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부에 대한 예배_상불경보살품常不輕菩薩品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법화경이야기 - 이원섭
1992년 01월 119호
상불경보살
수량품에서 부처님의 수명의 영원하심이 설해진 것을 본문의 정종분이라 한다면, 분별공덕품·수희공덕품·법사공덕품에서는 법화경을 수지하는 자가 받게 될 공덕이 설해지고, 그것을 뒤이어 이 상불경보살품에서는 구체적으로 그같은 공덕을 실현한 인간상이 제시되었으니, 이것들은 본문의 유통분에 속한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사람이었던가.
과거 무량겁 전에 위음왕불威音王佛이라는 부처님이 나타나사 삼승으로 교화하시다가 열반에 드신다. 그리하여 정법正法, 상법像法의 시대가 다하려 할 즈음에 다시 부처님이 출현하시니 또한 그 이름이 위왕불이시어서, 이렇게 차례차례 이만억二萬億의 위음왕불이 출현하신다.
그런데 첫 위음왕여래께서 멸도하사 정법이 없어지고 상법의 시대로 접어들었을 때의 일이다. 불교가 본질에서 벗어나 형식만을 유지함이 상법의 시대인만큼, 이르는바 \"얻지 못함을 얻었다 하며 깨닫지 못함을 깨달았다 하는\" 증상만增上慢의 비구가 큰 세력을 형성하는 중에, 상불경이라고 불리우는 보살의 비구가 있었다.
\"득대세야. 그 무슨 까닭으로 이름이 상불경이던가. 이 비구 눈에만 띄면 비구건 비구니건 우바새건 우바이건, 다 그들을 예배하고 찬탄해 이같은 말을 하되, 내 그대들을 깊이 존경해 감히 업신여기지 아니하노니, 어째서이뇨. 그대들이 다 보살의 도를 행하여 부처가 될 것이기 때문이로다.\"
항상 \"경멸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다니므로 상불경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어서,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붙여 준 별명이 된다. 하기는 만나는 사람마다 예배하면서 \"나는 당신을 업신여기지 않으니, 부처님이 되실 분이기 때문이다\"하고 다녔으니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을 것은 당연하다. 그리하여 기인으로 보아 웃어 넘기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개중에는 노골적으로 반발하는 무리도 없지 않았다.
\"이 무지한 비구는 어드메서 왔는다?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그대들을 업신여기지 않노라 하면서, 우리에게 수기해 마땅히 부처가 되리라 하나, 우리는 이런 거짓된 수기를 아니 믿노라.\"
광무제라 하면 망했던 한漢의 사직을 다시 일으킨 인물이거니와, 무명의 청년이던 시절에는 한 사람이 제왕의 상이라 말하자 자기를 놀린다 하여 상대를 때린 일도 있었다고 전한다. 입으로는 \"일체중생 실유불성\"이니 뭐니 하지만 내심에서 성불 따위는 남의 일로 생각하고 있는 터이니까,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리하여 욕하면서 몽둥이로 때리고 돌멩이 따위를 던지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이를 피해 멀리 가서는 여전히 같은 말을 되풀이하곤 하였다. 그리하여 상불경이라는 이름은 더욱 번져 갔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같은 언행에 깔린 그의 뜻은 무엇이었던가.
중생의 불가사의
도저히 생각할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신비한 일을 불가사의라 할 때, 부처님의 경지나 부처님에 의해 설해진 가르침이 불가사의할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와 똑같이 우리들 중생 또한 불가사의하니, 이는 경전들이 한결같이 지적하고 있는 점이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심으로써 완전한 지혜에 도달하신 것은, 인류 역사에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대 불가사의이다. 그러나 부처님으로 태어나셨기에 그렇게 되신 것이 아니라 성불 직전까지는 어디까지나 중생의 신분이셨던 터이다. 중생에게는 성불의 가능성이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으니, 그런 처지에서는 부처님을 불가사의하다고 한다면 중생도 불가사의함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중생은 부처님의 씨라 할 수 있다. 이 불종佛種이 제대로 자라는 곳에 부처님의 열매(佛果)가 나타나는 것이어서, 누가 부처가 되느냐 하면 중생 말고 어디에 부처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 뜻에서 미래제불이란 바로 우리들 범부를 가리킨다. 또 중생은 부처님이 될 태아를 간직하고 있는 점에서 여래장이라고도 불리운다. 마치 풀 한 포기 나지 못해 신의 저주처럼 느껴지는 사막의 밑바닥에 방대한 양의 석유가 묻혀 있듯, 별별 나쁜 짓도 곧잘 저지르는 범부들의 마음 깊숙한 그 곳에는 불성이라는 이름의 마니주가 간직되어 있는 것이 된다. 성도 직후의 부처님이, \"이상도 하다. 중생 모두가 여래의 상을 하고 있다\"고 찬탄하셨다는 것도 까닭이 있다 할 것이다.
그리고 중생모두에 불성이 있다는 사실은 부처님의 교화를 통해 훌륭히 증명되었다. 앙굴마라는 구백구십구 명을 죽인 악인이었으나 부처님에 귀의해 아라한이 되고, 주리반특은 간단한 게송 하나도 외우지 못할 만큼 어리석었지만 부처님의 지시를 따라 비를 들고 마당을 쓸다가 크게 깨달았다.
흔히 부처님이라면 절에 모셔진 불상을 생각할지 모르나, 불상은 어디까지나 부처님의 상인 터이니까 진실한 부처님은 아니다. 또는 석가여래나 그분에 의해 설해진 여러 부처님이 그것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이런 부처님은 너무 성스러운 한쪽에 세워진 점에서 범부와의 차별이 남으므로 미진한 데가 따른다. 또 사람에 따라서는 법신불을 들먹여 절대적 진리가 진정한 부처님이라 주장도 하겠으나, 이 또한 추상적임을 면치 못한다.
이에 비해 상불경보살은 범부 속에 깃든 부처님을 보고 예배했다. 그 예배 대상이 된 것은, 그 같은 그의 행위에 도리어 성을 내어 돌을 던질 정도로 어리석은 범부들이었지만, 그에게는 모두가 엄연한 미래제불로만 보이기에 예배하고 찬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어서, 여기에 그에 의해 발견된 불타관의 더없는 깊이가 있다. 결국 그에 있어서는 부처님의 불가사의와 중생의 불가사의는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육근청정六根淸淨
경은 이어서, 상불경보살은 이런 행을 닦은 탓에 육근이 청정해지고, 그 결과로 수명이 늘어나 전에 자기에게 반발하던 무리들을 교화해 보리를 이루게 할 수 있었으며, 죽은 뒤에는 무수한 부처님을 뵈어 그 밑에서 법화경을 설했기 때문에 성불했다 하고, 당시의 상불경보살의 정체에 대해 미리 밝히셨다. \"득대세야. 생각에 어떠하뇨. 당시의 상불경보살이란 어찌 다른 사람이랴. 바로 이 몸이었느니라. 만약 내가 과거세에 이 경을 수지하며 독송하여서 남 위해 설하지 아니했던들 능히 이리나 빨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얻지 못했으리니, 내 전세의 불소佛所에서 이 경을 수지하며 독송하여서 남 위해 설했기에, 빨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얻음이로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세 가지이다.
그 첫째는 상불경보살의 범부에 대한 예배가 법화경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었다는 점이다. 법화경의 적문迹門이 부처님 일대의 설법이 기실은 성불로 이끄는 한 가르침일 뿐임을 밝히는 내용이었고, 그 본문은 부처님의 본질을 깊이 파헤치는 성질의 것이었음을 감안할 때, 각자가 모두 부처임을 자각케 하려는 상불경보살의 행위가 법화경에 뿌리내리고 있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둘째로는 그같은 행이 육근청정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육근청정은 앞의 법사공덕품의 주제였던 내용이기도 하거니와, 법화경을 수지해 남에게 설하는 사람은 여섯 인식기관(六根)이 청정해져서 초능력적인 진실을 보고 듣는 따위의 일이 가능해짐을 이른다. 우리는 흔히 자기가 보고 듣는 대로의 객관계가 존재하는 듯이 생각하기 쉬우나, 실은 번뇌에 의해 더럽혀진 육근으로 파악된 양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반야의 지혜가 늘어남에 따라 외부 세계의 모습도 바뀌는 것이어서, 복사꽃을 보고 깨닫거나 돌멩이가 대나무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깨달은 옛 선사의 일도 다 육근청정의 예로 보아 무방하다.
그리고 셋째는 무수겁에 걸친 법화경의 설법이 부처님의 성도를 가져온 점이다. 이는 범부 속에서 부처님을 발견하는 것으로 법화경에 의한 이타행이 시작되어, 그것이 육근청정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는 성도로 이어졌음을 뜻하는 것인데, 법화경은 본래 중생 모두를 성불로 이끄는 가르침이었던 터이므로 당연한 결과이다. 그리고 이 상불경보살이 걸어간 길이야말로 법화행자의 영원한 본이 되어 마땅하다 할 것이다.