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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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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문리 일기 - 현진 1992년 01월 119호
삭발하는 날 아침엔 대중과 더불어 산다는 게 어느 때보다 풋풋하게 느껴진다. 오늘은 이번 결제철에 새로 방부한 스님께 삭발을 부탁했다. 유난히 정이 가는 스님이라서 얼굴도 익힐 겸 도반 대신 그와 함께 깎기로 이미 며칠 전부터 마음먹었던 것이다. 내가 더운물에다 머리를 여러 번 적시고 비누질을 할 동안, 그 스님은 크게 베이는 것을 막으려고 양쪽 귀퉁이를 잘라 낸 면도기에 새 날을 넣었다. 눈썹까지 흘러내린 비눗물을 수건으로 한번 훔치고는 쭈그리고 앉았다. \"준비 다 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며 합장을 했다. \"그럼 삭발하겠습니다.\" 그 스님은 한 손으로 머리를 가볍게 잡고는 바른손으로 삭발을 하기 시작한다. \"잘 깎아 주십시오.\" \"좀 서툴긴 하지만 조심해서 깎지요.\" 서툴다는 말에 조금 걱정이 되었다. \"나 오늘 실습용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모두들 머리를 깎다 말고 웃어댄다. 이제 막 출가한 스님이나 손놀림이 무딘 스님이 삭발하는 일을 우스갯소리로 \'실습\' 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실습 상대가 되면 괜히 걱정이 된다. 칼을 다루는 일이므로 더욱 그렇다. 자칫 잘못하여 머리에 상처라도 내면 서로에게 미안한 일이기 때문이다. 삭발하는 일은 무엇보다 숙련된 손놀림을 요구하고 경험이 앞서는 작업이다. 특별한 법칙보다는 감각으로 해야 한다는 게 옳을 성싶다. 언젠가 무턱대고 도반의 삭발을 맡았다가 보기 흉할 정도로 머리에 상처를 내고는 법당에서 참회를 하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은 어두운 곳에서도 감각으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이 지났다. 그냥 절 밥을 먹는 게 아니고, 배우는 일 없이 법랍을 채우는 게 아닌 모양이다. 그래서 중노릇은 익어야 된다고 했던가. 그 스님은 조심스럽게 머리를 다루고 있었다. 약간 긴장을 한 것 같다. \"손목에 힘을 줄이고 날을 조금만 낮추세요.\" 이렇게 몇 가지 고쳐 주었더니 손놀림이 훨씬 부드러워졌다. 머릿결을 따라서 칼을 움직여야 모근이 상하지 않는다. 서걱서걱 모발이 잘려 나가는 소리가 기분을 묘하게 만든다. 일상의 번뇌덩어리가 잘려 나간다는 쾌감 때문인가. 아무튼 머리 깎는 소리가 시원스레 들리는 날에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진다. \"머리카락이 억세지요.\" \"상기가 아주 많아요.\" 망상妄想이 많으면 머리에 상기가 돋는다고 했다. 순간 부끄러워졌다. 성질을 잘 다스리지 못해 모발이 억세게 되었고 마음을 잘 다듬지 못해 상기가 창궐했으니. \"공부는 되질 않고 쓸데없는 망상만 늘어서 큰일입니다.\" \"번뇌가 곧 보리라는 말도 있잖아요.\" 이번엔 귓볼까지 뜨거워 왔다. 출가한 뒤에 진정 부끄럽지 않은 삭발을 몇 번이나 했던가. 그 스님의 한마디가 줄곧 잊고 지내왔던 출가본분사出家本分事를 잔잔히 일깨워 주었다. 자기 수행의 점검이 없고서는 보름마다 한번씩 하는 삭발 행위는 공허한 반복에만 머물 뿐이다. \"상기가 난 부분은 깎기가 힘들군요.\" 아닌 게 아니라 몇군데 가벼운 상처를 냈을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방금 목덜미 부분을 칼날이 지나며 상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비누거품이 조금씩 스며들 때마다 따끔따끔하다. 삭발을 거의 마친 것 같다. \"머리를 한 번 헹구십시오.\" 다시 더운물을 받아 씻었다. 몇 군데가 까칠까칠한 게 손끝에 느껴진다. 손으로 만져서 까칠한 부분이 없어야 잘된 삭발이다. 출가 첫 무렵에 사형師兄을 삭발할 때 가끔 장난끼가 생기면 귀 윗부분에 밤톨만하게 머리카락을 남겨두곤 했다. 잘 보이지 않는 곳이라서 그냥 있다가 잠깐 뒤에 발견하고는 마냥 웃던 때도 있었다. \"한 번 더 손질하겠습니다.\" 까칠한 부분을 세심하게 손을 보아 준다. 그 새 하얀 머리가 세숫대야에 떠놓은 물위로 흐릿하게 비쳐 드러났다. 역시 수행자는 머리가 맑아야 제격이다. 머리가 까맣게 자라 있다는 건 수행자로서 그리 마음 개운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목욕한 뒤보다 삭발을 깨끗이 하고 난 뒤가 훨씬 개운하다.
\"삭발 끝냈습니다.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성불하십시오.\" 삭발하는 날, 내 나태와 방일도 함께 잘려 나가는 느낌이다. 훤히 드러난 내 모습이 더없이 좋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