서 비롯한다. 이 나라는 농업국이었다. 부유한 나라는 아니었는지 모르지만 비교적 안온한 나라였다. 단지 걱정이 있다면 정반왕에게 태자가 없는 것이 최상의 고민이었다. 마야부인이 중년부인이 되었을 때 왕자를 갖게 되었는데 그 분은 룸비니동산 무우수 아래에서 탄생하셨다. 이 분의 아명은 싯다르타, ‘일체의 성취’를 의미하는 말이다. 즉 완성자, 정각자가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싯다르타가 깨달은 진리가불교의 교설이다.
그러면 불교 교설은 어떠한가 여기서 그 근간이 되는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불교의 교설, 붓다가 깨달으신 진리가 무엇인가, 그것은 신본주의사상에서 인본주의로, 절대주의에서 평등주의로 혁명한 것이다. 여기서 혁명이란 의미는 신본주의를 혁파 불식하였기 때문이다. 고대 인도 사상 가운데 가장 깊게 뿌리박혀 있고 넓게 유포된 사상은 브라흐만에 대한 신앙이다. 이 교설의 신앙은 모든 생류는 브라흐만의 피조물이라고 하여, 브라흐만을 범신 가운데 최고신으로 섬겨 신앙하였다. 더욱이 사람의 출생에 대해서도 네 가지로 구분하여 절대절명의 차별성을 두었다.
첫째 계급에 속하는 바라문족은 브라호만의 입에서 태어나고, 둘째 계급인 크샤트리아족은 브라흐만의 어깨 쪽에서 태어나 정치 군사의 일을 맡게 되었고, 셋째 계급인 바이샤는 브라흐만의 생식기에서 태어나 평민적인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으며, 끝으로 수드라는 브라흐만의 발바닥 밑에서 났으므로 노예족으로 빈천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여 그 신분의 격차와 차별은 엄격하였다.
브라흐만의 입에서 태어난 바라문족은 신을 찬송하고, 우주의 질서를 좌우하는 사제자(司祭者)의 권능도 부여
받아 그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러한 신권주의가 신본주의로 발전하여 절대적 권위를 독점하는 절대계급주의로 전횡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신본주의가 팽배하고 있는 시대에 붓다는 정면으로 반대 사상을 내어놓은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생명은 어떠한 계급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다만 그 사람의 일생 동안의 행위에 의하여 그 직분이 생길 수는 있어도 태어남에 모두가 한결같은 생명의 자유가 선재하고 있음을 강조하여 “모든 강이 바다에 흘러가면 한 맛이 된다. 캔지스강이든, 인더스강이든, 그 많은 강물줄기가 흘러 바다에 이르면 모두가 한 맛으로 된다. 그 출생이 어떻든 깨달음을 얻으면 평등으로 환원된다”고 하였다.
이 선언은 태어날 때부터 절대신분의 구속에 계박되는 인도의 계급적인 전통사상을 여지없이 타파한 것이다.
인간 중심적인 평등사상을 내놓음에는 붓다의 인간적인 자비와 더 나아가 진리를 증득하려는 삼매정진과 인간 본래면목의 원각의 자리를 철견한 것이다. 그러면 여래의 깨치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연기연멸의 우주상을 깨달으신 것이다. 이 법은 내가 깨닫기 전에도 있었고, 다음 누군가 또 깨닫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연기(緣起)란 상대적인 것을 의미하며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정형을 강고 있는데 이것과 저것 사이에 어떤 특수하고 절대적인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은 항상 상대적인 것이다. 이것에 유일적인 독립인자가 있으면, 저것에도 유일적 자존자가 있어 그것이 대립적 관계로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 관계에서 상보적 실존을 현전케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조그만 미물이라도 유일적 존재로 생기한 것이 아니다. 서로 상관관계의 현존적 실재로 존재하였다가 그 상관관계의 힘이 약화되면 그 존재의 모양이 변멸하고 만다. 그러나 그 존재의 모양을 바꾸었다고 하여 그 존재를 구성한 요소마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요소로 환원하였다가 그 요소가 또 다시 환원세력이 생기면 앞서와 같은 존재나 또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이다.
원인과 조건, 그리고 결과가 서로 서로 무한히 연속된 세력을 강고 있음을 갈파한 것이다. 어떤 절대자가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결합의 원리가 묘계합연(妙契合緣)하는 것은 연기의 세력이 될 것이다.
이러한 연기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불교는 이 세상의 현상을 세 가지 측면으로 보고 있다. 삼법인(三法印)이다. 이 세상의 현실태는 세가지 방향으로 완전하게 파악하여 확인하고 또 깨닫고 살아야 함을 가르쳐 준 것이다.
첫째는 재행무상(諸行無常)의 진리 인식이다. 모든 존재의 운동능력은 무상하다는 것이다. 힘의 능력이 절대적 존재로 항존하고 영구적인 것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행’을 운동능력, 힘의 능력을 ‘시간’으로 보면 더욱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시간은 절대적 에너지가 아니다. 무상한 에너지다. 변화하는 힘이다. 힘이 어떻게 변하는 것이냐고 하면, 모든 존재는 가변성의 세력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 ‘행’인 것이다.
가장 짧은 시간인 찰나(刹좋那)에도 9백 번의 생멸이 있다고 한다. 한 찰나가 75분의 1초인데, 이 75분의 1이
라는 찰나 속에 9백 번이나 생과 멸이 있다면 에너지가 얼마나 변화무쌍 한가를 깊이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시간의 영원성, 시간의 절대성을 소유하려는 아집이 강하게 작용한다. 이러한 시간의 아집성, 시간의 소유성을 희망하기 때문에 유상적 세계관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시간은 생멸 무상한 것이다. 이러한 무상의 극점을 파괴하라는 것이 제행무상의 인식인 것이다. 두 번째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다. 모든 존재(法) 무아임을 파악하게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존재는 항구적이고 불변적인 자아의 생성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자기 존재는 다른 존재와 함께 이룩된 것임을 확인하자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라는 존재가 절대적인 것으로 생현된 것이 아니라 상대적 조건에서 생기한 것임을 깨쳐야한다.
부처님 당시 킷사코타미란 여인이 있었다. 외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그 아들에 대한 사랑은 누구에 비길 수 없었다. 이 아들은 그녀에게 있어선 절대적인 존재요, 영원한 삶의 보람으로 온갖 정성을 다 쏟아 어루고 다독거리면서 행복을 만끽하였다.
그 애지중지한 아이가 죽었다. 애통하기 이를 데 없어서 죽은 아이를 살리는 약을 구하러 온 약방을 헤매고 다녔다. 약간 광기가 도는 여인이 되다시피 온 곳으로 약을 구하러 다녀도 어느 누구 하나 사람 살리는 약올 일러주지 아니하였다. 그러한 약은 세상에는 없는 것이다.
여인은 마침내 부처님께 나아가서 한 가르침을 받아 약을 구하러 나섰다. 그 약은 겨자씨를 구하는 것이었다. 어느 집에 가든지 한 번도 사람이 죽은 일이 없는 집에 가서 겨자씨를 구하는 것이다. 킷사코타미는 그러한 일은 쉬울 줄 알았으나 어느 집에도 영원히 생명을 유지한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죽음을 맛본 집이었다. 이때 여인에게 희미한 생명의 느낌이 들어왔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사람이 죽지 아니한 집은 없다.” 이러한 인식의 여명이 밝아진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존재에는 절대적이고 영구적인 에너지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화합하여 이룩된 것이다. 그것을 인연화합이라고 한다. 인연을 맺을 때 그 결합하는 것이 함부로 뒤섞이는 듯하여도 화합적인 평등을 유지해야만 결합의 묘가 생기는 것이다. 결합에 의하여 새로운 것이 생기므로 하나의 독특한 자아가 없는 것이다.
즉 다원적인 결합에 의하여 모든 존재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일적 독생자는 없는 것이다.
셋째번의 진리는 일체개고(一切皆苦), 즉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은 괴로움을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괴로움이 앞서고 있음을 예견하여야 함을 의미한다. 제행이 무상하다고 해서 제법이 무아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괴로움이 뒤따르게 된다. 시간의 영속성, 존재의 항구성을 고집하는 사람이었다면, 곧 괴로움과 만나게 된다. 시간변이의 무지, 존재불멸의 고집, 이것이 고통이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현실적 모든 시간은 무상하고, 존재는 무아라고, 선재파악 하자는 것이며, 이러한 선재파악이 가능하며 체험을 바탕으로 생활하는 사람이 괴로움을 멀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연기사상으로 발전적 해석을 가한이 삼법인은 불교의 기초교리이며, 우리는 이러한 교리의 파악에 의하여 어떤 것이 일어나고(生〕, 그것이 어떤 일정기간에 머물고〔住〕있다가, 변화가 일어나고〔異〕, 다시 사라지게 됨(減)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상이 동양문화권을 지배하면서 정치·경제 ·문화 등에 영향을 미치게 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역사의 전통을 의미한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우리나라 사상의 근저에는 현실이 괴롭다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 ‘사는 것이 어렵지’라고 물을 때, ‘너 고생이 많지’라고 한다. 이러한 현실적 고행을 즐거움으로 환원시키려고 노력하자. 즉 극락왕생-정토신앙, 이러한 모든 것이 현실은 괴로운 것이라고 이해함과 동시에 이 현실에다 완전한 편안을 끌어들이려는 노력이 불국토건설 사상이다. 신라시대에 왕성히 전개된 불국사상은 사후세계에 극락으로 간다는 것이 아니라, 현생에서 극락에 살자는 사상인 것이다.
‘살자’고 할 때 지금 여기에서 살자는 자기의지가 강하게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불교의 무상·무아를 자칫 염세 ·도피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에는 현실을 절실하게 파악하여 내일과 오늘을 바르게 인식하고 오늘을 참답게 창조하자는 적극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내 마음을 내가 알고 살아야 한다. 내가 나를 모르면 누가 알 것인가. 불교는 우리들에게 자기 존재를 바르게 인식하여 오늘과 내일을 참답게 살 수 있는 철학을 주고 있는 문화의식의 지침으로, 우리에게 항상 무한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아발견과 자각의식을 가르치는 자아인식의 종교로서 지금 존재하는 나를 밝게 감싸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