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전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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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92년 01월 119호
지금으로부터 불과 오륙십 년 전에 생존하셨던 대덕大德 남전선사(1868-1936)의 법호를 기억하는 대중들은 그리 많은 것 같지 않다.
\"이번 호「가람의 향기」에는 어느 스님이 소개될 것이냐?\"고 물었을 때, \"남전선사\"라고 대답하였더니 \"그런 분도 해인사에 살았던가요?\"하며 퍽 생소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래서 스님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남전스님은 해인사에서 가장 번듯한 건축물의 하나인 구광루 현판 글씨의 임자이며, 퇴설당과 장경각 사이의 문인 등지문等持門이란 편액의 글씨를 남긴 명필에다가 주옥과 같은 시문과 범어사 사적비를 직접 짓고 쓴 명문장가였으며, 서울에 선학원을 세워 선불교의 대중화를 실천하려 했던 최근세의 큰스님\" 이라고 대충 스님의 행장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였더니, 그제사 \"아, 그렇군요!\"하고 수긍하는 눈치다.
그래도 남전스님에게는 석주스님과 같은 고제高弟가 계시므로 그나마도 문집이 나와 있어서 선사의 어렴풋한 편모나마 밝힐 수 있지, 그것도 없었더라면 어찌 스님의 행적을 알 길이나 있었겠는가.
특히 하찮은 기록이나 명리를 멀리했던 선사들의 삶은 모조리 풍화되어 역사의 늪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그 자취마저 느낄 수 없으니 봄 여름 가을 홀로 이 산, 저 산에 피어나는 산유화들은 이름없이 사라져간 선사들의 순결한 영혼인가?
선사의 휘는 한규翰圭요 법호는 남전南泉이며 스님 스스로는 자신을 우두산인牛頭山人 또는 백악산인白岳山人이라고 하였다 하니 우두산이란 바로 가야산을 가리키는 말이며, 백악산이란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스님은 서기 1868년 9월 6일 해인사의 동구밖인 가야면 구원리에서 태어났다.
스님은 일곱살이 되었을 때부터 그 당시 안동 거문간동에 있던 사숙私塾에 기거하면서 유학자 서송재徐松齎 선생 문하에서 사서 삼경을 비롯한 유교 경전과 사서와 고문을 십이 년에 걸쳐 두루 수학하였는데, 시문과 백가지어에 능통하여 일대 문장가를 이를 만큼 실력이 증장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선비로서의 고매한 인품을 도야하는 한편, 입신 출세를 향한 청운의 큰 뜻도 품은 늠름한 청년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스님은 나이가 십육 세에 이르자 신라 말의 대문장가인 고운 최치원의 유적지를 둘러보고 추모의 뜻을 마음에 새기는 한편 고운 선생의 최후의 유적지인 가야산을 순례하였다. 당시의 해인사에는 왕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었는데 이를 본 그는 세상의 무상함을 느끼고 서서히 무너지고 있던 나라의 운명을 조망하면서 입신 출세의 허망함을 여실하게 느끼고 출가 의지를 다져나갔다.
스님은 그 해를 넘기기도 전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출가를 단행하였다.
대천세계에 한줄기 빛살은 하늘에 가득하고
송월과 숲속의 바람은 스님들과 함께 잠들었네
스님은 신해信海 스님에게 축발하였으며 출가한 뒤에 해인사 백련암에 기거하면서 초발심을 키워 나갔다. 나이 이십 세가 되던 1887년에 청암사로 가서 혼원混元 강백에게서 사집과 능엄경을 비롯한 기신, 반야를 배웠으며, 이십삼 세에 대구 동화사 내원암에서 회응晦應강백에게서 사교를 마치고, 이십오 세 되던 해에 다시 청암사로 돌아와서 회응스님께 대교인 화엄경을 비롯한 선문염송과 전등록을 배워 여법한 이력종장이 되었다. 이미 스님은 이때부터 벌써 승가내에는 가장 훌륭한 명필로 손꼽히고 있을 만큼 글씨 솜씨가 제방에 알려져 있었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던 해인 1905년에 스님과 가장 가깝게 지내던 월해越海스님이 입멸하는 불의의 상을 당하자, 스님은 생사 대사가 급함을 느끼고 한층 참선 정진해 용맹심을 일으키는 소중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듬해 1906년 병오년 여름에는 동래 법어사에서 하안거를 지냈으며, 그 뒤에 스님은 운수납자가 되어 오대산과 제방선원을 역방하였다.
1908년 무진년에 스님은 해인사 금강계단에서 제산선사로부터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고 하안거를 퇴설당에서 성취하게 되었는데, 스님은 이때의 선지禪旨를 다음과 같이 펼쳐 보이며 대중을 깨우쳤다.
園覺道場何處
現今生死卽是
원각도량이 어디에 있는가
오늘 이 자리, 살고 죽는 바로 이곳
이 게송은 지금도 장경각의 법보전에 편액으로 걸려 있어서 지나는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주고 있는 게송이다.
스님은 1911년 신해년에 범어사 동래 포교당의 포교사로 취임하였으며, 한일합방 이후 일제의 주구가 되어 갖은 매교 행위를 일삼던 이회광이 해인사 주지가 되자 스님은 해인사를 떠나 동래 범어사에서 결성된 바 있는 민족불교운동의 거점 임제종의 포교사가 되어 전국으로 다니면서 신도 교화에 앞장서기도 했다.
스님은 신도를 제접하여 보시받은 돈을 한 푼 두 푼 모아서 거액의 정재淨財가 만들어지자 서울 안국동에 선학원을 새로 짓는 대원력에 사용하였다. 당시 도반이었던 도봉道峰, 석두石頭, 성월惺月 등의 선우들과 선음禪音을 세인들에게 널리 선포하고 선법으로 심안心眼을 열어 이 땅에 선풍을 선양하고자 선학원을 창건하였던 것이다. 선학원은 선객의 도량으로서뿐만 아니라 불조佛祖의 선맥을 계승하여 펴나가는 선종의 중앙기관으로 그 설립의 뜻이 참으로 지대하였다.
또한 선학원은 일제치하 총독부 관할 아래에서 당시 사찰령의 지배를 받지 않고자 처음부터 사寺, 암庵이라는 전통적인 절이름을 피하여 선학원이라 이름하여 불교 선종의 책원지策源地로서 해방 전에는 항일민족운동의 본영구실을 다하였고, 해방 뒤에는 정화불사의 본산 구실을 하였다. 설립과 동시에 적음寂音선사 등과 선우회를 구성하여 선풍을 떨치다가 1934년에는 재단법인「조선불교 중앙선리참구원」으로 발족을 보게 되었는데 스님을 비롯하여 적음, 방한암, 송만공, 오성월선사 등이 초대 이사가 되었다.
그로부터 한용운을 비롯한 독립애국지사들의 근거지가 되었고, 한용운선사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이곳에서 유교 법회가 열려 정법 수호의 성지가 되기도 하였다.
선사는 평소에 신도들이 전차비로 오 전, 십 전씩 드리면 그것을 전혀 쓰지 않고 걸어다니면서 이를 모아 두었다가 범어사에 터지를 매입했고, 때로는 일을 해서 번 돈을 적립해서 재경 십여 년에 걸쳐 해인사 불량답佛粮沓 쉰 마지기를 장만했으며, 선학원을 유지하기 위해 금화와 금성에 전답 백여 마지기를 마련하기도 하여 언제나 공익 정대한 모습으로 삼보를 호지護持한 특출한 분이셨다.
1922년에 해인사에서 주지에 취임하기를 간청하였으나 고사固辭하였고, 1924년 직지사 조실을 거쳐 이 년 뒤에는 통도사 보광전에 주석하며 경봉선사와 법거량을 하기도 했다.
스님은 그 뒤에 범어사 사적비를 짓고 직접 비문을 썼는데, 아직도 범어사 동구에 그 신필을 전해주고 있으며 예봉평신禮峰平信 노선사와 완허장섭翫虛仗涉선사와 경산경식擎山敬植선사의 행장을 짓기도 하였다. 지금도 해인사 팔만대장경 가운데에 계경비목戒經比目은 스님의 친서판각이다.
이처럼 스님은 전생애를 걸쳐서 전법 도생의 보살행을 몸소 실천하시고, 1936년 병자 4월 28일 세수 육십구, 법랍 오십사 세를 일기로 서울 선학원에서 입적하셨다.
이상과 같이 스님의 행장을 살펴본 바, 선사는 경학에 밝은 선지식이면서 법문과 글 잘하는 선승이었으며 또한 달변가이기도 했다. 만공, 만해, 도봉, 성월선사와 도반으로서의 공덕심의 의표儀表요 높은 도인이자 희대의 명필 대문장이었다.
조선 왕조의 고승 상봉霜峰선사의 법손 완허장섭선사의 법맥을 이었으며, 제자로 석주대화상이 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